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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본 대립과 화해의 역사_ 다시 찾아온 “한반도의 봄”, 과연 어떻게 꽃피울 수 있을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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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5월12일 18시30분
  • 최종수정 2018년05월12일 18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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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지난 달 27일, 남과 북의 정상들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두 손을 꼭 잡은 모습은 가히 세계 역사상 길이 남을 인상 깊은 장면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만큼 ‘비운의 땅’ 한반도에 살며 통한과 설움이 뼈에 서린 백성들의 가슴 속에는 벅찬 환희와 열광이 용솟음쳤을 것이다. 글로벌 사회의 모든 세계인들도 이 감동적인 장면에 한편 동정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안도하는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날에 한껏 희망에 부풀었던 상상과 기대는 다시 엄연한 현실로 되돌아왔음을 실감한다. 두 정상들의 감동적인 만남 이후에 진행되고 있는 나라 안팎의 상황들은 마치 한편의 스릴 영화를 보는 듯, 긴장과 초조를 이어가고 있다. 사실 조금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마주했던 그 꿈 같은 정경 앞에는 아직 여러 갈래의 수 많은 역경과 관문들이 가로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어찌 보면 우리의 ‘대역자(代役者)’ 같기도 한 미국이 북한과 담판을 벌이는 힘든 광경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한 걸음 한 걸음 넘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의 급류 속에서 자신들의 이해 관계가 걸린 한 축을 놓지 않으려는 중국도, 러시아도 그렇고, 이 참에 끼어들어 자신들의 숙원을 풀어보려는 일본을 포함한 모든 주변국들이 자기네 이해득실을 염두에 두고 치열한 줄다리기를 벌일 것은 정해진 이치다. 여기에 우리 입장에서도 그 간 글로벌 사회에서 구축해 온 위상만큼이나 복잡한 다면적인 관계가 얽혀 있어, 정교하게 풀어가야 할 과제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사정이 이렇게 복잡 다단하다 보니, 모든 주변 관계국들이 우리가 마음 속에 품고있는 바를 전적으로 대변해 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만큼 핵 · 미사일을 포함한 북한 문제는, 우리 문제라고 해서 우리 손으로 간단히 풀어갈 여지가 지극히 협소하고, 이런 상황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이러한 저간의 뒤얽힌 사정들을 면밀하게 살피며, 차분하게 남북의 평화 공존과 공동 번영을 위해 걸어 온 지난 날의 궤적을 냉철하게 반추해야 할 시점이다. 

 

일단, 지금은 과거에 가졌던 어떤 기회보다도 실현성이 높아 보이는, 그야말로 천재일우로 얻은 이번 남북 간 화해와 협력의 기회를 소중하게 살려가야 할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번에 만들어 낸 “판문점 선언”을 가장 실효성 있게 이행해 나아가 ‘한반도의 꿈’을 함께 구현하는 알찬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남과 북이 걸어가야 할 실천적 도정(道程)을 보다 현실에 맞게 그려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지난 날 남북 정상들이 이루어 냈던 합의 사례에서 필요하고 유익한 교훈을 얻기 위해 몇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의 궤적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 1972년 『7 · 4 남북공동성명』; “남북 최초의 『화해와 협력』 합의”

 

<배경과 의의> 

1945년 일본의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뒤, 승전국 미국이 주도한 전환기적 과도 기간을 거친 끝에 한반도의 남과 북은 각기 다른 정치적 이념과 사상으로 갈라져서   두 개의 나라로 성립됐다. 이후, 1950년에 발발한 한국 전쟁에서는 서로 파멸적인 군사적 충돌을 겪었고, 휴전과 동시에 본격적인 교전 상황은 겨우 멈추게 됐다.

 

이후, 남과 북은 국부적인 몇 차례의 무력 충돌을 제외하면 대체로 글로벌 조류를 타고 형성된 냉전(冷戰) 시대를 이어왔다. 그러나, 1960년대 美 · 中 간의 화친 및 수교 등으로 상징되는 데탕트 시대로 전환된 국제 질서, 남과 북의 내부 사정의 미묘한 변화 등을 배경으로, 1972년 당시 박정희 정권과 김일성 정권 간에 여러 차례의 사전 비밀 접촉 끝에 발표된 것이 소위 『7 · 4 남북공동성명』 이다. 

