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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9L: 한 판 전쟁으로 망한 전진(前秦)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3월22일 16시33분
  • 최종수정 2018년03월22일 16시34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48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68) 비수(肥水)대전의 참패(AD383)

 

 

AD383년 정월 전진의 효기장군 여광(3년 뒤 후량을 세움)이 동진정벌을 준비하기 위하여 장안을 출발해 황하를 끼고 동쪽으로 내려왔다. 지난 해 서역을 정벌할 때 항복받은 선선왕 휴밀타와 미전도 향도로 자원 동참했다. 5월 동진의 거기장군이자 군사 실권자인 환충은 10만 군사를 이끌고 호북성 송자에서 북으로 올라왔다. 4년 전(AD379년, 위(62) 참조) 빼앗긴 양양지역을 수복하자는 생각이었다. 유파는 정북진 하여 양양으로 나아갔고 곽전은 양양의 배후 단강구를 습격했다. 양량은 장강을 거슬러 서쪽 방면으로 부성(사천성 면양)을 향했는데 촉지역 전진 군사를 묶어두기 위한 전략이었다. 

 

부견은 즉각 정남장군 부예와 관군장군 모용수에게 보기병 5만을 주어 환충의 양양방면 군사를 막게 하고 사천성 방면에는 요장과 장자를 보내 막았다. 환충의 군대는 면수(한수) 남쪽으로 퇴각했다. 오래 전부터 동진정벌을 꿈꾸며 공격개시 시점을 저울질하던 부견으로서는 환충의 양양 역습이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즉각적으로 전국에 동원령을 발표하였다. 전국 동네마다 장정 10명에 1명을 강제로 차출하였다. 그 중에 20세 이하로 재능과 용맹을 갖춘 자는 황실호위 우림랑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AD383년7월)

 

“ 동진의 사마창명(현재 황제 효무제)은 상서좌복야, 

  사안은 이부상서,

  환충은 시중으로 임명할 것이며

  이들에게 새 저택을 하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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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견은 8월 2일 부융과 부굉과 모용수에게 25만 군사를 나누어 주고 선봉에 서게 하였다. 요장에게는 용양장군의 직책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 옛날 짐이 용양장군으로 대업을 이루었소.

  일찍이 남에게 내린 적이 없는 직책이니 분발하시오.“

 

엿 세 뒤인 8월 8일 부견도 스스로 60만 보병과 27만 기병을 이끌고 부견이 장안을 출발했다. 전국 각국의 차출군사 수 십 만 또한 동진을 향해 남으로 혹은 동으로 내려왔다. 부융의 30여만 선봉이 9월 제일 먼저 영구(안휘성 영상현)에 도착했다.

 

동진 조정은 크게 술렁거렸다. 상서복야 사석을 정토대도독으로 임명하고 서주,연주자사 사현을 전봉도독에 임명했다. 동진의 방위군은 보국장군 사염과 서중랑장 휘하의 약 8만이었다. 전진군의 1/10도 안 되었다. 초조해 진 사현이 들어가서 삼촌 사안에게 대책을 물었다. 사안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 내 따로 생각해 둔 게 있다.”

 

사실은 사안에게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태연한 척했던 것이다. 사안은 곧 물러나 산중의 별장으로 가 조카 사현과 바둑을 두었다. 평소 사현에 비해 실력이 한참 모자라는 사안이었지만 그 날을 긴장한 사현을 완벽하게 이겼다. 환충은 걱정이 되어 정에 3천을 건강에 보내 황제를 호위토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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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안은 필요 없다고 되돌려 보냈다. 환충은 위급한 전시에 바둑이나 두고 3천 정예병을 돌려보내며 게다가 나이 어린 동생 사석이나 조카 사현을 전쟁의 책임자로 임명하는 사안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10월 부융의 군대가 수양(안휘성 수현)을 먼저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모용수는 운성(호북성 안륙)을 함락시켰다. 전진은 동진 대도독 사석에게 서한을 보내 순순한 항복을 권했다. 그 사이에 사현은 유뢰지에게 정예 5천을 보내 부융의 전진 선봉의 오른쪽 배후인 낙간을 기습 공격하고 전진 장군 양성을 잡아서 참수하고 전진의 자사 왕현을 생포했다. 이번 전투에서 동진군이 올린 최초의 전과였다.

 

전진의 100만 대군은 비수(안휘성 수현을 오른쪽으로 끼고 도는 강) 서쪽 강변에 진을 쳤다. 동진군은 비수 동쪽에 대치했다. 부견과부융이 수양성루에 올라가 동진군대를 보니 대오가 엄격히 정렬되어있고 팔공산 수풀 또한 동진군대로 보였다. 부견이 말했다.

 

“누가 동진군이 약하다고 했느냐?”

