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두의 1년 후

세종대왕의 창조농업, 농상의식지본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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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4년01월14일 21시33분
  • 최종수정 2014년01월14일 21시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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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신세돈 교수님으로부터 '세종대왕의 창조농업, 농상의식지본'에 대한 말씀을 들어봅니다. - 세종대왕의 국정 철학은 ‘민유방본’ 세종대왕의 국가경영의 철학은 민유방본(民維邦本)이었다. 즉,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철학이다. 이러한 ‘민유방본’의 철학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선포되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이 먹는 것을 하늘의 뜻으로 여긴다. (民維邦本 食爲民天, 세종실록 1년 2월 12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근본인 백성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다. (民維邦本 本固邦寧, 세종실록 5년 7월 3일)” - 당시 백성들의 경제상황은 매우 나빴음. 첫째로 가뭄과 태풍과 장마의 피해가 극심했음. 재해가 없는 해가 거의 없었고, 수많은 농민이 굶어 죽어 버려지거나 유랑민화 하였음. 둘째로 토지의 양극화(토지겸병)가 극심했음. 토호들이 막대한 토지를 보유하고 농민들을 착취했음. 이는 세종시대의 재벌문제라고 할 수 있었음. 그 핵심에 남징과 병작반수라는 악폐가 도사리고 있었음. 병작반수는 실질적인 땅의 소유주가 땅을 경작하게 하고 그 소출의 반을 가져가는 제도였고 남징(濫徵)은 세종판 일감몰아주기라고 할 수 있었음. 토지소유양극화(토지겸병)은 중농층을 붕괴시키고 유랑민을 대량 발생시켜 부역과 군역을 지울 수 있는 백성(지금의 중산층)이 줄어들게 됨에 따라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게 되는 문제와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문제를 낳았음. 이러한 당시의 문제점의 중심을 파악한 세종은 대대적인 새로운 농업정책, 즉 창조농업정책을 펼치기 시작함. 세종의 창조농업은 네 가지의 핵심적인 방향을 가지고 있었음. 1. 창조농업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핵심은 제도의 개혁. 당시에 13등급의 관료들의 과전지급의 등급을 4등급으로 단순화함. 특히, 국왕이 직접 과전의 개혁을 단행함 : 4등순급법(四等循給法, 세종13년) 당시 토지개혁에 대한 반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소통함. => “ 혹자의 말에 임금이 세세한 일을 직접 처리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는데 내가 여태 세세한 일을 청단하지 않은 것이 없거늘 유독 급전문제만 세세한 일이라 부당하다니 어떻게 된 것이냐. (세종실록 12년 9월 27일)” 2. 세종대왕의 창조농업의 두 번째 핵심은 새로운 경작지의 창출. 이는 오늘날의 새로운 산업의 일으키는 것과 유사함. 이러한 신 경작지의 확장은 세종의 ‘뉴프런티어 정신’이라고 불림. 그 핵심은 새로운 땅에 대한 관심이었고, 이에 따라 신지(New Land)에 대한 많은 탐험이 이루어짐. - “시끄럽게 떠든 지 오래되었으니 내 생각에 그 땅이 분명 있을 것이다. 마땅히 조관을 보내 두루 방문하여 찾아볼 것이고 기어코 찾고 나서야 그만둘 것이다.(세종실록 24년 2월 28일)“ - 포상계획- 신분의 상승이나 면포나 미곡 등의 물품에 의한 포상, 그리고 천민의 경우에는 양민화해주는 등 아주 뛰어난 포상계획을 수립함. 3. 창조농업의 세 번째 핵심은 정확한 영농정보의 수립과 공유. 이를 위해서 세종은 팔도지리지와 농사직설을 만들었음.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 세종 7년에 시작하여 7년 2개월의 시간을 들여서 세종 14년 1월 19일 <팔도지리지>가 완성됨. - 여기에는 각 도와 주군현의 연혁과 명산, 대천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토지, 가옥 수, 인구, 주요 성씨, 특수작물, 약용작물, 주요 공물, 군사기지, 도로 및 역 등의 정보가 생생하게 기록되어있다. [농사직설<農事直說>] - 농사는 지역과 토질과 곡식의 종류에 따라 경작하는 방법이 다름. 이런 영농방법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음. - 세종은 각 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농사의 경험을 상세히 청문하게 한 다음 정초와 변효문으로 하여금 이를 정리하여 <농사직설(農事直說)>이라는 책으로 만들게 함. 4. 창조농업의 네 번째 핵심은 새로운 농업기술의 개발과 적용 - 세종 11년 12월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박서생이 일본 수차가 논에 물을 대는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해보임. - 세종은 기발한 안이라 생각: “본국 백성들이 제방의 이익만 알고 수차의 이익은 몰라서 가뭄을 만나 농사를 실패하니 참으로 가련하다. 각 도 감사에게 명하여 수차를 놓을 수 있는 곳을 두루 살펴보아 이번 반포하는 수차설계에 따라 제작하여 설치하고 수시로 감독하게 하며 인사평가 때마다 근만과 함께 평가하여 출척(진퇴)에 증거로 삼도록 하라. (세종실록 12년 9월 27일)” - 박서생이 그려 보낸 모형에 따라 수차를 제작하여 실험. 시험결과가 매번 실패함. 그러나 세종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관리들을 독려하여 지속적으로 수차개발과 적용을 하도록 함. 일본과 중국에서는 잘 작동하는데 우리나라만 안 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지속적으로 밀어붙임. 박근혜정부의 창조경제 정책수립에 있어서 세종대왕의 이러한 창조적 농업정책의 네 가지 기본방향이 적용되어야 함. 즉, 제도의 개혁, 새로운 산업을 일구는 뉴프런티어정신, 시장과 기술에 대한 정보의 공유, 창의적 기술의 개발과 적용이라는 네 가지의 핵심원리가 중심이 되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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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4년01월14일 21시33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17시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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