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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책연구개발 ‘성공률 95%’라고 자랑하는 한심한 현실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4월25일 17시35분

작성자

  • 송종국
  • 한양대 특훈교수, 前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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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정책, 이대로는 안 된다

세종 시대, 지금으로부터 550여 년 전 우리 선조들은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찬란한 문명을 만들었다. 2017년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세종대왕의 과학기술 진흥이 단지 장영실에 대한 후원만으로 이루어 진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과학기술로 백성의 삶을 편하게 하려는 세종의 정책은 당시 지배세력인 사대부들과의 마찰을 감수한 개혁이었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려는 세력과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 간의 갈등은 고금과 동서를 막론하고 존재해 왔다. 지난 20년간 과거의 경제성장 패러다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질서와 제도를 만들어 가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가기 위한 골든타임을 지켜야 

우리나라는 빠른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가기 위해 경제와 과학기술의 골든타임을 지켜야 한다. 선진국을 모방하고 따라 가던 시절에는 전략산업을 선정하고 그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연구개발 사업이 유효했다. 그러나 창의적 아이디어가 과학기술과의 융합을 통해 산업발전을 주도하는 경제에서는 새로운 과학기술 정책이 필요하다. 스마트폰으로 시작하는 디지털융합 기술은 백지에 그림을 그리듯 발전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새로운 시장가치를 창출하는 사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2017년 초 포천(Fortune)지의 발표에 따르면 자산가치가 10억 달러 이상인 유니콘 기업은 174개에 달한다. 소셜커머스, 전자상거래, 헬스케어, 운송, 숙박, 핀테크, 온라인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장가치를 창출하는 사업이 등장하고 있다. 우버와 에어비앤비 등은 실물자산을 소유하지 않고 오로지 사업 모델만으로 기존의 숙박업과 운송업의 자산 가치를 넘어서는 기업이 되고 있다.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은 끊임없는 M&A를 통해 신사업을 창출하고 있다. 구글은 더 이상 소프트웨어 회사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인자동차, 가상현실,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한 신사업 모델을 찾고 있다. GE는 기존 하드웨어 산업의 효율 제고와 비용 절감을 위한 제어 소프트웨어 전문기업으로 변신하고 있다. 

 

연목구어(緣木求魚)의 우를 범한 역대 정부의 신성장 동력 발굴

우리도 지난 세 정부에서 신성장 동력을 찾기 위한 연구개발 사업을 추진해 왔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노무현 정부의 차세대 성장 동력 사업은 디지털 TV・방송, 디스플레이, 지능형 로봇, 미래형 자동차, 차세대 반도체, 차세대 이동통신, 지능형 홈 네트워크, 바이오신약・장기, 디지털 콘텐츠 등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신성장 동력 사업 22개는 에너지・환경과 수송 분야를 제외하면 반도체, 디스플레이, 차세대 무선통신, LED조명, RFID・USN, 로봇, 신소재・나노융합, IT융합시스템, 방통융합미디어, 바이오신약 및 의료기기, 문화콘텐츠, 소프트웨어, 디자인, 헬스 케어 등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신성장 동력으로 선택된 분야도 거의 유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했을까? 그동안 신성장 동력을 발굴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이 작동하지 않았던 까닭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의 우를 범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직접 성장 동력을 선정하고 육성하여 경제의 발전을 이끌어가던 추격형 전략을 적용했는데, 그러한 전략이 실제 연구개발과 시장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부가 연구개발사업의 성공률이 95% 이상이라고 자랑스럽게 발표하는 것이 R&D정책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과학기술 정책의 정의와 역할부터 새롭게 재정비해야 

우리나라가 선도자의 과학기술 발전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역할부터 재정비해야 한다. 정부가 중점을 두고 추진할 과학기술 정책의 새로운 정의와 역할을 모색해야 하며, 무엇보다 정부가 주도할 정책 영역과 민간에 맡겨야 할 영역을 구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연구개발 결과가 기업에서 응용되고 시장에서 활용되는 선진국의 방식을 눈여겨봐야 한다. 미국의 국방고등기술개발(DARPA) 프로그램은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 DARPA 프로그램을 통해 구조용 로봇, 음성인식, 3D프린팅, 다빈치 수술로봇, 인공혈액, 무인자동차, GPS, 인터넷 등의 기술이 개발되고 시장에서 활용되었다. DARPA의 각 사례들이 성공한 이유는, 처음부터 시장 활용을 염두에 두었기 보다는, 국방이라는 공공분야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업 모델을 명확히 했고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은 향후 몇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변화를 필요로 한다. 

 

공공서비스의 질 높이는 영역, 연구개발 투자 늘려야 

첫째, 정부는 그동안 소홀히 했지만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공공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영역에서 연구개발 투자를 늘려야 한다. 국방, 재난・재해 및 안전, 보건, 환경, 우주개발, 에너지 등의 공공분야가 그 영역이다. 이들 분야는 목표 설정이 비교적 뚜렷하고, 정부구매를 통한 신산업 창출의 가능성이 있다. 공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과 전략적 투자는 공공부문으로부터의 스핀 오프(spin-off)를 촉진하여 민간의 성장을 견인할 수 있다.

둘째로, 과학기술 정책의 의사결정자들은 정부 서비스의 목표를 설정하고 전략적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규제개혁을 위해 이해당사자들을 조정하는데 상당한 역량을 결집시켜야 한다. 그물망처럼 촘촘한 규제 속에서는 창의적 융합기술과 제품 및 기업이 태어나 성장할 수 없다. 특히 기존 산업에 적용된 각종 시험・분석・평가는 물론 인・허가 기준으로는 신산업을 창출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과학기술 정책을 이끌어가는 공무원과 정책 지식인들은 대안적 규제체계의 발명과 새로운 질서로의 변화를 위한 소통과 조정 업무 역량을 키워야 한다.

 

창의 인재들의 자율과 책임이 담보되는 혁신환경 구축이 절실

마지막으로, 과학기술 정책의 새로운 주안점은 연구자들이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연구관리 제도를 개선하는 데 있어야 한다. 연구개발은 끊임없이 지식과 과학기술의 경계를 허물며 축적해나가는 과정이다. 불확실성이 높은 원천 및 기초연구 분야의 연구개발 활동은 무수한 실패를 바탕으로 발전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의 노력은 기초연구 지원의 양적 성과의 증진보다는, 창의 인재들이 역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자율과 책임이 담보되는 혁신 환경의 구축에 있어야 한다. 연구결과의 상업화 촉진을 위해서는 교육에서 기업가정신의 함양과 창조경제혁신센터나 클러스터와 같은 혁신 생태계 조성이 중요하다.

미래 50년 국가 발전의 청사진이 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 정책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정부가 과거처럼 연구개발 전 과정에 관여하고 개입하려는 미세조정(fine tuning) 정책을 지속한다면 신성장 동력과의 숨바꼭질은 계속될 것이다. 새로운 과학기술 정책을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모습으로 꾸준히 시행한다면 우리나라는 분명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물론, 그 결과가 산업경쟁력으로 선순환이 될 수 있다.

<※이 글은 필자가 과학기술50년사에서 집필한 내용을 토대로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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