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국제뉴스 초점] 스칸디나비아식 복지를 동경하는 이들에 주는 진실 메시지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11월23일 14시52분
  • 최종수정 2023년11월23일 15시30분

작성자

메타정보

  • 1

본문

최근 우연히 읽은 한 짧은 에세이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자유시장을 신봉하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의 플랫폼인 ‘Mises Institute’에 올린 한 비지니스 분석가(Lipton Mathews)의 “Taking a Close look at the Vaunted Scandinavian Welfare States” 라는 제목의 에세이다. 이 글의 요지는, 사회주의 복지 국가를 꿈꾸는 좌파들이 사회 복지를 논할 때면 언필칭 본보기로 들고 있는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복지 제도의 성공 배경과 실상을 역사적 사실을 들어 설명한 것이다.

 

저자는 이 논설에서, 스칸디나비아국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복지는 ‘과도하게 칭송된(vaunted)’ 것이고, 그나마 이러한 복지 혜택의 원천은 역설적이게도 이들이 과거에 친(親) 시장 정책을 추구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나라들의 유전적, 사회 문화적 특성이 복지 국가를 이룩한 신뢰의 바탕이 됐다고 지적한다. 우리 사회에도 때만 되면 각종 복지 제도를 두고 진영 간에 실질이 없는 논쟁이 벌어지곤 하나, 이런 공소한 논쟁에 좋은 참고가 될 것으로 보아 간단히 소개한다.          

 

“「기본소득」 · 「기본주택」에다 이제는 「기본대출」까지 등장하는 허황된 주장들” 

 

지난 2022년 대선을 계기로 우리 사회는 진영 간에 서로 대립되는 극단적 주의 주장이 분출되어 분단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같은 무렵에 미국에서도 마찬가지 양상이 벌어졌었다. 이념에 따라 나누어진 정파 간에 사회 각 분야의 관점과 대안이 사사건건 부딪치고 갈라지기 일쑤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극명하게 대립하는 것이 바로 사회 복지에 관한 정부 역할의 범위를 둘러싼 논쟁이다. 역대 선거를 통해서도 이번처럼 극렬한 대립 양상을 보인 적은 없지 않았나 싶다. 

 

소위 ‘진보(liberalists)’ 라고 통칭하는 ‘좌파’ 진영이, 그들의 속성에서는 그럴 만도 하지만, ‘기본’ 브랜드의 막무가내식 정책들을 쏟아냈던 것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아직도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는 ‘기본소득’을 비롯해서, 집 없는 가구에 정부가 집을 한 채 씩 나눠준다는 ‘기본주택’에다, 이제는 원하는 사람에게 일정 한도의 대출을 보장해 주자는 ‘기본대출’까지 등장했다. 천만 다행으로, 이런 주장을 폈던 후보가 낙선하자 많은 사람들이 아찔한 순간을 모면한 데 안도했을 터이다.   

 

이런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들이 흔히 부딪치는 질문은 바로 복지를 위한 ‘재원(財源)’ 논란이다. 이런 많은 시혜를 베풀어야 할 정부는 어디서 돈을 마련해서 기본소득을 나눠주고, 무주택자들에게 나눠줄 집을 지을 것이며, 원하는 누구에게나 일정 한도의 대출을 공여할 자금을 조달할 것인가, 하는 논점이다. 재론의 여지도 없으나, 정부가 지출 재원을 조달하려면 일반 경제 주체들의 활동에 개입해서 이들이 창출한 수익의 일부를 세금으로 징수하거나, 중앙은행에서 빚을 내 충당한다. 그러니, 이들이 주장하는 광범위의 ‘기본’ 복지를 시행하려면, 정부는 민간 주체들이 이미 축적해 놓은 재산을 강제로 수탈하지 않는 한, 다른 주체들에게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거나 더 많은 빚을 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사회주의 성공의 표상으로 알려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복지 원천은 역설적이게도 '시장 경제' 였다”

 

한편, 앞에 소개한 논설의 필자는 미국 등 각국의 좌파들이 동경하는 노르딕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사회주의식 복지 제도의 성공에 대해, 우선 그 복지 제도의 원천을 정확하게 들여다볼 것을 권한다. 혹자는, 이 국가들의 성공이 마치 이들이 펼치고 있는 복지 정책 때문에 이뤄진 것으로 착각하고, 사회주의가 효과가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나, 이는 이 국가들의 실상을 살피지 못한 탓이라고 경고한다. 

 

왜, 사회주의를 채택한 다른 국가들은 모두 재앙적 결과를 가져온 반면, 이들 북유럽 국가들은 유익한 성공을 거두고 있는가?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이들 국가들의 역사적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분명한 점은, 이들은 복지국가로 형성되기 전부터 이미 번영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덴마크나 스웨덴은 복지 국가를 지향하기 훨씬 전부터 생활 수준이나 경제성장 측면에서 이미 번영을 향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나라들이 지금 구가하고 있는 번영은 19세기~20세기 동안에 친 시장적 사회 개혁을 추구한 결과라는 사실이다. 

