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辛경제] 역대 한국경제 위기와 극복의 교훈<12>1992년 신도시 후유증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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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태우 정부는 1990년대 들어 불경기를 주택 200만호 건설이라는 건설경기로 풀려고 노력을 했다. 당시 계획한 200만호가 얼마나 큰 숫자인가. 당시 초기에 분당이 9만호였고, 일산이 7만호 단지였다. 둘을 합하면 16만호다. 그런데 당시 서울특별시 주택 수가 150만호 정도 였으니까 그 보다 훨씬 많은 주택을 짓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건설자재가 부족하고 값이 오르고, 건설노임이 급등했다. 그러니까 인플레가 일어나고 대한민국 경제가 뿌리 채 흔들려 2년도 안 돼 경제가 추락한 것이다.
- 그런데 1991년도 성장률이 10.8%였는데 다음해인 1992년에는 6.2%로 4.6%p나 추락했다. 그 내용을 보면 투자가 -7.3%p 떨어졌고, 소비가 -0.9%p 떨어졌다. 그러니까 내수에서 성장률이 –8.2%p나 떨어진 것이다. 반면에 수출은 거의 증가하질 않았고, 수입이 3.8% 줄었다. 수출이 줄면 국내성장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외수 쪽에서는 플러스의 기여를 한 것이다.
- 결국 92년도 위기는 투자부진이 주도적이었다. 즉 200만호 건설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된 것이 주요원인이다. 따라서 92년도의 위기는 우리가 이전에 경험했던 수출 부진하고는 거리가 먼 위기라고 볼 수 있다.
- 1년 뒤인 1993년에 경제성장률이 조금 회복을 한다. 1993년도 성장률은 92년도의 6.2%에 비해서 0.7%p 상승한 6.9%가 됐다. 1993년도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해로 소위 ‘신경제 100일 계’획, ‘신경제 5개년 계획’을 막 세운다고 하면서 무척 폼을 잡던 시절이었다.
- 어쨌거나 93년도, 94년도의 성장률이 회복되는 원인을 들여다봤더니 거의 투자였다. 1993년도만 놓고 보면 성장률이 0.7%p 높아졌는데 투자가 1.6%p 중가 했고, 소비는 0.2%p가 줄었다. 내수 쪽에서는 이렇게 +1.4%p였고, 수출이 –0.5%p, 그 다음에 수입이 +0.4%p해서, 결과적으로 외수 쪽은 –0.8%p의 성장률을 끌어내리는 결과를 보였다.
- 한 해 더 넓혀서 1994년도까지 놓고 보면 성장률이 4.1%p 올라간다. 그런데 그 중에서 투자가 5.2%p 올라갔으니까 결국은 93년도로 보나, 94년도까지 연장해서 보나 성장이 살아난 것은 투자가 주도한 것이다.
- 이 기간 동안에 정부와 민간으로 나눠서 보면 정부의 성장기여는 –0.2%p에 불과하고, 민간에서 0.9%p이니까 0.7%p성장의 주도는 민간에서 했고, 정부는 전혀 성장에 기여를 못했다.
한국은행의 본원통화 증가율이 9.6%p가 올라갔다. 어느 정도 경기를 살리는 쪽으로 기여를 했다고 우리가 평가할 수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봤을 때 93년도의 회복은 매우 미약했고, 주로 기저효과에 의한 것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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