 

당시, 국제 환경은 脫냉전(冷戰) 데탕트 시대가 시작된 시기로,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 발표 등으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이 급전(急轉)하던 때였다. 미국의 전략은 중국과 손을 잡고 소련을 견제한다는 소위 ‘以夷制夷’ 전략으로, 베트남 전쟁의 패색이 짙어 가던 무렵에 명예로운 철수를 도모하는 전략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주한 미군 감축도 거론되는 등, 남북이 나름대로 긴장 완화를 위한 『7 · 4 남북공동성명』 합의에 나서게 되는 중요한 동기를 맞게 됐었다. 

 

전후 사정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7 · 4 남북공동성명』 이 갖는 몇 가지 함의는 그 후 우리 역사에 소중한 모멘텀을 만들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대체로, ① 남북 양측이 모두 종전의 대결 자세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에 의한’ 합의였다는 특색이 있다. 그리고, ② 남북이 공감한 자주적 통일 정책의 효시라는 점이다. 아울러, ③ 북한이 주한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④ 통일 논의가 본격적으로 점화되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점이다. 

 

<주요 합의 내용> 

1972년 7월 4일 발효하는 것으로 발표된 『7 · 4 남북공동성명』 은 총 7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게 나누어 3 개의 주제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성명은 서두에서 이 『7 · 4 남북공동성명』 의 배경과 목적을 “. . .남과 북이 오랜 동안 만나지 못해서 생긴 오해와 불신과 긴장을 해소하고, 양측의 공통된 염원인 평화적 통일을 조기에 달성하기 위한 합의. . .” 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구체적인 합의 내용은 첫째; 조국 통일에 관한 원칙을 정한 것으로, 통일은 ①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② 사상,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③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3 가지 원칙에 합의한 것이다. 둘째; 남북 간의 긴장과 대치 상태를 완화하기 위해 ④ 상호 비방과 중상을 하지 않고, ⑤ 무장 도발을 하지 않을 것에 합의한 것이다. 셋째; 민족적 연계를 회복하고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⑥ 다방면의 교류를 확대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합의 사항을 실천하기 위한 실무기구로 ⑦ ‘남북조절위원회’를 설치할 것과 사상 처음으로 서울과 평양 간 직통전화를 개설하는 데도 합의했다. 그리고, 이 성명은, 특이하게, 선언문 말미에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실행하는 것이라는 문구를 명기하고 있다. 즉, 합의의 주체가 양국 정상이라는 점을, 합의 행위의 당사자로 명기하지 않고, 단지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데 그친다는 점이다.  

 

<평가와 과제>

이렇게, 남북 분단 역사 상 처음으로 이루어 낸 민족의 화해와 협력 합의라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7 · 4 남북공동성명』 은 당시의 국제적 환경의 가변성 및 남북 양 측의 내부 정치적 상황이 지극히 유동적이었다는 점에서 일정한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태어났던 것이 우선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우선, 한국 측 사정은, 당시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으로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이었고, 게다가 1969년 무렵 3선 개헌을 통한 소위 ‘維新 체제’ 구축을 기도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에 항거하는 국민적 저항이 확산 일로 였고, 정치적으로도 지극히 나약한 국면에 처해, 북한과의 유화(宥和) 정책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북한 측 입장에서도, 공교롭게 국제 조류가 데탕트 분위기로 흘러가는 것을 배경으로, 중국 및 구 소련 등 공산권 종주국들이 당시에는 적국이던 미국과 화해하는 상황을 맞아 엄청난 안보 위기를 의식하게 되었다. 아울러, 당시 김일성은 ‘닉슨 독트린’을 빌미로 주한 미군의 철수를 주장할 수도 있어, 전략상으로도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전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진 셈이기도 했다.

 

이렇게, ‘외생적’ 국제 환경 변화가 중요한 배경을 이루었다는 것은 ‘자주적’ 통일 원칙을 전면에 내세운 이 공동성명의 근본적인 한계가 되기도 한다. 이와 아울러, 양 측 내부 사정이, 민족 통일을 염원하는 순수한 열정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동기가 숨어 있었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아쉽게도, 동 선언 직후 남과 북의 내부 상황이 돌변하여 단명에 그치고 말았고, 그 의미도 상당히 퇴색되고 말았다. 그러나, 남북 분단 역사 상 처음으로 만들어냈던 『7 · 4 남북공동성명』 의 상징적 의미는 그 후 추진된 3 차례 남북정상회담을 포함하여 단속적으로 이어져 온 모든 남북 대화 노력의 밑바닥에 면면히 살아 있고, 밑바탕에서 끊임없이 충실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 2000년 정상회담 『6 · 15 공동선언』; “최초의 통일 정상회담”