 

특히, 덴마크는 1940년대에 이미 탁월한 경제적 성공을 거두고 있었고, 이는 당시 무역 개방 및 고도의 생산성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릴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스웨덴의 번영도 마찬가지로 친 시장적 정책을 도입한 결과라는 것이다. 스웨덴은 과거 1870년대 이전에는 가난한 나라여서 미국으로 대규모 이민이 유출됐을 정도다. 그러나, 농경 사회를 벗어나 자본주의 체제가 형성됨에 따라서 이 나라는 부강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는 주로, 사유 재산권 보장, 자유시장 제도, 법치 제도 확립에 더해 잘 교육된 기술자 및 기업가들이 결합된 형태로 이뤄진 결과다. 이로 인해 스웨덴은 유례 없는 고도 경제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복지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상징이 됐지만, 이들의 성공의 원인은 아니다”

 

한편, 지금 와서 보니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누리는 복지 제도가 이 나라들의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으나, 그것이 이들 나라들의 경제적 성공의 원인은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스웨덴은 일찍이 친 시장적 정책을 펼친 결과로 1870~1936년 기간 중 선진국 가운데 가장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전체로도 1850~2020년 기간 중 경제 자유도에서 지속적으로 훌륭한 실적으로 거두었고, 그 가운데 덴마크는 최고의 실적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이들 국가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전략적인 기획에 따라서 열심히 노력을 기울인 끝에 오늘날 전세계에서 번영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복지와 관련된 몇 가지 지표들은 이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복지 국가로 형성되기 훨씬 이전부터 나타난 것들이다. 이들 국가들의 기대 수명은 다른 지역 국가들에 비해 월등히 긴 것이나, 그런 현상은 1970년대 이 지역에 복지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현상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덴마크인들은 세금 부담이 미국보다 낮았던 1960년에 이미 미국인들보다 수명이 더 길었다는 사실이다. (“노르딕 사회주의의 신비를 벗기다(Debunking Utopia)”, Nima Sanandaji). 

 

지금 설명하는 논설의 필자가 인용한 이 책의 저자 Sanandaji는 다른 노르딕 국가들도 이런 패턴을 거쳤음을 밝혀냈다. 즉, 이들의 경제에서 미국과 비슷한 공공 부문 비중을 가졌을 무렵인 1960대에 스웨덴인들의 수명은 미국인들보다 3.2년이 길었고, 노르웨이인들은 3.8년이나 더 살았다. 그러나, 복지 국가의 표상이 된 지금에 이르러 이들 국가들의 미국과의 수명 차이는 2.9년, 2.6년으로 줄어들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소득은 ‘복지’가 본격 확대되기 전에는 훨씬 더 평등 했었다”

 

한편, 혹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복지가 ‘사회적 이동성(social mobility)’과 연관성이 크다고 믿기 쉬우나, 새로 밝혀진 바로는 스웨덴인들은 ‘복지’ 국가를 형성하기 훨씬 이전부터 높은 사회적 이동성을 보였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전체로 보아도, 복지 제도가 형성됨에 따라 소득 분배가 더욱 균등해진 것은 사실이나, 복지 제도가 본격적으로 확대되기 전에는 사실 이보다 훨씬 더 균등했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소득이 균등한 것은 유전적, 문화적 유사성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 유전자 및 문화가 비슷한 사람들은 기호(preference)나 특성(traits)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직업에 대한 선호(選好)가 공통되기 쉽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소득은 비슷하게 될 확률이 높은 것이다. 반면, 유전적, 문화적 다양성이 커질수록 직업에 관한 선호나 취향도 다양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소득의 격차도 커질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 등, 사회적 다양성이 높은 나라의 소득불평등이 상대적으로 큰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의 높은 사회적 신뢰도, 생산성, 동질성은 복지 향상에도 유리한 여건”    

 