 

부견이 낙심하여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양쪽 군대 모두 먼저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사현이 부융에게 제안해 왔다. 지구전으로 갈 생각이 아니고 한 판 결전을 붙을 생각이라면 전진군대를 약간 뒤로 물려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렇게 해주면 동진군이 물을 건너서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제안이었다. 많은 전진 장군들은 반대했다. 수적으로 압도적으로 이쪽이 많으므로 저들이야말로 전쟁의 생각이 없을 것인데 물려주면 전쟁하겠다는 것은 반드시 무슨 계략이 숨어있는 증거라는 것이었다. 부견은 생각이 달랐다. 오히려 물을 건너는 그들을 역습하자는 생각이었다. 이 생각 또한 그럴 듯했다. 부융도 동의했다. 마침내 전진의 대군이 약간 뒤로 몰러나 주기로 결정했다. 

 

100만 대군이 물러난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배치된 병기와 개인 무기를 다 들고 뒤로 물러나야 하므로 엄청난 혼란이 수반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라서 모두가 매우 긴장된 상태에서 몸과 무기를 이동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적군이 도착하기 전에 다시 전투태세를 갖추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전진 대군이 혼돈 속에 물러나는 틈을 노리고 동진군이 습격해 왔다. 뒤쪽 어디선가 전진 군대가 패했다는 외침도 들려왔다. 전진군은 더욱 큰 혼란에 빠졌다.     

 

이렇게 외친 사람은 주서(周序)였다. 주서는 동진의 훌륭한 장수요 행정가였다. AD379년 전진이 양양을 함락시킬 때 어머니 한씨와 함께 끝까지 항거하다가 부비에게 사로 잡혔던 인물이다. 절조를 지킨 것에 감탄한 부견이 전진 조정에서 탁지상서의 직을 수행하다가 이번 동진정벌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동진 쪽에 사신으로 가서 항복을 설득한 사람이 주서였다. 

 

전진의 100만 대군은 참혹하게 붕괴되었다. 넘어진 전우를 수백, 수천의 동료들이 밟고 넘어가면서 전사자는 열에 일곱, 여덟에 달했다. 전진의 모든 병기는 물론 부견이 타던 운모거마저 포획되었다. 부융이 전사했고 부견은 떠도는 화살에 맞아 부상당해 회수 이북을 떠돌다가 주민에게 더운 물에 말은 밥을 얻어먹게 되었다.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비단 열 필과 솜 열 근을 주었으나 그 노인은 사양하면서 말했다.

 

“ 폐하께서는 안락함이 싫증나셔서 전쟁을 일으키셨지만

  저희들은 그런 폐하를 아버지처럼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밥을 드리는 데 무슨 보답이 필요합니까?“

   

노인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부견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부인 장씨에게 말했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천하를 다스린단 말인가?”

 

 

(69) 모용수의 도망(AD383)

 

전진의 100만 대군은 8할 이상 깨졌지만 3만의 모용수 군대는 거의 다치지 않았다. 먼저 운성(호북성 안륙)을 함락시키느라 직접 비수대전에 참여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 모용보가 모용수에게 간청했다.

 

“ 아직 때가 이르지는 않았으니 뜻을 감추어야 합니다. 

  전진 주군이 패배하여 우리에게 몸을 의탁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우리 연에게 주는 호기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십시오.“

모용수는 머뭇거렸다.

 

“ 네 말이 옳다.

  그러나 전진의 주군은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지 않았느냐.

  지금 어린 아이 같은 위태로움에 빠져 있는데 어찌 그를 해치겠느냐.

  하늘이 이미 부견을 버린 것 같으니 그가 망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그의 위험을 보호해주어 은덕을 덕으로 보답한 뒤

  틈이 생기는 것을 기다렸다가 도모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묵은 마음을 지니면서 동시에 의로움으로 천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모용수의 모든 부장들은 하나같이 이 기회에 부견을 처치하자고 했지만 모용수는 그에게 입은 깊은 은혜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휘하 3만 군사를 모두 부견에게 돌려보냈다.

 

부견은 흩어 진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장안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모용수는 부견에게 북쪽 유주지역의 흉흉한 인심을 거두기 위해 자신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부견은 좋다고 허락했다. 권익은 기르는 매를 날려 보내는 것과 같으니 안 된다고 했다. 부견이 말했다.

 

“필부도 말을 뒤집지 않는 법이요.

 천명에 흥하고 망하는 뜻이 있다면

 내가 허락하고 안 하고 상관없이 되는 것이요.“  

 

상서좌복야 권익이 말했다.

 

“폐하는 사소한 신용을 중히 여기시지만

 사직을 가벼이 여기시는 것입니다.