 

<배경과 의의> 

한반도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이 합의한 평화 선언이었던 『7 · 4 남북공동성명』 이후 20년이 흐른 뒤, 1992년 2월에 당시 노태우 정권과 북한 김일성 정권 간에 남북 화해, 상호 불가침, 교류 협력 등 3개 항에 걸친 ‘남북기본합의서’ 가 체결되었으나, 동 합의서 체결 이후 더 이상 본격적인 진전은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 2000년에 당시 김대중 정권은 역사상 처음으로 평양에서 남북 정상들이 상봉하는 역사적인 회담을 열었고 여기서 나온 산물이 『6.15 남북공동선언』 이다. 당시 국제 사회는 남북 정상들의 첫 만남에 대대적인 관심을 보였고, 국내에서도 남북 화해에 대한 높은 기대와 평화 무드가 최고조에 달하기도 했다.

 

이 회담에서 북한은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파격적이라고 할 만큼 ‘국가 원수’로 예우함으로써, 종전에 양국이 “통일을 이루기까지 잠정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반국가’ 집단으로 인정해 오던 대결 자세를 벗어나서 서로 암묵적으로 하나의 국가로써 인정하며 화해 · 협력할 수 있는 실질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주요 합의 내용> 

이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에서 남과 북의 정상들은 2박 3일 간 진행한 회담의 결과물로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6.15 남북공동선언』 은 크게 나누어 6개 항목에 걸쳐 합의한 것이다.

 

① 통일 문제의 자주적 추진, 

② 남과 북의 통일 방식에 있어서 공통성을 인정하고, 

③ 이산 가족 상봉 등 인도적 교류 확대, 

④ 경제,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 분야에서의 교류 확대, 

⑤ 합의 사항 이행을 위한 당국 간 회담의 개최, 

⑥ 김정일 위원장의 조속한 답방, 등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첫 정상회담의 성사 및 『6.15 남북공동선언』 합의의 배경은 김대중 대통령의 적극적인 북한 포용 정책인 ‘햇볕 정책’ 노선이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통일 문제를 포함한 현안 문제들을, 국제적 지지를 바탕으로,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아간다는 정신이 작용한 결과이다.

 

이에 더해, 남과 북이 공생 번영한다는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상호 체제를 인정하고 경제, 문화 및 인적 교류 확대를 통해 상호 이익을 증진하고 통일 기반을 조성한다는 데에 인식을 같이 한 것에 큰 의의가 있다. 실제로,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이어진 실무 분야의 협의를 거쳐서 ① 이산가족 상봉 행사, ② 금강산 관광, ③ 북한의 남측 스포츠 행사 참가 등 민간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평가와 과제>

남과 북은 정상 간 첫 회동을 계기로, 외면적으로는 긴장 완화와 화평 분위기 조성에 합의했다. 그러함에도, 실제로는 양측이 이에 상응하는 실질적인 조치들을 취하지 못한 것은 근본적으로 현실과 정합(整合)하지 못하는 요인을 잠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후 벌어진 내부적인 상황 변화로 인해 역사적인 합의 사항들은 대부분 진척을 보지 못하거나 성사되어도 단지 일회성에 그치고 말았다. 

 

이와 아울러, 남측의 실제적인 사정으로, 이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기에 앞서 한국 정부가 북한에 지원했던, 알려지기로는 약 5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 지급 문제는 다음 정권에서 특별검사가 지명되어 사법 처리로 이어지는 “불우한” 사건으로 확대되었고, 결국, 이에 관여한 일부 인사들은 형사 책임을 추궁 당하기까지 했다. 이 점이 동 정상회담 추진의 순수성을 의심받는 큰 오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합의 사항 불성실 이행의 근본 원인은 당초 양측이 서로 다른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회담에 임했던 것이라는 추론을 낳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남북 문제 논의에서 정치적 동기에 기인한 타협이나 일방적 양보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사정이며, 남북 관계의 제도화가 시급하다는 교훈을 낳고 있다.

