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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국력의 세 가지 축 : 자유, 효율, 공정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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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5월08일 18시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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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서울의 한 대학에 파견되어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던 필자는 학교에서 만난 많은 청년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좌절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었다. 스스로를 ‘흙수저’라고 자조하는 청년들의 분노는 불공정한 사회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들이 가진 깊은 절망감에 공감하는 동시에 직업외교관으로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공정함이 한국 외교, 더 나아가 우리의 국력에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었다. 최근 신정부의 정책에 대한 국내 일부의 비판을 접하면서 몇 년 전의 이러한 생각을 공유하고자 한다.

 

국력 측정의 기준은 무엇인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근대 국민국가 체제가 태동한 이래 국력을 측정하고 비교하기 위한 시도는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무엇이 국력을 구성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중시되어온 국력의 잣대는 군사력과 경제력이다.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기준은 여전히 유효한데, 글로벌 강대국으로 손꼽히는 나라들이 군사적, 경제적 강국들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세계시민의식과 인권, 민주주의, 법치 등 보편적 가치가 확산되고, 지속가능개발,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AI), 혁신 등이 부상하는 21세기에는 군사력과 경제력이라는 강성권력(hard power) 요소만으로 국력을 정의 내리기에 한계가 있다. 이에 조셉 나이(Joseph Nye)는 문화적 매력이나 가치와 논리에 기반한 연성권력(soft power) 개념을 주창한 바 있다. 

 

  필자는 이러한 권력 개념에서 더 나아가 국가가 지닌 역량을 총체적으로 동원하여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국가적 결집력을 또 다른 국력의 원천으로 주목하고자 한다. 나폴레옹 군대는 프랑스 혁명이 불러온 국민적 에너지의 결집으로 유럽을 석권할 수 있었다. 특히, 21세기 새로운 환경에서 국가적 결집력은 기술의 가속화가 추동하는 엄청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사회적 신뢰를 제공하여 지속가능한 발전과 번영을 담보하는 힘이 될 수 있다. 

 

새로운 국력 개념의 세 가지 축: 정치적 자유, 경제적 효율성, 사회적 공정성

 

  이에 21세기의 국력의 개념은 강성권력, 연성권력 및 국가적 결집력을 총체적으로 고려하여 국제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이끌어가는 가치 지향적 권력(normative power)으로 이해해야 하며, 이를 정치, 경제, 사회의 3대 축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정치적 측면에서의 자유(freedom)이다. 민주주의, 법의 지배 등 선정(good governance)과 국민 개개인의 인권 존중 등을 모두 이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성숙하고 개인의 권리를 철저히 보장하는 국가와 독재체제하에서 국민들의 자유로운 의사를 억압하고 인권을 탄압하는 국가간의 국격은 큰 차이가 있으며, 이는 국제 논의에서의 의제 선정, 규범 형성, 도덕적 우월성, 리더십 등의 형태로 국제사회에서 국력으로 투영된다. 런시만(David Runciman)도 저서인‘The Confidence Trap’에서 지난 100년간 민주국가와 독재국가간 대결에서 단기간에는 독재국가가 더 효율적이고 이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장기적으로는 위기를 받아들이고 이에 대응해 나갈 수 있는 민주국가가 승리하였다고 분석한 바 있다. 

 

  둘째, 경제적 측면에서의 효율성(efficiency)이다. 경제의 효율성은 최적의 자원배분을 가능하게 하는 시장의 효율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국가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고도로 연계된 세계 경제 속에서 효율적이지 못한 국가 경제는 쉽게 침체되고 이는 국력의 약화로 이어지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개방형 통상국가의 경우 경제 효율성 제고를 통한 경쟁력 확보가 매우 중요한 국력의 요소가 된다.  나아가 오늘날과 같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효율성은 거시경제의 성장과 자원배분의 효율성만이 아니라 창의성과 혁신을 포함하게 된다. 개개인의 창의와 혁신을 보장하고 독려하여 국가 경제의 효율성을 지속적으로 극대화하는 국가들과 그렇지 못한 국가들간의 경제력의 격차는 크게 벌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 사회적 측면에서의 공정성(fairness)이다. 아무리 국가 전체의 부가 크다고 하더라도 부를 축적하기 위한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지 않거나 그 과정이 공정하지 않다면 사회 구성원간 갈등과 반목이 발생하고 사회적 통합은 요원해지게 된다. 또한 과정이 외견 공정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소수가 부를 독점하고 계층간 이동이 어렵다면 높은 갈등 비용이 발생하게 되고, 이는 궁극적으로 국력의 저하로 이어지게 된다. 공정성에 기반한 국가적 결집력은 복원력이 강하고 생산성이 높은 사회를 형성하여 번영을 추동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자유, 효율, 공정이라는 세 가지 가치를 기준으로 어느 한 나라의 상황을 수치화하여 세 개의 축에 표시하면, 3차원의 육면체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측정된 육면체로 어느 한 국가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측면을 고려한 국력을 측정할 수 있다고 본다. 

 

  인구, 영토, 자원 등 국가가 보유한 유형적 자산 외에 상기 세 가지 가치 기준이 골고루 발달하여 정육면체에 가까울수록 국력이 극대화 될 수 있으며, 세 기준이 불균등하게 발달하여 얇은 직육면체를 이루게 되면 그 나라 국력의 잠재력(potential)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국민 개개인의 자유 보장과 경제 체제 및 사회 통합까지를 포괄하는 이러한 국력의 기준은 현재 국제사회가 추구하는 가장 보편적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지속가능개발목표(SDGs)와도 부합한다. 국제사회가 실현하고자 하는 인간 중심적 가치와 포용적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이야말로 강국의 지표가 된다고 하겠다. 또한, 전시 상황에서는 여전히 군사력이 국력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겠으나, 강대국간 대규모 군사충돌이 부재한 최근의 국제정세하에서는 자유, 효율, 공정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국력의 중요성이 커지게 된다.

