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시리즈 NO.4- 논개의 남자. 최경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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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개
의로운 한국여성을 생각했다. 여러 여성인물 중 과거 진주성 방문에서 느꼈던 논개가 가장 강열하게 떠올랐다. 논개의 심리를 표현하기 위한 다양한 표현을 하던 중에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짚어봤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의병의 활동이 매우 많은 ‘의병의 역사’이다. 논개가 의로운 여인의 대표격이라면 그와 함께한 사람의 정신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논개를 그리다말고 논개의 남자를 떠올렸다. ‘최경회’ 대단한 업적과 인품을 가진 사람이다. 작품은 최경회 장군의 의병 시절 무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어내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던 상황을 상상하여 그렸다. 관군이 아니기 때문에 사복으로 만든 군복이었을 것으로 생각했고 그의 나이가 60이었지만 평소 활쏘기에서 능하여 선조 앞에서 활쏘기 시합을 할 때 장원을 한 사례와 진법에도 능했던 것을 보면 신체 단련도 상당히 열심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외모를 강인하고 조금은 젊은 느낌으로 제작하였다.
1편에서 이순신 장군을 간단하게 설명했는데 이순신 장군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최경회 장군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 못하여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경회와 같은 의로운 사람들이 있어 우리가 있다는 고마움을 느낀다.
화가: Kai Jun/ 제목 : 한국인 시리즈 NO.4- 논개의 남자. 최경회/ 유화/ 72.7cm X 60.6cm/ 2017년
최경회 소개
최경회에 관한 기록은 많이 있으나 논개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매우 미흡하다. 그 부족한 부분을 해주 최씨 승지공파의 17세손 최경회의 부실(副室)로 기록 된 족보와 최경회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논개의 구전 내용을 결합하여 구성하였다.(논개의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 편에)
최경회(崔慶會) 자: 선우, 호: 삼계, 별호: 일휴당
1532년 화순 삼천리 태생/1561년 신유 식년시 생원 급제/1561년 신유 식년시 진사 급제/1567년 정묘 식년문과 을과 급제/1574년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옥구현감(송덕비 건립)/1577년 장수현감(선정비 건립)/1579년 무장현감(송덕비 건립)/1582년영암군수(송덕비 건립)/1584년 호조정랑, 형조정랑, 영해부사(영해고을민이 생사당을 세움)/1587년 사도시정, 담양부사(선정비 건립)/1590년 모친상으로 관직 사직/1592년 임진왜란 전라우의병장/1593년 경상우도병사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
최경회는 문신이며 의병장이다. 그의 생은 백성을 위한 삶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옥구현감 시절부터 고을민들이 자진하여 송덕비와 생사당을 지을 만큼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국난이 나자 나라를 구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목숨을 바쳐 싸웠으며 혁혁한 전과를 이룬 대장군이다. 그의 충의에 대한 신념과 실천은 주변인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함께 동참 할 수 있는 큰 믿음을 주었던 훌륭한 리더임이 분명하다.
그의 업적과 관련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590년 모친의 상으로 낙향하여 지내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그는 “이제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으니 내 몸을 나라에 바쳐도 된다. 부모에게 하던 효도를 나라에 충성으로 바치리라.“하며 형 최경운, 최경장, 아들 최홍기, 조카 최홍재, 최홍우 6명이 힘을 합쳐 화순 삼천리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고 전라우의병이라 칭하였다. 조카 최홍재를 금산의 고경명(高敬命. 문인·의병장) 휘하로 보냈으나 고경명장군이 이미 전사한 후로 그의 휘하였던 남은 병력 800여명을 수습하여 전라우의병에 편입시켰다.
전라우의병은 한양으로 가서 근왕하려하였으나 전라감사 권율으로부터 전라도 방어를 책임져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전라우의병은 장수를 주둔지로 하여 금산, 무주 등지에서 왜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둔다. 금산전투에서는 짙은 밤안개를 이용하여 볏짚을 병사로 위장하고 적의 화살과 탄환을 소비하게 했다. 어둠이 개이고 날이 밝아올 때 공격하여 크게 승리한다. 그는 탁월한 감각과 현감 시절 고을의 안녕을 위한 노력으로 각 고을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던 경험으로 지리에도 밝았다. 그는 장사진, 어관진, 조운학익진 등의 진법을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하여 기습작전 및 매복 작전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1592년 왜군이 진주방향으로 진격한다는 첩보를 받고 의병을 매복시켜 공격하며 큰 타격을 입힌다. 이 전투를 무주대첩이라 한다. 이 승리 이후 장수에서 남원으로 주둔지를 옮긴다. 남원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을 때 영남의병장 김면과 경상우도관찰사 김성일이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그의 부장들과 고을민들은 ‘적군의 기세가 사방으로 뻗치고 있는데 호남을 버리고 멀리 영남으로 간단 말입니까’ 라는 말을 하였다. 이에 영호남의 마음을 하나로 잇는 위대한 말을 남긴다. “嶺右我國之地 湖南我國之地 영남도 우리 땅이요, 호남도 우리 땅인데 의로써 일어난 사람들이 어찌 영호남을 가리겠는가.' 라며 영남으로 출병하여 1592년 10월 진주성 1차 전투 외곽 지원담당을 맡는다. 왜군 2만 여명을 상대로 진주목사 김시민과 진주성 군사(3천8백명) 주민(수만명), 정유경(300명), 조응도/최강/이달(500명), 정기룡(300명), 상대승/정언충(200명), 최경회/임계영/김준민(2000명)의 관군과 주민 의병이 힘을 합쳐 진주성 1차 전투(진주대첩)를 대승리한다.
