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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 흥망의 교훈:#5D 졸지에 건국하고 망해버린 전조(4)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06월08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17년06월08일 17시11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38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8> 유총을 바로 잡아주던 유황후 사망(AD314년 1월)

 

AD304년 벽두에 불길한 징조가 하늘에 나타났다. 대규모 유성이 견우별자리에서 나와 자미성별자리로 들어갔으며 거대한 빛이 땅을 비추다가 평양(임분) 북쪽의 땅에 떨어졌는데 길이가 30보에 넓이가 27보나 되었다. 유총이 무슨 까닭인지를 신하들에게 묻자 진원달이 이렇게 말했다.

 

“ 여자에 대한 총애가 깊으면 나라가 망할 징조입니다.”

 

유총이 웃으면서 말했다.

 

“ 이것은 자연의 음양에 관한 이치인데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겠소? “ 

 

유총의 황후 유씨(유아)는 매우 현명하여서 유총의 일이 그릇되면 반드시 그것을 바로잡아 주었고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꼭 지적하여 고치도록 하였다. 그런 고마운 유황후가 1월19일 죽었다. 유총이 가장 아끼는 황후가 죽자 수십 명 비빈들은 온갖 계교를 동원하여 유총의 총애를 받기 위해 날뛰었는데 이러는 과정에서 조정과 후궁의 기강이 크게 무너졌다.  

 

유황후가 죽은 다음 해(AD315년3월) 유총은 세 명의 황후를 세웠는데 유귀비(죽은 유아의 언니 유영)를 좌황후, 중호군 근준의 딸 근월광과 근월화를 각각 상황후와 우황후로 책봉하였다. 좌사예교위 진원달이 고금을 통하여 그런 예가 없다고 반대하고 나섰다. 유총은 진원달을 우광록대부로 삼아 조정에서 내쫓으려고 했다. 태위 범륭과 조정 권신들은 오히려 진원달을 태위로 추천하여 더 높고 중한 직책을 줘야한다고 맡섰다. 유총이 양보했다. 진원달을 좌사예교위직에서 어사대부 및 의동삼사의 자리로써 삼공 바로 다음 자리로 오히려 승진시킨 것이다.

  

 

<19> 중상시 왕침의 국정농단과 흔들리는 전조 조정 (AD316)

 

여러 군소 군웅들이 곳곳에 할거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가장 강력한 세력은 유총의 전조와  석륵, 그리고 대나라 탁발의로가 마치 삼국처럼 북중국을 나누어 가지고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지리멸렬하게 쪼개지고 찢어진 서진세력은 오직 장안지역만 지키고 있을 뿐이었으니 유총도 크게 할 일 없었다. 오직 여색과 술에만 빠져 정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정권을 실제로 장악한 세력들은 왕침과 선회와 같은 환관세력들이었다. 이들이 황제의 신임을 얻어 정치의 영역으로까지 영향력을 넓힌 것은 중궁의 여인들을 공급하는 일에서 황제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기도 했고 또 본인들의 정치적인 수완과 학식이 어느 정도 받쳐줬기 때문일 것이었다. 유총 황제는 술독에 빠져서 3-4일 술이 안 깬 적이 여러 번 있었고 어떤 때에는 근 100여일 깨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모든 국정은 아들 상국 유찬에게 맡겼고 모든 인사와 국가형벌 문제는 왕침이 전단했다. 환관 왕침은 자기 마음대로 상벌을 내렸고 그런 권세에 아부하는 간신배들은 왕침 주변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런 왕침에게 뇌물과 아첨으로 다가간 세력이 근준과 곽의였다. 왕침을 포함한 주변 세력들의 가장 민감한 문제는 차기권력, 즉 황태제 유예의 집권이다. 유예가 집권하면 반드시 자신들이 권력을 잃게 될 것이므로 이들을 숙청하는 것이 왕침 무리들의 최우선 과제였다.