 

  흔히들 냉전기 미국과 소련을 비교할 때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경쟁을 부각시키곤 한다. 그러나 군사적 경쟁의 기저에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측면에서의 가치 경쟁이 있었으며, 이러한 국력의 차이가 점차 크게 벌어지고 있었고, 소련 붕괴 당시 미국은 가치 경쟁에서 소련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세 가지 기준이 고르게 발전한 덴마크 같은 국가의 경우 인구가 600만에 못 미치는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구를 가진 다수 개도국들에 비해 국력에서 뒤처진다고 평가되지 않는데, 자유, 효율, 공정의 잣대에서 이들을 현저하게 압도하기 때문이다.  

 

 자유·효율·공정이라는 가치 기준으로 본 한국의 국력은?

 

  그렇다면, 자유, 효율, 공정이라는 가치 기준으로 바라본 우리나라의 국력은 현재 어떤 상태일까?

 

  한 세대 만에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이뤄낸 우리나라는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효율성 측면에서 세계에서 유례없는 국력의 신장을 짧은 기간에 이루어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그러나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추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혜택이 고소득층과 대기업에 집중되면서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양극화가 지속적으로 심화되어 왔다. 또한, 이러한 격차를 완화시키기 위한 정부의 노력도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세전과 세후 지니계수 변화가 11.4%로 OECD 국가들 중 최하위권 수준인데, 이는 세금을 통한 소득 재분배 효과가 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특히, 최근 한국 사회에서 청년층이 겪는 어려움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취직, 결혼, 출산, 육아와 같이 예전에는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들이 이제는 무엇 하나 쉽게 이루기 어려운 특권과도 같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문제는 부모세대의 불평등이 자녀세대로까지 이어지면서 소득 양극화가 고착화되고 있으며, 계층 이동을 위해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불리한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불만과 좌절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회와 과정의 불공정이 결과의 불평등을 낳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집값의 폭등으로 내 집 마련의 꿈마저 요원해진 젊은 세대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체념과 절망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최근 불거진 공기업 채용비리는 그나마 공정하다고 여겨졌던 공공부문 일자리 기회에 대한 믿음마저도 져버리게 했고, 이에 대한 청년층의 허탈감은 사회적 신뢰를 저하시키고 있다. 

 

소득 불평등, 국민총소득의 분배, 저임금 노동자 비율 등은 OECD 최하위 수준이 의미하는 것

 

  이러한 상황에서 보다 정의로운 사회, 공정한 사회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일각에서는 공정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경제의 효율성을 저해하고 성장 동력을 위축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타 OECD 국가들과 비교해 볼 때, 소득 불평등, 국민총소득의 분배, 저임금 노동자 비율 등과 같은 주요 지표들에서 우리가 최하위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분명한 시사점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최저임금 인상 등 신정부의 소득주도 성장 정책에 관해서도 단기적으로 드러나는 경제효과로 판단하기보다는, 사회복지의 개선과 형평성 제고를 통해 장기적으로는 경제의 체질을 변화시켜 지속가능한 성장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경우 유럽의 선진국들과 비교할 때 공정성보다는 자유와 효율에 더 큰 방점을 두고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발전시켜 온 사회이다. 하지만, 이는 미국의 독특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기인하는데, 방대한 영토와 풍부한 자원을 배경으로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 사회는 상류층과 하류층 구성원들이 한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의식이 낮고 따라서 소득이나 부의 격차에 대한 저항감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나라나 유럽 여러 국가들이 처한 상황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다. 특히, 한 민족으로서의 공동체 의식과 평등 개념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는 미국 사례의 적용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오랜 역사를 통해 인권과 법치주의 등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함께 경제적 효율성과 사회의 공정성의 조화를 추구해 온 다수 서유럽 국가들은 도덕적 우위를 바탕으로 국제사회의 담론을 이끌어 가고 있는데, 비슷한 형편인 우리나라가 추구해야 할 지향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우리 국민은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높은 교육수준을 바탕으로 정의와 공정성에 대한 강한 기대감을 갖고 있다. 2017년의 촛불혁명도 이러한 우리 국민의 특성이 있어서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최근 들어 사회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는 갑질 문화에 대한 비판과 “미투(me too) 운동”으로 불리는 직장내 성폭력 문제 제기 또한 권위주의 문화와 권력 남용에 대한 반성과 저항이며, 결국 보다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진통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정사회 구축으로 국력의 극대화 기대

 

  우리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는 보다 정의롭고 공정하며 형평한 사회를 향한 요구, 그리고 이에 부응하여 추진되고 있는 신정부의 여러 노력들은 21세기 국력의 한 축인 공정성을 제고시킬 것이며,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 것으로 확신한다. 이를 통해 자유, 효율, 공정이라는 세 개의 축으로 측정한 우리나라의 국력이 보다 크고 고르게 성장해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자유민주주의 발전과 경제 성장을 동시에 이룩한 대만민국이 이제는 공정한 대한민국으로 거듭나서 우리 국력의 잠재력을 국제무대에서 최대한 실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결국 외교도 정치의 연장인 만큼 우리 국력의 잠재력이 최대한 발휘될 때 대한민국이 선진 외교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끝>

 

< ※ 이 글은 외교협회지 2018년4월호(통권125호)에 실린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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