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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블 붕괴 후 ‘잃어버린 25년’ 중에 딱 한번 일본경제가 빛을 발한 때가 있었다. 거센 당내 저항을 극복하고 5년 5개월의 총체적 구조개혁으로 일본을 다시 일어서게 한 고이즈미 내각(2001~2006년) 때가 바로 그 때였다. 저성장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개혁 리더십의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의 장래를 자기에게 맡겨달라는 잠룡들에게, 고이즈미가 편지로 전하는 충언을 한번 들어보자. |
<편지 15> 개혁의 제 1 요소는 국민의 지지다
고통을 알고도 국민은 구조개혁을 선택했다.
내 개혁의 성공 요인 세 가지를 꼽자면, 첫째는 흔들림 없는 개혁의지, 둘째는 법과 제도 위에 구축한 관저주도의 개혁체제, 셋째는 변함 없는 국민의 지지였다.
나의 개혁 의지에 흔들림이 있었다면 2001~2002년의 극심한 불황, 날로 거세져만 간 개혁저항세력의 반대 등에 의해 개혁추진은 첫 걸음부터 좌절되었을 것이다.
정치개혁과 행정개혁으로 자민당 총재와 일본 총리에게 주어진 권력 기반 위에 관저주도의 개혁체제를 백분 가동하지 않았다면, 파벌과 자민당 그리고 관료 등 기득권 세력들에 휘둘렸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들 세력의 기득권을 근본으로부터 뒤흔들 나의 개혁을 감히 추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불황에도 불구하고 나의 개혁추진에 국민의 열렬한 지지가 이어지지 않았다면, 정권교체로 인해 나의 개혁추진은 일찍이 무산되고 말았을 것이다. 고이즈미 개혁의 세 가지 요소 중 제일 중요한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국민의 지지이다. 국민의 지지만 있으면 개혁에 대한 나의 확신에 흔들림이 있을 수 없고, 총리에게 부여된 권한 행사 없이도 개혁저항세력이 국민의 지지하는 개혁 기조를 따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민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해서 그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고 (자주 그렇듯) 국민의 ‘얄팍한 바램’에 영합하지는 않았다. ‘국민의 바램’에 영합하지 않아서 내각에 대한 지지도가 흔들리면, 나는 여론에 맞서면서까지 왜 국민이 고통스러운 나의 개혁을 지지해야 하는지를 강변해, 국민의 지지를 개혁에 대한 지지로 되돌려 놓았다.
국민의 지지는, 리더가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에 관해 부단히 국민과 소통하여 그들과 공유할 때자연스레 도출된다. 리더는 특히 추진하고자 하는 정책이 왜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지 국민에게 설명하고 국민을 설득하여 국민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정책도 없이, 그런 소동이나 공감도 없이, 아베의 ‘아름다운 나라’ ‘전후 체제의 극복’ 또는 후쿠다의 ‘안심할 수 있는 나라’처럼 국민의 삶과 괴리된 정책이나 리더십으로는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
나는 총리가 되기 전부터 자민당 총재 선거나 당내 정책토론 등을 통해, ‘나의 구조개혁이 성장과 일자리 면에서 고통과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구조개혁 없이는 지속가능한 성장이나 일본경제의 근원적 부활은 없다’는 점을 밝혀왔다. 그러나 당내 경쟁후보나 야당은 국민의 귀에 달콤한 공약과 정책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나의 자민당 총재와 일본총리 선출은 성장후퇴를 감수하고서라도 구조개혁을 추진하라는 국민의 선택이자 명령이었다. 그저 잘해보겠다는 감언이설에 국민이 홀린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따르는 나의 개혁을 국민이 지지한 것이었다.
국민의 선택은 선거로 드러난다
국민의 지지가 선거 특히 총선을 통해 표현될 때, 내각과 정책노선이 가장 강력하게 그 정통성을 인정받게 된다. 반대로, 선거를 통해 집권하지 않고 파벌들의 밀실타협으로 들어선 내각은 그 정통성 확보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관련해 나를 이어 들어선 자민당 총리, 소위 ‘포스트 고이즈미’ 총리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를 이은 자민당 총리가 그런 인물들인 줄 몰랐다. 내가 퇴임 하기 전에 총리 공선제(公選制)처럼 국민의 뜻이 자민당 총재 선출에 반영될 수 있도록 선출 방식을 바꿔놓지 않았던 것은 내 일생일대의 과오였다.
내가 퇴임한 후 세 명의 총리는 모두 자민당 내부의 선출 절차를 통해 선출된 인물이었다. 언론이 비웃었듯이, 그들은 ‘회전문 총리’였다. 물론 그들도 형식적으로는 공개적 절차를 거쳐 자민당 총재에 선출되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이 집권한 후 꾸민 내각과 당 인사의 면면(面面) 또는 그들이 추진하려고 했던 주요한 정책과제들을 통해서 볼 때, 그들은 주요 파벌들간의 밀실 타협을 통해 선출되었다는 집권 정당성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3개의 포스트 고이즈미 내각은 망언이나 부패 등으로 문제가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파벌 영수나 파벌의 간부를 내각에 대신으로 불러들였다. 아베 내각 후반에 시작된 이 현상은 아소 내각에 이르러서는 ‘총력 내각’의 이름 하에 아예 드러내놓고 파벌 영수들을 대신으로서 전면에 내세우는 식으로 악화되었다. 반 개혁적 정책, 파벌주도 정치체제와 ‘철의 삼각형’ 비효율과 부패의 먹이사슬의 부활 등에 의해 어느 사이엔가 관저주도의 개혁체제는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언론과 국민도 모든 포스트 고이즈미 내각에 대해 정통성(legitimacy)를 인정하지 않은 제일 큰 명분이 총선이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은, ‘국민이 선출’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내가 총리를 그만 두고 모든 포스트 고이즈미 내각의 일에 대해 왈가왈부 하기 보다는 가급적이면 그들을 측면에서 지지하는 언행으로 일관했던 이유는, 그들의 관저주도 개혁체제가 제대로 작동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개별 정책에 가서는 나의 정책이나 이념과 다른 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내각이 하는 일에 대해 언급조차 자제했던 것은, 내가 터전을 닦아놓은 관저주도 체제를 활용해 (그들이 공언했듯이) 고이즈미 개혁을 추진하는 데에 매진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들 내각의 출범 시부터 보인 내각과 정부 운용 행태는, 국민과 언론의 눈에, 구태 정치, 즉 국민의 의향과는 상관 없이, 파벌들 간의 밀실 타협으로 자민당 총재와 일본 총리를 옹립하여, 파벌이 주도하는 국정운영을 하는 종래의 자민당 정치로 되돌아 가고 있었다. 국민이 내각에 대한 지지를 거두어 들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국민의 지지 여부를 떠나, 고이즈미 개혁을 계승하겠다는 집권 공약과는 달리, 그들은 처음부터 개혁의지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아니 그들은 정권을 걸고 추구하는 바부터 없었다. 내가 물러난 후 3번 들어선 자민당 ‘회전문’ 내각의 3년은 구조개혁을 통한 일본경제 부활에 ‘깔끔한 낭비’였다.<ifs POST>
<순서>
왜 지금 개혁의 리더십인가? 제 1부 제대로 된 잠룡이라면 제 2부 대권을 잡고 나면 개혁의 무대는 이렇게 꾸며라 제 3부 모두를 개혁에 동참시켜라 제 4부 논란이 많은 개혁과제를 택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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