 

 

■ 2007년 정상회담 『10 · 4 공동선언』; “6. 15 선언의 계승 · 발전”  

 

<배경과 의의> 

2007년에 이루어졌던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의 회동은 남과 북의 정상들이 사상 두 번째로 마주 앉은 정상회담 기회였다. 그리고, 이 회담에서 발표된 공동성명이 『10. 4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 (“2007 남북정상선언”)』 이다. 이 때, 노무현 대통령이 방북하면서 한국의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육로를 통해 방북했고, 군사분계선(MDL)을 도보로 넘은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당시 상황은, 북한의 핵 개발 수준이 이미 실질적인 위협 차원으로 진전되어 있었고, 관계국 대표들의 회담인 6자 회담의 場에서 어렵사리 포괄적 합의를 도출해 낸 상황이었다 (“2. 13 합의”). 이 합의는 한반도 비핵화, 美 · 北 관계 정상화, 경제 및 에너지 협력, 한반의 평화 및 안보 체제 구축 등과 관련한 실행 계획들을 포괄하는 것이었고, 동 합의의 충실한 이행은 무엇보다 긴요한 상황이었다.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의 사상 첫 정상회담은 한반도 분단 역사 상 처음으로 이루어졌다는 ‘회동’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는 일종의 정치적 사변이었다. 그러나, 2차 남북정상회담은 이에 비해 북 핵 문제가 더욱 실질적인 위협으로 대두된 상황에서 당면한 북 핵 위협 해소 및 더욱 진전된 남북 관계 개선을 추구해야 하는 실질적 과제도 부담한 것이었다. 따라서, 훨씬 차원 높은 해법을 찾아야 하는 정상회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주요 합의 내용> 

이 『2007 남북정상선언』 은 8개 합의 사항을 담은 것으로, 첫 번째 항에서 동 선언은 “6. 15 남북공동선언”을 고수하며 적극 구현해 나아간다고 천명하고 있어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분단 사상 처음으로 남북 정상 간에 합의를 이룬 공동 선언의 정신을 이어갈 것을 확인하고 있다. 구체적 내용은, 

 

① 6. 15 공동 선언의 계승 및 적극 구현, 

② 상호 존중 및 신뢰 구축 방향으로 전환, 

③ 군사적 적대 관계 종식 및 평화 보장, 

④ 항구적인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한 종전 선언 추진, 

⑤ 민족 경제의 균형적 발전 및 공동 번영을 추구, 

⑥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빛내기 위한 교류 확대, 

⑦ 인도주의 협력 사업의 적극 추진, 

⑧ 해외 동포들의 이익을 위한 협력 강화, 등이다. 

 

<평가와 과제>

이 『10. 4 남북정상선언』 은 실질적인 북 핵 위협의 대두를 염두에 두고, 그 간에 진행된 6개국 협의의 산물인 “2. 13 합의” 의 충실한 이행을 담보하는 방도를 마련해야 하는 기회였다. 이를 위해, 남북은 ‘북한 비핵화’ → ‘상호 존중 및 신뢰 확립’ → ‘군사적 긴장 완화’ → ‘종전 선언 및 항구적 평화 체제 구축’ → ‘경제 협력 확대 발전’ 등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가야 할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불과 몇 달을 남겨둔 시점에서, 두 정상 간의 합의가 과연 충실하게 이행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회의(懷疑)적인 시각도 사실상 존재했던 것이고, 실질적인 추동력을 유지하기도 대단히 어려웠던 점도 있었다. 

 

따라서, 10. 4 선언의 이행을 위해 총리 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고, 정상들도 수시로 만나 협의하기로 합의했으나, 한국의 정권 교체 이후 대부분의 합의 사항들은 계승되지 않았다. 그 뒤, 남북 정상들은 지난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회동하기 전까지 11년 동안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북한 핵 및 미사일 개발은 급격히 진전되어 이제는 미국을 포함하는 주변국들이 실질적인 위협을 느끼고 이에 대처해야 하는 엄중한 긴장 상황에 놓여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물론이고, 주변 당사국들은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도 없고, 미루어 지지도 않는 절박한 현실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 2018년 정상회담 『4 · 27 판문점 선언』; “정교한 포괄적 합의”

 

<배경과 의미>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한반도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다시 만난 것은 지난 2007년에 두 번째 정상회담이 있은 뒤 11년 만의 회동이고, 분단 역사 상 세 번째로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이 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작년 대통령 선거 기간 중에,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구상이 필요하다” 는 대북 정책에 관한 의욕적인 견해를 누누이 밝혀 왔다. 