흔히, 복지 수준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이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신뢰성, 생산성, 동질성 등에서 월등히 높은 지역이라는 점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사회 구성원 상호 간에 신뢰성이 높기 때문에 거래 비용이 낮고, 주요 정책을 수립할 경우나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때에 손쉽게 동의를 얻을 수가 있는 점도 유리한 환경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사회적 신뢰성이 높기 때문에 국민들은 복지에 대한 지지도가 높다. 왜냐하면, 흔히 사악(邪惡)한 의도로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서도 이를 다른 수혜자들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게다가,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일반적으로 대단히 정직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로 신뢰성이 높다. 당연히, 사람들이 정부를 상대로 사기(詐欺)한 방법으로 복지를 이용하려고 시도할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낮은 수준에 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요인이나, 이 지역이 동질성의 사회라는 점은 외부인들이 수혜(受惠)할 가능성이 낮다는 점에서도 복지에 대한 지지가 높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이런 고유의 특성에서 이 지역에서 성공한 복지 정책이 다른 지역에서는 실패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사회 구성이 다양할수록 그 나라의 복지에 대해 동의를 얻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다양성이 높은 지역에서는 복지에 대한 지지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을 만들어내지 못할 수가 있다. 또한, 국민들이 노동을 기피하려는 성향이 높아 생산성이 낮은 국가에서는 스칸디나비아형 복지 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다. 즉, 한 나라의 생산성이 낮아 복지 재원을 창출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당초에 복지 국가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스웨덴 · 덴마크 등은 이미 90년대에 과도한 복지주의 경제의 구조개혁에 나서기도”    

 

이렇게,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복지 시스템에 대한 찬사가 높은 가운데, 스웨덴과 덴마크는 이미 1990년대에 과도한 정부 주도의 복지 정책(statist policies)을 억제하기 위해 경제 구조개혁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 이를 감안하면, 의문의 여지없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경제가 탁월한 성과를 거둔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나, 이런 성과가 복지 정책 덕분인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혹시 스칸디나비아식 복지 시스템을 따르려는 경우에는 우선 이들 국가들의 복지 제도를 구축하려고 시도하기 전에 이들 국가들의 문화나 시장 친화적 정책 등에 먼저 성공해야 할 것이다. 일부 국가에는 스칸디나비아식 복지 시스템을 도입해서 운용하는 데에 필수적인 사회적 규범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지 국가를 운용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이런 제도에 대한 사회적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을 형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지적이다. 

 

다른 또 한 가지 고려할 점은, 이들 국가들은 대체로 인구 규모가 작다는 특징이다. 인구가 가장 많은 스웨덴이라고 해봐야 고작 923만명이고, 덴마크가 551만명, 핀란드가 533만명, 인구가 가장 적은 노르웨이는 겨우 476만명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대체로 한 지방자치 단체나 웬만한 대도시 규모에 불과하다. 그러니, 사회 구성원들 간에 동질성을 확립하고 유지하는 데에 대단히 효율적이다.

 

“복지주의를 추구하려면 우선 ‘친(親)시장 사회’를 형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정칙(定則)”    

 

정부가 주도하는 ‘복지(welfare)’ 제도는 해당 수익자가 받는 혜택과 이에 대해 부담하는 대가 간의 차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아무런 대가 없이 무상으로 베풀기도 한다. 각종 ‘기본’ 발상들이 대체로 이에 해당할 것이다. 재론의 여지없이, 선천적으로 능력이 뒤쳐지거나 후천적으로 경쟁에서 탈락해 능력을 상실한 경제 주체들의 경우에는 정부 등 공적 기구들이 나서서 이들을 구제하고 재생을 지원하는 것은 누구라도 의당 공감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명목으로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일정 한도의 평균적 시혜를 베풀자는 발상은 당연히 엄청난 사회적 자원 낭비를 초래할 것임은 물론이고, 오히려 불평등을 낳게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리고, 숙명처럼 유한한 자원을 가진 인간 사회에서 지속가능한 재원을 마련하기란 사실은 신의 영역만큼이나 어렵다는 점은 공지하는 바이다. 자칫, 과도한 복지를 위해 정부가 재원 마련을 위해 세금을 무한정 올리거나 감당할 길 없이 채무를 마구 늘려가면, 종국엔 근로 의욕을 극도로 떨어뜨리거나, 누적된 빚을 앞으로 오는 자녀 세대들이 죽도록 일해서 갚도록 물려주게 된다는 점은 윤리적으로도 큰 문제를 낳는다. 

  

혹시, 정부가 중앙은행에서 무제한 차입하는 안이한 발상에 쉽게 빠질 수도 있으나, 이도 얼마 가지 않아 파탄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은 수많은 역사적 사례들이 증명한다. 그리고, 한 나라가 위기에 대처할 능력을 상실했을 때 어떤 재앙을 겪게 되는지는 1997/8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 우리가 몸소 겪었던 바이다. 당시, IMF의 긴급 구제금융 제공에 따른 약속 이행을 위해 우리 국민들이 감내해야 했던 혹독한 고통은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그 가혹한 정도는 뒤에 IMF 내부에서도 크게 반성했을 정도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몇 달 뒤 치러질 선거를 앞두고 막무가내식 ‘복지’ 공약이 난무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좌(左), 우(右) 불문하고 당장의 달콤한 유혹에 함몰돼 최소한의 자제력마저 잃지 않을까 우려되는 바 크다.  

<ifsPOST>​ 

1
  • 기사입력 2023년11월23일 14시52분
  • 최종수정 2023년11월23일 15시30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