 

평소에 유예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곽의와 근준이 왕침에게 다가간 것도 사실은 그 점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왕침 등의 무리는 차기 황제계승 1순위인 황태제 유예의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황제의 아들 상국 유찬을 움직였다. 태제 유예를 사전에 제거해야만 하는 긴박한 이유를 이렇게 유찬에게 말했다.      

 

“ 지금 태제 유예와 동생 대장군 유기가 난을 모의 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주상은 물러나고 황태제 자리는 유기가 꿰찰 것입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거짓말 같으시면 유돈이나 왕피에게 물어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유찬은 감짝 놀랐다. 그리고 유돈과 왕피에게 확인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곽의와 근준은 급히 유돈과 왕피에게로 달려가서 이렇게 물었다.

 

“ 혹시 태제 유예와 상국 유찬이 

  서로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소?” 

 

그건 곽의와 근준이 지어낸 말이기 때문에 유돈과 왕피가 그런 소리를 들었을 리가 없었다. 들은 적이 없다고 하자 곽의가 이렇게 거짓으로 탄식했다.

 

“ 이제 우린 전 가족이 죽은 일만 남았구나.” 

 

왕피와 유돈이 달려들어 살아날 길이 없겠냐고 물었다. 곽의가 태연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 조금 있으면 상국이 보낸 사람이 달려 올 거요.

  태제 유예의 반란정보에 대해 물으면 들은 적이 있다고 대답하시오.

  왜 즉각 보고하지 않았냐고 물으면  

  ‘말했는데도 믿지 않으시면 우리는 온 가족이 

  무고참소죄로 몰살당할 것이 두려웠습니다.‘라고 대답하시오“

 

과연 유찬은 사람을 보내 유예의 반란정보에 관해 물었고 유돈과 왕피는 지시한 대로 대답했다. 유찬은 그들의 말을 믿었다. 유찬은 거병을 결정했다. 근준에게 전략을 물었다. 근준이 이렇게 말했다.

 

“ 일단 상국이시니까 동궁(태제 유예의 거처)의 출입을 느슨하게 하여 

  빈객의 왕래를 크게 터놓으십시오.

  그 다음에 빈객과 태제의 토론기회를 넓힌 다음에

  태제의 죄상을 표문으로 올리시고

  간사하고 얄팍한 빈객을 골라 고문과 유혹으로 회유하면

   옥사가 완벽하게 갖추어 집니다.

   황제께서도 믿지 않을 수가 없으실 겁니다.“  

  

무서운 함정이었다. 상국 유찬은 동궁 거처의 경비병을 모두 철수시켜버렸다. 그리고 예상한대로 빈객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유예를 궁지에 몰 계획이 착착 진행되었다.

 

다음해(AD317년 4월) 상국 유찬은 왕평을 태제 유예 거소에 보내 이렇게 말했다.

 

“ 지금 조서를 내려 받았는데

  장차 수도에 변란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서둘러 군사들에게 갑옷을 입히시고  

  비상사태를 선포하셔야 하겠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유예는 서둘러 동궁의 군사들에게 충갑을 입히도록 지시했다. 왕평이 돌아와 상국 유찬에게 유예군사의 갑옷무장 사실을 보고하자 유찬은 바로 사람을 보내 근준과 왕침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왕침은 곧바로 황제에게 올라가 유예가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고 무고했다. 유총이 믿으려하지 않자 왕침이 말했다.

 

“ 저희들은 그 정보를 오래전부터 듣고 보고를 올렸사오나 

  황상께서 믿지를 않으셨던 것입니다.“

 

유총은 즉시 군사를 보내 유예의 거처를 포위했다. 유찬은 근준과 왕침에게 저족과 강족 추장 10여명을 붙잡아 높은 나무에 매달고 달군 쇠붙이로 눈을 지지는 고문을 가하면서 거짓자백을 강요했다. 결국 추장들이 유예와 반란을 일으키로 모의했다고 거짓 증언을 뱉었다. 유예는 폐위시켜 북부왕으로 강등한 뒤 얼마 있어 유찬이 근준을 보내 죽였고 모든 동궁관속과 그 가족은 흙으로 묻어 버렸다. 유예가 죽은 줄 까맣게 몰랐던 유총은 정신이 수려하고 깨끗하며 도량이 넓고 어진 유일한 동생 유예가 죽은 것을 오래 안타까워했다. 상국 유찬은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다.(AD317년)