 신이 보건대 이번에 그가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관동의 혼란이 바로 그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부견은 끝내 3천 군사를 주어 모용수를 가게 했다. 권익은 모용수를 제거하기 위해 하교라는 다리 곁 창고로 몰래 모용수를 불렀다. 모용수는 정동이라는 측근에게 자신의 옷을 입혀 보내고는 그 길로 대나무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다. 정동이 다가오자 권익이 숨겨둔 자객들이 나타났는데 정동은 잽싸게 도망쳐 나왔다. 

 

 

(70) 전진의 해체와 열국의 분열(AD384-AD385) 

 

모용수는 안양(하남성 안양)에 도착했다. 그곳은 부견의 아들 부비가 지키고 있었다. 부비는 모용수를 직접 맞았다. 모용수 참모들은 부비를 잡고 군사를 일으키라고 독촉했으나 모용수는 따르지 않았다. 부비도 모용수를 제거할까 했는데 강양이 엄중하게 호위해서 견제하면 될 것을 죽일 것까지는 없다고 말렸다. 모용수는 업성 부근에 사실상 가택 연금되었다.    

 

이 때 적빈이라는 흉노족 잔당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낙양을 점령하려 하였다. 부견은 즉시 모용수에게 편지를 보내 적빈을 토벌할 것을 명령하였다. 석월은 부비에게 모용수를 놓아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부비는 모용수가 가까이 있는 것보다는 멀리 있는 것이 더 안전하고 또 모용수나 적빈이나 모두 오랑캐이니 서로 싸움을 붙이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병든 병사 2천과 낡은 갑옷을 주어 모용수를 떠나보냈다. 그리고 부비룡이라는 자를 첩자로 모용수 군대에 심어 두었다. 모용수의 막료 민량과 이비가 부비룡이 자객임을 몰래 알려 주었다. 모용수는 병사의 수가 너무 적어 낙양으로 가는 도중에 자원군사를 모집했는데 열흘 동안 8천을 모았다. 그리고 행군 도중에 자객 부비룡을 제거했다. 모용수가 업에서 모용농을 남겨두고 낙양을 향해 다시 황하를 건널 때 이미 병력은 3만을 넘었다. 모용농에게 사람을 보내 서로 호응해야 한다고 알려줬다. 모용농은 업을 빠져 나와 도망쳤다.(AD383년12월)

장락공 부비는 모용농이 사라진 것을 알고 나서야 모용수 무리들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71) 모용수가 후연 건국(AD384)

 

낙양을 공격하고 있는 적빈 무리들 안에는 옛 전연의 유민들이 많았다. 모용봉, 왕등, 단연 등과 같은 전연의 유민들은 적빈을 설득하여 모용수 휘하에 들어가기를 종용했다. 적빈도 수락했다. 모용수도 적빈의 무리를 환영했다. AD384년 1월 2일 모용수의 대군이 낙양에 당도했다. 그러나 낙양을 지키던 부휘는 부비룡을 죽인 모용수를 믿을 수가 없었다. 문을 닫아 걸고 열어주지 않았다. 적빈 무리는 낙양을 공격하자고 재촉했다. 모용수는 낙양의 지세가 사방으로 트인 곳이라서 함락을 시키더라도 공격을 받기 매우 쉬운 땅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모용수와 적빈의 대군은 다시 머리를 돌려 업으로 향했다. 모용수가 형양에 도착했을 때 온 무리들이 모용수를 대도독 연왕으로 추대했다. 후연(AD384-AD409)이 건국된 것이다.

 

모용수의 둘째 아들 모용농은 업을 빠져나와 동생 모용해와 모용소와 함께 주변 지역을 돌면서 군사를 규합했다. 오환의 장양, 필홍, 장연, 이백, 곽호 등의  흉노족과 여화 칙발이라는 동이 등 여러 이민족을 모았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전진의 맹장 석월을 격파하고 죽였다. 석월이 죽자 도처에 전진 조정에 대한 반란이 불처럼 일어났다.    

 

연왕 모용수는 정령과 오환의 혼합군 20만 대군으로 업을 공격했으나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업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었다. 그러나 포위 상태가 8개월에 가까워오자 말먹이와 군량미가 다 떨어져 소나무 껍질로 연명했다. 연왕 모용수가 포위를 풀고 적들이 달아날 공간을 주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용수가 군사를 물려 포위를 풀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비는 성을 버리지 않고 버티었다. 밀사를 보낸 동진 사현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현은 2만 군사와 함께 군량미 2천곡(곡=1석, 열 말)을 장군 유뢰지를 통해 수송해 보내 줬다. 모용수는 다시 업을 포위하고 다만 서쪽을 터줘 도망갈 틈만 만들어 주었다. 모용수는 부견이 AD385년 죽자 AD386년 정월 61세의 나이에 황제에 올랐다. 후연의 창시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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