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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5 자만심으로 멸망한 틈새왕국, 남량(D)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05월23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5월22일 10시04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11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17) 여광의 반란 수습 실패와 북량의 세력 확장(AD398)

 

태원공 여찬이 직접 양궤를 공격했으나 주변에서 지원하는 군대들이 몰려와 여찬이 크게 실패했다. 여찬은 도읍(무위)로 돌아왔다. 장액에 있던 북량 주군 단업은 저거몽손에게 권하여 서군(감숙성 영창형)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저거몽손은 서군을 지키던 태수 여순(여광 동생의 아들)을 포획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진창(감숙성 안서현)태수 왕덕과 돈황(감숙성 돈황)태수 맹민이 모두 북량의 주군 단업에게 항복해 들어왔다. 

 

여찬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성공한 양궤는 이참에 무위로 쳐들어가 여광을 뿌리 뽑으려 들었다. 그러나 참모 곽논이 아직 때가 이를 뿐더러 후량의 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들어서 말렸다. 후량의 장수 여홍은 장액 부근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북량의 단업이 저거남성과 왕덕을 시켜서 여홍을 공격하도록 했다. 여홍이 갑자기 북량의 공격을 받게 되자 후량 주군 여광은 동생 여찬을 급파하여 돕도록 했다. 양궤가 걱정하며 말했다.

 

 “ 여홍의 군대와 여찬의 구원군이 합쳐지면 

   후량의 군사력은 너무 강해져서 뺏을 수가 없게 된다.

   서둘러 여홍-여찬의 세력을 깨뜨려야 한다.“

 

양궤가 남량의 독발이록고와 연대하여 지원 오는 여찬군을 도중에서 맞서 싸웠으나 양궤가 크게 패하자 양궤는 왕걸기에게 도망갔다. 양궤가 홀로 왕걸기에게로 도망가자 그의 참모 곽논은 무리를 이끌고 걸복건귀의 서진에 항복했다. 지원오던 여찬의 군대가 도중에 양궤-독발이록고에게 공격을 당하여 못 오게 되자 여홍은 지키던 장액성을 버리고 급히 동쪽으로 도망갔다. 단업이 여홍을 쫒아가려 했으나 저거몽손이 말렸다.

 

 “ 돌아가는 군대는 막는 것이 아니며,    

   궁지에 몰린 도적은 뒤 쫒지 않는 것이 

   병가의 경계하는 바입니다.“

 

단업은 듣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쫓아갔다가 대패했는데 저거몽손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단업은 돌아와 서안(감숙성 산단현)에 큰 성을 쌓고 장막해를 태수로 삼아 지키게 했다. 저거몽손은 장막해의 인물됨이 모자람을 들어서 태수로 자격이 없음을 지적했지만 듣지 않았다. 서안성은 얼마 있지 않아서 후량 여찬에게 처참하게 유린되고 말았다.(AD398)

   

 (18) 양궤의 남량 귀순과 남량의 세력 확장과 낙도 천도(AD398)

 

후량 조정 안팎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동안 단업과 저거몽손의 북량이 하서회랑의 서쪽 장액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다면 남량의 독발오고 또한 청해 지역과 그 동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양궤는 여러 이민족을 규합하여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염천(감숙성 민화현)에 주둔했다. 왕걸귀의 권고를 받아들여 양궤는 남량 독발오고에게 귀순했다. 양궤는 강족 추장 양기에게 패하여 도망갔는데 독발오고는 양기를 쳐부수어 요하(청해성 귀덕현) 방면으로 쫓아내었다. 자신의 세력이 서녕의 동북쪽으로 확대되자 독발오고는 AD399년 치소를 서녕에서 동쪽 낙도(청해성 낙도)로 옮기기까지 했다. 더 큰 꿈을 가지고 세력 확장을 계획하는 독발오고는 여광의 후량, 감숙성 난주 걸복치반의 서진, 그리고 단업과 저거몽손의 북량 중 어디부터 쳐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양통이 이렇게 말했다.

 

  “ 서진의 걸복씨는 원래 우리와 같은 한 부락이었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복종할 것입니다.

    북량의 단씨는 서생에 불과하여 결코 난을 일으킬 재목이 아닙니다. 

    결국에는 우리에게 화친을 요청할 것이니 

    이를 먼저 치는 것은 의롭지 못합니다.

    여광은 늙었고 후계자 여소 또한 무능하며

    다른 아들 여찬과 여홍 또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격해 들어가면 싸우지도 않고 도망갈 것입니다.  