   

    

<20> 충신들의 죽음

 

황제는 술과 여자에게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모든 권력은 환관 왕침 일당에게 휘둘리는 것을 전조 조정의 충신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었다. 소부 진휴와 좌위장군 복숭은 청렴하고 곧아서 왕침과 마주쳐도 인사도 하지 않았으니 좋아할 리가 없었다. 시중 복간이 진휴와 복숭을 훈계하듯 말했다.

 

“ 왕침 일당들이 천지를 바꿀 만하기는 하지만 

  경들 생각에 똑똑하고 황제와 친하기로는 

  후한시대 두무와 진번과 비교해서 어떻다 하겠소? “

 

후한 환제 때(재위 AD146-AD168) 두무와 진번은 모두 현명하고 똑똑했는데 바른 말 하다가 환관에게 밉보여 죽었던 사람이다. 시중 복간이 은근히 진휴와 복숭에게 나서서 대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진휴와 복숭이 대답했다.

 

“ 우리 나이가 벌써 오십을 넘었소.

  직위도 높을 만큼 높은 자리에 있소.

  빠진 것이 있다면 단 한 번 올바르게 죽는 일이오.

  충성스럽고 의롭게 죽는 것은 선비의 의무이거늘

  어떻게 적당히 눈감고 머리를 숙여 저놈들을 섬기라는 말이오.

  가시오 복공.

  다시는 그런 말을 우리에게 하지 마시오.“

 

얼마 뒤 왕침의 무고참소에 의해 황제 유총은 진휴, 복숭, 기무달, 공사욱, 왕염, 주해 등 왕침과 사이가 나쁜 7명의 관료들의 목을 자르라는 명령을 내렸다.(AD316년2월) 시중 복간이 황제에게 울면서 말렸다.

 

“ 폐하께서는 지금 중국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계시면서(통일대업을 이루지 못했다는 뜻)

  똑똑하고 올바른 사람을 찾으셔야 할 텐데

  오히려 올바르고 곧은 충신 일곱 명의 목을 자르시니

  이것은 거꾸로 가시는 것입니다.

  설혹 진휴 등이 죄를 지었다고 해도

  폐하께서는 먼저 유사를 보내시어 철저히 조사를 시키신 다음에

  판단을 하셔도 늦지 않을 텐데     

  이렇게 서두르시면 어떻게 천하가 폐하의 판단이 옳은 줄 알겠습니까.

  아직 조서가 제 수중에 있으니

  깊이 성찰하시고 옳은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머리를 바닥에 대고 조아리는 바람에 복간의 이마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황제 곁에 있던 왕침이 소리쳤다.

 

“ 시중 왕침은 황명을 거역하려는 것입니까?”

 

복간은 즉시 파면되어 서인으로 강등됐다. 태재 하간왕 유이, 대장군 발해왕 유부, 어사대부 진원달, 금가광록대부 왕연 네 사람이 궁궐에 나와 표문을 올리며 간하였다.

 

“ 간악한 환관 왕침이 조서를 고쳐

  해와 달을 가리고 속이며 무고하여

  안으로 폐하에게 아첨하고 밖으로는 상국(유찬)에게 아부하여

  권세의 무거움이 황제에 버금가는 정도일 뿐 아니라

   곳곳에 하수인들을 심어놓아 그 해독이 전국에 퍼졌습니다.

   진휴 등이 충신이고 오로지 나라만을 위하는 것을 왕침 일당들이 모르지 않으나 

   결국 왕침 무리들의 죄악이 드러날까 두려워 

   모함하고 참소하여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상세하게 조사하시지도 않고 충신에게 극형을 내리시니

   하늘과 땅이 노할까 두려우며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고 아프게 하는 결정입니다.