전라우의병은 거창에 주둔하며 영남의병장 김면과 합동 작전으로 개령에서 왜군을 몰아내고 1593년 1월15일에 성주성을 탈환한다. 이후 고령의 김면과 김성일이 전염병으로 죽자 조정에서는 4월21일 조정에서는 최경회를 경상우도병사로 임명한다. 선조실록 37권 1593년 4월21일의 기록을 보면 비변사가 말하기를 ”최경회는 무신이 아니지만 이미 여러 번 전공을 세워 명성이 크게 드러나고 재능도 책임을 감당할 만합니다. 그리고 그가 거느리고 있는 호남의 의병이 이미 그와 친숙해 있으니 사변이 안정될때가지 직을 맡겨도 되겠습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렵 조선에서는 구원군인 명나라와 1년간 전쟁으로 피폐해진 왜군사이에 화의가 성사된다. 그 결과 왜군은 북부 및 수도권 지역에서 철수, 남해안까지 물러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과정에서 왜군 전군에 진주성을 공격할 것을 명령한다. 제1차 전투에서 참패로 위신이 손상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타 히데이에 등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특별히 명령을 내렸다. 왜군은 6월 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18일까지 경상남도 함안, 반성, 의령 일대를 점령하고, 19일에는 3만 7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한다.
거의 모든 왜군 병력이 진주성 한 곳에 집중 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진주 근처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명군은 진주성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왜군 측에서도 고니시 유키나가가 히데요시의 의지가 확고하여 진주성만은 함락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차라리 자신들이 공격하기 전에 민간인들을 모두 내보내라고 권고할 정도였다. 곽재우, 선거이, 홍계남 등 조선군도 진주성 근교까지 갔다가 절대적인 병력차를 확인하고 진주 구원을 포기했다. 그러나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은 진주는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이기에 진주만 공격하고 돌아간다는 왜군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성을 포기하라는 명군과 왜군의 권고를 거부했다.
진주성을 향해 총공세를 전개하려는 왜군에 대항하기 위해 관군으로는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김해부사 이종인, 사천현감 장윤 등이 진주성으로 들어 왔고, 고종후, 강희열, 이계련, 변사정, 민여운 등이 의병들을 거느리고 진주성에 들어왔다.
불행한 것은 당시 진주목사 서예원은 원병으로 와있던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다가 급히 전투에 참가하느라 진주성을 지휘할 채비를 갖추지 못하였다. 진주성의 대대적인 공격을 막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관군 2천2백여 명, 의병 6백여 명 그리고 주민도 6만여 명이 되었지만 모두 의기로 뭉쳤을 뿐 잘 훈련된 왜군에 대항하기는 처음부터 열세적인 입장에 있었다.
6월 21일부터 6월 27일까지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6월 21일 왜군 기마병 2백여 기가 출몰하여 진주성을 살피고 돌아갔다.
6월 22일에는 처음 교전이 일어나 왜군 30여 명을 쏘아 죽이니 퇴각을 하였다가, 초저녁과 2경, 3경에 다시 공격을 해왔다가 퇴각을 하였다. 조선군은 남쪽에는 남강이 흐르기 때문에, 침입이 예상되는 서북쪽에 해자를 파고, 물을 흘려 호를 만들었으나, 왜군은 해자에 흙을 메워 길을 만들었다.
6월 23일 낮에 3회, 밤에 4회를 공격을 하였다.
6월 24일에는 적의 증원군 1천여 명이 동서로 진을 쳐서 포위하였다.
6월 25일 왜군은 동문 밖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흙으로 만든 대를 세워 성안으로 사격을 퍼부었다. 이에 충청병사 황진도 성안에 다시 높은 언덕을 쌓아 대처를 하였으며, 낮의 세 차례 공격과 밤의 네 차례 공격을 모두 격퇴하였다.
6월 26일 왜군은 방책을 만들어,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화전 공격을 하여 성내의 초옥을 불태우면서,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고 다시 전서를 보내 항복을 독촉한다. 이 날도 밤낮으로 일곱 차례를 싸워 적을 격퇴하였다.