    후량의 여광을 먼저 공략하셔야 합니다.

    나머지는 저절로 떨어지게 됩니다. “

 

독발오고가 소리쳤다.

 

  “좋다”

 

AD399년 단업은 스스로 북량왕이라고 부르면서 연호를 신새(神璽)에서 천새(天璽)로 고쳤다. 그리고 저거몽손을 상서좌승, 양중용을 상서우승으로 임명했다.

 

(19) 후량의 북량 공격과 남량에 구원 요청(AD399)

 

서쪽에서 남량, 북량, 서진 등의 여러 나라들이 후량을 배반하여 일어나자 종주국 후량 또한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여찬과 여소 형제가 장액에 근거지를 둔 북량의 단업을 제일 먼저 공격했다. 갑자기 쳐들어오는 후량에게 놀란 북량의 단업은 남량의 독발오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독발오고는 양궤와 동생 독발이록고를 파견했다. 남량의 지원군이 온다는 말에 자신이 생긴 단업이 나가 싸우려 하자 실세 저거몽손이 말렸다.

 

 “ 싸우지 않으면 태산 같은 안정이지만

   나가서 싸우면 계란 같은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

 

단업이 전투를 중지했다. 후량의 여찬과 여소도 남량이 북량을 도와 연합작전을 편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돌려 돌아가고 말았다. 이것은 후량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실수다. 남량군이 도착하기 전에 단업을 쳤어야 했다. 승부야 붙어 봐야 아는 것이지만 북량의 단업이 지원을 요청할 정도였다면 허약했다는 증거일 수가 있고 만약 후량이 북량을 제압했더라면 남량도 지원을 중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불행하게 여찬 여소 형제가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후량이 남량이나 북량이나 서진 보다 먼저 멸망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 남량 독발오고의 취중낙마 사망(AD399)

 

남량의 무위왕 독발오고가 취중에 낙마사고로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죽게 되었다. 측근을 불러 이렇게 명령했다.

 

  “ 나이든 사람을 후계로 세우라! ”

  

독발오고의 유조에 따라 제일 큰 동생 독발이록고를 후계자로 세웠다. 독발이록고는 치소를 다시 낙도에서 서평(서녕)으로 옮겨왔다. 형님이 천도하고 나서 돌아가신 것이 불길하기도 하고 또 그동안 너무 빨리 영토를 확장하면서 본거지 서녕의 지배력이 불안하기도 했다.  

                

(21) 여광의 죽음과 흔들리는 후량 (AD400)

                     

후량의 창업자 여광이 병으로 위독했다. 이 때 여광의 나이는 62세 였다. 여광은 여러 형제를 불러 모은 뒤 그들에게 태자 여소를 잘 돌봐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아들 여찬은 태위, 여홍은 사도로 임명했다. 그리고 특별히 세자 여소를 따로 불러 당부했다.

 

 “ 지금 국가에는 어려움이 많다.

   세 주변 국가들이 틈새를 엿보고 있다.

   내가 죽으면 큰 형 여찬에게 6군을 통수하게 하고

   작은 형 여홍에게는 조정 정치를 맡겨라.

   너는 몸을 극도로 공손하게 하여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중요한 것을 모두 두 형에게 위임하기만 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제대로 잘 돌아 갈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내부 분란으로 조석 간 큰 변란이 닥칠 것이다.“

 

여광은 또 여찬과 여홍을 불러 마찬가지로 간절히 부탁했다.

 

 “ 능력이 모자라는 영업(여소의 이름)에게 맡기는 것은

   적자를 세우는 법도 때문이라서 그런 것이다.  

   지금 외부에는 적들이 우글거리고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러나 너희 형제가 화목하기만 하면 우리 왕조의 복은 만세까지 떨칠 것이고,

   내부에서 서로 불화한다면 재난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니

   극히 조심하도록 하라.“

 

여찬과 여홍은 울면서 약속했다.

 

 “ 감히 그런 일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不敢)”

 

여광은 특히 여찬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

 

 “ 너는 성품이 거칠고 난폭하여 내가 심히 우려하는 바이다.

   영업을 잘 보좌하고 참소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말거라.“

 

그 말을 마치고 여광은 죽었다. 세자 여소는 여광의 죽음을 비밀에 부쳤다. 형 여찬이 곡을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나오자 여소가 다가가 자리를 형에게 양보했다.