   지금 서진도 살아남아 있고

   파,촉 땅도 복속하지 않고 있으며 

   석륵은 옛 조나라와 위나라 지역에서,

   조억은 옛 제나라 땅에서 웅거하며 스스로 왕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태로운 형국에 나라 안에서 왕침과 같은 사악한 무리들이

   무함을 죽이고 편작을 살육하니

   신 등은 고맹(膏盲,난치병)의 질병을 얻을까 두렵습니다.

   서둘러 왕침 일당을 제거하시고 나라를 바로 세우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황제 유총은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 여러 아이들이 진원달에게 넘어가서 바보가 됐구만.” 

 

유총은 황족 대신들이 보낸 충간의 편지를 왕침에게 보여 주었다. 왕침이 놀라며 머리를 조아리고 울면서 말했다.

 

“ 황상께서 소인들을 지나치도록 사랑하시고 알아주셔서

  그저 황궁 청소나 허드렛일 정도라도 황송스런 마음으로 할 뿐이었는데

  왕공과 조정 신료들이 저희를 원수처럼 질시하시고

  자비로운 폐하를 깊이 한스럽게 여기시니

  원하옵기는 저희들을 끓는 솥에 넣어 삶으셔서

  조정을 화목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유총이 왕침을 위로하며 말했다.

 

“ 이런 미친 말들은 항상 있는 법이니라.

  경이 미안하게 생각할 것이 전혀 없소.“ 

 

유총은 아들 상국 유찬에게 왕침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유찬은 왕침을 충신이며 총명하고 올바른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유총은 자신의 판단이 그르지 않음에 흐뭇해하며 왕침의 훈봉을 올려 후작으로 책봉했다. 태재 유이가 왕침의 후작 책봉의 부당함을 상소로 올리자 유총은 화를 내면서 만인들이 보는 앞에서 상소문을 찢어 보였다. 태재 유이는 다음 달 3월에 화병으로 앓다가 죽었다. 유이가 죽자 진원달이 이렇게 통곡했다.

 

“ 시경에 사람다운 사람의 말이 사라지면 나라는 곧 망한다.(人之云亡 邦國殄悴)고 했는데

  이제 내가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어찌 아무 말도 못하며 억지로 살아가겠는가?“

 

진원달은 자살을 선택하였다.

   

 

<21> 유요의 서진 멸망(AD316)

 

AD316년 서진의 국토는 장안 중심지역으로 쪼그라 들어있었다. 그 북쪽 경계가 북지(지금의 섬서성 동천시 요주구) 였는데 전조의 대사마 유요가 북지를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했다.서진 조정에서는 대도독 국윤과 3만 군사를 보내 북지를 구원하도록 했다. 유요는 첩자를 국윤에게 몰래 침투시켜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이미 북지는 함락되었습니다.

 가 보셔야 가시기도 전에 유요의 대군에게 패퇴할 것입니다.“

 

국윤과 그의 군사는 싸워보기도 전에 사기를 잃고 말았다. 비록 국윤이 후한 대우와 높은 관작으로 서진 영역의 태수와 지방 군사지도자를 회유했지만 그럴수록 그들은 교만하고 방자하게 굴 뿐 민심과는 동떨어진 행동으로 민심을 잃게 만들었다. 장안지역(이를 관중지역이라고 부름)의 군사사기가 떨어지자 국윤은 조정에 추가적인 지원을 요청했지만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초숭은 국윤을 질시하여 더 곤궁한 상태로 빠진 다음에 지원군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는 사이에 유요의 군대는 재빨리 남하하여 위수 이북의 모든 성을 함락시키고 드디어 위수까지 내려왔다. 위수는 장안 바로 북쪽을 흐르는 강이다. 유요는 서진의 장수 노충, 양위, 보양을 사로잡았다. 건위장군 노충은 똑똑하고 용기가 뛰어나다는 소문이 있어서 산 채로 잡아오라고 명을 내렸던 사람이다. 유요가 노충에게 말했다.