6월 27일 왜군은 동문과 서문 밖에 다섯 군데의 언덕을 축조하고 거기에 공성용 대나무 대를 세워 하향 조준으로 사격을 하여 조선군 300여 명을 죽였고, 철갑을 입고 사륜거라는 장갑차를 끌고 와, 철추로 성문을 뚫으려 했다. 장사였던 김해부사 이종인이 연거푸 적을 베어 물리치고, 조선군은 기름과 횃불을 던져 왜군에 대항하여 격퇴시켰다.
6월 28일 야간 경비가 소홀하여 적이 몰래 와서 성을 뚫으려하는 것을 힘들게 방어를 했으며, 1천여 명의 적이 죽었는데 황진도 적이 쏜 탄환을 맞고 전사를 하였다.
6월 29일 전사한 황진을 대신하여 목사 서예원이 경비대장을 맡았으나, 겁을 먹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자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직을 파하고, 장윤에게 그 직을 맡겼으나 장윤도 탄환에 맞아 죽게 된다. 오후에 비가 내려 동문의 성이 무너지자 일본군은 노도와 같이 밀려왔는데, 활과 화살로 대응을 하지 못하므로 창과 칼로 육박전이 일어나게 되고, 이종인도 왜군의 탄환을 맞고 죽게 된다.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는 조복 한벌과 무주대첩에서 왜장에게서 빼앗았던 보검과 공민왕의 그림을 조카 최홍우에게 맡기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둘째형 최경장에게 전하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둘째 형님이 내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의병을 일으킬 것인데 이것으로 표지를 삼고 이 옷으로 내가 죽은 후 장례를 치러 달라.”고 말한다.
이후 끝까지 저항하던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와 함께 촉석루에 오른다. 최경회는 시 한 수를 읊는다.
촉석루 위에 올라 있는 세 장사
한 잔 술에 웃으면서 장강 물을 가리키네.
장강 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니
저 물이 마르지 않는 한 우리 넋도 죽지 않으리.
마지막으로 최경회는 북쪽을 향해 4배하고 “외로운 성이 포위당했는데 밖에서 지원군은 오지 않고 형세도 불리하고 힘도 다했으니 한 번 죽음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뿐이다.”라고 말하고 인장과 병부를 가슴에 안고 남강에 투신을 한다. 이때 함께 있던 여러 장군도 남강에 투신하여 죽게 된다.
이후 1593년 7월7일 일본군 장수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 장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한다. 논개는 깍지를 끼었을 때 빠지지 않게 열손가락 마디마다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유인해 끌어안아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죽게 된다. (논개에 관한 내용은 다음 편에 좀 더 자세히 다룹니다.)
진주성 2차 전투는 조선군이 패한 전투이지만 결코 패전이라 할 수 없다. 왜군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주어 진주성 전투이후 왜군은 이렇다 할 전적 없이 부산으로 후퇴하게 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막부 몰락의 시작을 알리는 전투였다.
이 전투는 지방의 성 하나를 놓고 싸운 전투가 아니라 상당히 많은 가치가 남은 전투였다. 진주성 전투는 조선인이 얼마나 강인하고 충, 의가 있는 사람들인지를 보여준 전투였다. 고립된 성 안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맹하게 싸웠다. 최경회와 의병들은 1년간 노숙을 하며 국가를 위해 헌신했으며 과거부터 있었던 호남과 영남의 간극을 없애는 모범을 보였다.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왜군이 호남이나 한양으로 다시 진군하지 않도록 사수하겠다는 생각은 국가와 백성을 사랑하는 깊고 큰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것을 예측하고도 감행했던 그들은 우리역사에서 소중히 생각해야하는 위인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 40권, 26년(1593년 7월 10일)(1593년 7월 15일)(1593년 7월 16일)
선조실록 42권, 26년(1593년 9월 6일)
김세곤 http://blog.daum.net/segon53/15860230위키백과 제2차 진주성 전투https://ko.wikipedia.org/wiki/%EC%A0%9C2%EC%B0%A8_%EC%A7%84%EC%A3%BC%EC%84%B1_%EC%A0%84%ED%88%AC
최경회 후손 기록 https://blog.naver.com/yschoimd/20137770329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633741&cid=51942&categoryId=54817
세계일보 기사 http://www.segye.com/newsView/20120807022391
제작 방식
방식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치하는 ‘테네브리즘’적인 표현으로 제작되었다.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유화물감을 두껍게 칠하여 질감 효과를 내는 임파스토 기법을 주된 방식으로 활용하였다. 조선시대의 초상화 표현 특징인 전신사조(傳神寫照)로 표현하였다.
미술 용어의 이해
‘테네브리즘’, ‘키아로스쿠로’ ‘임파스토’는 1편 이순신장군 설명 참고
‘전신사조(傳神寫照)’는 2편 별을 바라보는 염근리 설명 참고
‘한국인 시리즈 NO.4- 논개의 남자. 최경회’ 작품의 부분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년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년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前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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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리스트 Kai Jun(전완식) 소개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 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 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를 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 문재인, 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사)한국미술협회 이사, 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 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