 

또한,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독일을 방문하던 중, 독일 통일의 역사적 현장인 수도 베를린(Berlin)에서 행한 연설에서도 남북 간의 냉전 시대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 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과 장소와 시기에 구애 받지 않고 만나서 담판하자는 방침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북한은 추가 핵 실험 및 미사일 실험을 끊임없이 단행했고, 한반도 위기가 최고 수위에 달하는 동안, 이제는 실질적 위협을 느끼게 된 미국도 가세하여 극단적인 공방과 위협을 주고 받았다. 이런 와중에서도, 이로 인해 형성된 긴장과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김정은 위원장은 새해 연설에서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긍정적인 결심을 밝혔고, 이어서 열린 평창 동계 올림픽을 계기로 상호 방문을 주고 받은 다음, 역사적 기념비를 세울 “4. 27 판문점 정상회담” 이 성사된 것이다. 

 

한편,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이 획기적 진전을 이루자, 위협의 범위는 전 글로벌 사회로 확산되었다. 급기야, 미국 본토까지 북한의 ICBM의 사정 거리 내에 들게 되었고, 이를 기폭제로 해서 북한과 미국은 서로 최고조로 위협하는 언사를 자행하는 등, 극한 대결 상황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드디어, UN을 위시한 국제 사회의 대북 제재와 압박은 최고 수준에 달하게 되었고, 북한은 미국과 벼랑 끝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당연히 글로벌 사회의 긴장은 더 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따라서, 긴박함을 더해 가는 현 국제 정세 하에서, 이제는 북한 문제는 남북 관계 차원을 넘어서 오히려 미국과의 대치 상황이 부각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담은 남북 정상들의 만남이라는 의미에 더해 美 · 北 정상회담의 중개자 역할이 더해지는 상황으로 발전되기에 이르렀다.  

 

<주요 합의 내용>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구체적인 실천 사항들을 직접 협의를 통해 합의하고, 합의 결과를 직접 육성으로 소신을 피력하면서 설명하는 형식을 갖췄다는 점에서 대단히 이례적이고, 깊은 신뢰감을 주는 회담이었다. 두 정상은 공동기자회견에서 총 3개 조 13개 항의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4. 27 판문점 선언”)』을 전세계에 천명했다. 

 

I. 남북 관계의 전면적이고 획기적인 발전 

① 민족의 운명을 자주적으로 해결을 지향, 기존의 합의들을 성실히 이행

② 고위급 회담을 조속히 개최, 합의 사항 실천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 수립 

③ 민간 교류 협력을 보장하기 위한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개성에 설치 

④ 민족적 화합과 단합을 고취하기 위해 각계 각층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 

⑤ 인도적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고, 8. 15 이산 가족 상봉 등을 협의 해결

⑥ 남북 경제 균형 발전을 위해 “10. 4 선언”의 철도 및 도로 연결 사업을 실천 

 

II. 군사적 긴장 완화와 전쟁 위험 해소를 위해 상호불가침 합의 

⑦ 지상, 해상, 공중에서 군사적 긴장 및 충돌을 방지, 적대 행위 전면 중단 

⑧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를 평화 수역으로 설정, 안전한 어로 활동을 보장 

⑨ 상호 협력과 교류, 왕래의 활성화에 따른 군사적 보장 대책 마련 

 

III.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 체제의 구축 

⑩ 어떤 형태의 무력도 사용하지 않으며, 불가침 합의를 재확인 

⑪ 상호 신뢰 구축과 긴장 해소에 맞추어 단계적인 군축을 실현

⑫ 정전 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 南 北 美 또는 南 北 美 中 회담 적극 추진 

⑬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할 것을 공동의 목표로 함

 

등, “한반도의 새로운 평화의 꿈”을 구현할 구체적 실천 과제들이 담겨 있다. 

 

이와 함께, 남북 정상들은 조속히 후속 고위급 회담을 열어 이번 합의 사항들이 실천에 옮겨지도록 노력할 것과, 남북 군사당국자 회담, 남북 적십자 회담 등을 개최할 것에도 합의했다. 아울러 연락 채널로 양측 인원이 상주하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도 개설하여, 단절되었던 민간 교류도 활발히 재개할 것에 합의했다. 