 

“ 내가 그대를 얻었으니 

  이제 천하를 평정한다는 말을 할 것도 없겠소.“

 

노충이 진지하게 말했다.

 

“ 내 자신은 서진의 장수입니다.  

  나라가 패망해 가는데 감히 살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공께서 제게 은덕을 베풀어 주실 수 있다면

  빨리 죽음으로써 나라와 선조에게 은혜를 갚도록 해 주십시오.“

 

유요는 크게 감명을 받고 자신의 보검을 내려 스스로 선택하도록 해 주었다. 포로로 잡힌 산기상시 양위의 처 신(辛)씨는 미모가 매우 뛰어났다. 유요가 신씨를 불러 처로 삼으려 하자 신씨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첩의 지아비는 이미 죽었습니다.

  의로 보아서 혼자 살수는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 여자가 두 지아비를 섬긴다면 

  밝으신 공께서 어찌 그런 여자를 곁에 두실 수 있겠습니까?“

        

유요는 신씨의 말을 고상히 여겨 조용히 자결하도록 허락했다. 유요는 장안을 포위하고 압박하였다.(AD316년 8월) 안팎으로 단절된 장안 성안에서 국윤과 삭침이 필사적으로 방어하였다. 식량이 모자라 서로 사람을 잡아먹어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고 쌀 한말은 금2냥으로 값이 올랐다. 석 달을 버티어 11월이 되었다. 서진 황제 사마업이 국윤에게 말했다.

 

“ 지금 어려움이 저러니

  수치를 무릅쓰고 나가 항복하여

  병사들과 백성의 목숨을 살려야겠소.“   

 

울면서 사마요가 탄식했다.

 

“내 일을 저렇게 그르친 것은 국윤과 삭침 두 사람이다.”

 

사마업은 시중 종창에게 항복하는 편지를 써서 유요에게 보냈다. 삭침은 중도에서 종창편지를 가로채고 대신 자신의 아들을 유요에게 보내 말하도록 했다.

 

“ 지금 성 안에는 일 년치 양식이 있소.

  만약 삭침에게 의동삼사 및 만호군공이라는 직책을 주신다면

  바로 항복하겠습니다.“

 

유요가 삭침 아들의 목을 베고 말했다.

 

“ 군대는 의(義)를 가지고 말해야 한다.

  본인이 군사를 거느린 지 15년이 되었지만

  아직 속이는 계책으로 다른 사람을 이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반드시 적을 궁색한 지경까지 몰고 가 최후의 형세가 되게 한 뒤 함락시킬 것이다.  

  천하의 죄악이란 삭침이 하는 짓과 같이 속이는 것이다. 

  사자의 말대로 식량이 버틸 수 있다면 끝까지 버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천명을 받으면 될 것이다.“

 

서진 시중 종창이 유요의 진영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인 11월 10일이었다. 다음 날 황제 사마업은 입에 구슬을 물고(전통적인 항복의식) 양이 끄는 수레를 타고 어깨의 반을 맨살로 드러낸 뒤 장안 동문을 나와 항복했다. 여러 서진 신료들은  자살을 택했다. 유요는 수레를 불에 태우고 구슬을 받으며 (항복을 받아들인다는 의식) 종창에게 사마업을 모시고 궁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틀 뒤 유요는 사마업과 모든 서진 신료들을 자신의 군영으로 불러들인 뒤(13일) 모두 수도 평양으로 압송하였다.(17일) 이로써 AD265년 사마염에 의해 세워진 서진은 정확히 51년 만인 AD316년 11월 손자 사마업에 와서 전조의 유요에게 멸망당했다. 유총은 압송된 사마업에게 광록대부 및 회안후라는 작위를 수여했지만 2년 뒤 유찬의 권고에 의해 유총은 사마업을 죽였다. 죽을 당시 그의 나이 18살이었다. 역사에서는 그를 서진의 마지막 황제 민(愍)제라고 부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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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7년06월08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17년06월08일 17시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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