 

 “ 형님은 공적도 높고 나이가 많으시니    

   마땅히 대통을 이으셔야 합니다.“

 

여찬이 사양하며 말했다.

 

 “ 폐하가 나라의 적자이신데 

   어찌 신이 그것을 범할 수 있겠습니까?“

 

여소가 여러 번 사양의 뜻을 밝혔으나 여찬 또한 끝내 받지 않았다. 표기장군 여초가 여소에게 은근히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여초는 여광의 조카로 여소의 사촌 형이기도 했다.

 

 “ 태원공 여찬은 여러 해 동안 장수로 있으면서 

   위엄이 안팎을 진동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 영구 앞에서도 큰 슬픔을 보이지 않고 

   또 걸음걸이가 당당한 것을 보면

   장차 다른 뜻을 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참에 제거하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여소가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 먼저 돌아가신 황제의 유언이 아직 귀에 생생한데

   어찌 그런 끔찍한 말을 하는 것이요.

   나는 어린 나이에 나라를 물려받았으니

   두 형님께 의지하여 집안과 국가를 편안하게 할 따름입니다. 

   설사 나를 도모하려 한다고 해도 나는 죽음으로 맞을 것이지 

   차마 먼저 제거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시는 그런 말을 입에 담지 마시오 ! “

   

(22) 서자 여찬-여홍의 쿠테타(AD400)

 

여찬이 여소를 알현하였는데 칼을 잡고 서서 여소를 호위하던 여초가 조용히 여소에게 권했다.

 

 “ 이때가 절호의 기회입니다.

   여찬을 체포하십시오.“ 

 

여소는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들을 제가하려는 낌새를 알아차린 여홍이 은밀히 상서 강기를 여찬에게 보내 말하도록 했다.

 

 “ 아무래도 주상은 어리석고 연약하여

   큰 어려움을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공적과 위엄이 뛰어나신 형님께서 서둘러 일어나셔서 

   사직을 바로 잡으시고 나라기반을 세우셔야 합니다. 

   작은 절개에 얽매이시면 안 됩니다.“

 

마침내 여찬이 결정했다. 밤에 장수와 병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궁성을 공격하고 여홍 또한 군사를 이끌고 궁성의 동쪽을 공략했다. 궁궐 대문을 지키던 좌위장군 제종이 여찬의 무리를 막아서며 외쳤다.     

 

  “ 어떤 놈들이냐?”

 

여찬의 무리들이 태원공이라고 하자 제종이 외치며 말했다.

 

 “ 나라의 변고가 생겨서 새 주상이 오르셨는데

   태원공의 행차가 집으로 가지 아니하고 

   궁궐로 난입한 것은 변을 일으키려는 것 아닌가!“

 

칼을 뽑아들고 여찬의 머리를 향해 내리치려고 했다. 여찬의 무리들이 막고 제종을 사로잡았다. 여찬이 말했다.

 

 “ 의로운 사람이다.

   죽이지 마라. “

 

여소의 금위군과 여초의 수하 2천여 명이 달려 나가 여찬을 막았으나 모두들 여찬의 위엄에 눌려 저항하지도 않고 항복하고 말았다. 여소는 자결했고 여초는 광무(감숙성 난주 북쪽)로 달아났다.  

 

여찬은 비록 나이도 많고 또 혁혁한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당초 쿠테타 계획을 먼저 세운 것도 여홍이고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도 여홍이었으므로 왕위를 여홍에게 양보했다. 여홍도 사양하며 말했다.

 

 “ 행정수반으로써 여소를 세우는데 제가 간여 한 것은 사실이지만 

   부황의 유지를 거역하고 다시 내려 앉힌 것은

   무리들의 마음이 따르지 않아서였습니다. 

   제가 어찌 형님을 앞서서 즉위하는 것이 제 본뜻이겠습니까? ”

 

마침내 여찬이 승낙하고 여홍에게 이렇게 밝히도록 했다.

 

  “ 먼저 돌아가신 선황의 유지가 이와 같다.”

 

여찬이 죽은 여광의 뒤를 이어 후량의 2대 군주가 되었다. 여홍에게는 대도독, 독중외제군사, 대사마, 사예교위 및 녹상서사라는 중책이 내려졌다. 군사와 행정과 황제호위와 행정견제의 모든 권한이 여홍에게 주어진 것이다. 광무로 도망갔던 여초가 편지를 보내와 용서를 빌었다. 여찬은 그의 무재를 높이 사서 사면하고 원래의 작위를 모두 회복시켜줬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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