 

또한, 문 대통령의 대북 경제 협력의 근간인 “한반도 新경제 구상”에 맞춰, 인적 왕래의 기반이 될 철도, 도로 연결도 추진한다. 이 구상은 한반도를 지형에 따라 한반도 양쪽의 남북 및 동서로 연결하는 ‘동해圈’, ‘서해圈’ 및 ‘동서 DMZ’ 벨트 등, 3대 벨트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 번영의 경제 청사진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울러, ‘10. 4 공동선언’ 등 기존의 합의 사항들도 성실히 이행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남북 정상들은 이러한 합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민족 자주 원칙을 확고히 하고, 기존의 남북 간 선언 및 합의를 철저히 이행한다는 원칙도 천명했다. 

 

<『4. 27 판문점 선언』 에 대한 평가; 아직은 ‘유보적 성공’> 

이제 겨우 몇 주일이 지난 현 시점에서 『4. 27 판문점 선언』 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기술적으로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앞으로 가변적인 요인들이 산적해 있어 불확실성도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합의된 사항들에 대해 개별적인 지적이나 관련된 문제 요인들을 살펴보는 것은 필요할 지도 모른다. 

우선, 회담 진행의 형식 측면에서 상당히 균형 있고, 공식적인 절차를 잘 갖추고 있어서 “정상적인 정상회담” 이라고 평가할 만 하다. 내용 면에서도 구체적인 실천 사항들을 충실하게 열거하고 있어 상당히 정교한 측면도 있다. 특히, “비핵화” 표현을 선언문에 집어 넣은 것은 획기적인 것이고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당초, 한반도 위기 해소를 위한 가장 핵심적 사안인 “비핵화” 에 대한 정해진 일정이나 진행 절차, 실행 수단 등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은 균형을 잃었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이에 비해, 민족적 화해와 협력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상당히 구체적인 협력 사항들을 제시한 것은 협상 전략 상 “급부(給付) vs 반대 급부” 차원에서 보자면 상당한 불균형을 보이고 있다.

 

만일, 한반도 비핵화에 대해 앞으로 열릴 “美 · 北 정상회담” 에서 구체적, 확정적으로 합의할 것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이 점에 대해서 미국과 사전 공조 체제를 긴밀하고 확실하게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판문점 선언”은 아직은 확정적 판단을 남겨 둔 유보적 성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참조; 아산정책연구원)

 

<『4 · 27 판문점 선언』 이후의 상황 전망>

* “완전한 비핵화”의 실현; 이는 4. 27 정상회담의 가장 ‘핵심적’ 부분이며 “판문점 선언”을 일관하는 최상의 명제다. 그만큼 “한반도 비핵화” 혹은 “핵 없는 한반도” 라는 표현이 선언문에 명시된 것은 일단 획기적인 일로 평가받을 만 하다. 

 

북한에서는 여태까지 금기시 되어 왔던 “비핵화” 라는 단어가 정상들의 공동선언문에 명문화되고, 서로 논의되고, 국제 사회에 공개적으로 직접 천명한 것은 일단 북한의 의지를 담은 확실한 약속이라고 보기에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진행될 다국간 협의 과정을 통해서 미국, 한국, 북한 간에 원활한 조율을 해가면서 “비핵화” 에 대한 일치된 인식, 철저한 이행, 완벽한 검증 등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방식과 절차에 완벽한 합의를 보아야 할 것이다.

 

* 남북 관계의 제도화; 이번 『4. 27 판문점 선언』 은 가장 핵심적 내용인 한반도 비핵화를 중심으로 수 많은 후속 조치 및 협력 사업에 합의했다. 대부분의 합의 사항들은 상호 신뢰 구축과 협력 강화를 위한 약속들이다. 따라서, 양 측의 현실 사정에 적합한 절차와 합의를 획득하여 향후 기대되는 본격적인 사업들의 원만한 실행에 차질이 없도록 사전에 대비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할 것이다.

 

* 한반도 평화 체제의 정착; 이번 정상회담이 낳은 역사적 산물인 “4. 27 판문점 선언” 이 가지는 거대 담론적 의미는 동아시아 분쟁의 하나의 근원지였던 한반도에 ‘냉전 시대가 가고 새로운 평화 시대가 개막되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번 “판문점 선언” 에서는 상호 불가침, 상호 군축, 종전 선언 및 평화 협정 대체, 비핵화 실천, 등 항구적 평화 정착을 구현할 실질적 대결 해소 방안들에 합의했다. 향후, 모색해 가야할 길은, 남북 어느 누구도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다. 예상치 못한 숱한 돌발 변수와, 장애 요인들이 나타날 것이나, 양 측은 담대한 상상력을 발휘하며 굳은 의지를 가지고 일로 매진해야 할 것이다.

 

* “한반도 新경제” 를 향한 경제 협력; 이번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들이 합의한 사안들 중에는, 당초 예상과 달리, 대북 경제 지원 및 협력에 관련한 항목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이를 계기로 특히, 한국 측 기업 등 경제 주체들은 상당한 수준의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UN 안보리 등 국제 사회의 강력한 대북 제재가 엄존하는 현 상황에서는 아직 실행이 원활치 못할 만한 사안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국제 사회의 대북 제재가 완화 혹은 폐지되기 전에는 지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추진이 가능할 것이다. 상황 진전에 따라서는 UN 승인을 얻는 범위 내에서 국제 사회와 공조를 유지하며 추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당장은 주어진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 분야부터 출발하되, 절대 서둘러서 탈이 나게 할 게 아니라, 신중 모드로 진행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경제 협력 문제를 살펴보면서 한 마디 보태자면, 이번 회담 도중에 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건넸다는 USB 한 개가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혹자는 여기에 문 대통령의 대북 경제 협력 정책의 근간인 “新경제 구상” 이 담겨 있다고도 한다. 알려진 바로는 이 “新경제 구상”은 가히 한반도 경제 지도를 다시 그릴만큼 범위도 원대하고 규모도 방대한 내용이라고 한다. 이렇게 차원 높은 곳을 지향하는 장기적인 사업일수록 당초 작정한 본지를 흔들림없이 지켜가며, 차분한 자세로 꾸준하게 추진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Haste makes waste!” (참조; 통일연구원) 

 

■ 다시 찾아온 “한반도의 봄”을 맞아 보태는 한 마디

과거, 남북 간에 성사된 정상회담의 궤적을 잠깐 훑어보면서 느꼈던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한국의 역대 거의 모든 정권이, 정치적 성향이나 추구하는 사상과 이념 여하를 불문하고, 예외없이 남북 정상의 만남을 추진했다. 그러나, 유독 김대중, 노무현, 그리고 현 문재인 대통령 등, 이른바, 진보 성향의 정권에서만 남북정상회담이 실현됐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 하기도 하고 꽤 흥미로운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이제 70년이 넘어가고 있는 정말 오랜 세월을 두고 국토가 잘리고, 국체가 분리되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추구하는 두 개의 다른 나라로 갈라져 부질없는 이념 대결을 벌여온 탓인지도 모르나, 우리나라처럼 단순한 이념에 기댄 대중 선동이 통할 수 있는 환경을 가진 나라도 드물 것이다. 

 

이를 굳이 지적하는 이유는, 이런 독특한 사정 속에서, 북한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것은 소위 보수 성향 정권보다는, 오히려, 진보 성향 정권에 더욱 커다란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걸핏하면 좌경이니, 용공이니 하며 몰아치는 집단적 지탄을 면키 어려웠던 것이 바로 얼마 전까지 엄연했던 사실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것도 국가 최고 의사결정권자 입장에서, 북측과 만나 리스크가 높은 일종의 정치적 담판을 하겠다는 결단을 내리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정치적 운명을 걸지 않으면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이런 연유로, 지금 담당하고 있는 주체가 어느 정파, 어느 누가 됐던 간에, 도도하게 변전(變轉)하는 국제 조류에 기여 보비할 국가적 대사를 진행하고 있는 현 시점에, 아직도 이 사회에는 통합의 메시지보다는 맹목적 비방과 관습에 젖은 힐난을 일삼는 계층이 여전히 존재한다. 아무쪼록,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냉철한 합리성’을 되찾고 ‘건설적 비판’ 자세를 가질 것이 소망된다고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구태여 국외자로 남겠다는 굳은 용기를 가진 극소수의 사람들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더라도, 중차대한 과업을 수행해 가는 선한 위정자라면, 이에 필수적인 공고한 국민적 지지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심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영역에 있는 많은 구성원들에게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정성과 열정을 가지고 설득하고 포용하는 노력을 다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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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5월12일 18시30분
  • 최종수정 2018년05월13일 05시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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