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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블 붕괴 후 ‘잃어버린 25년’ 중에 딱 한번 일본경제가 빛을 발한 때가 있었다. 거센 당내 저항을 극복하고 5년 5개월의 총체적 구조개혁으로 일본을 다시 일어서게 한 고이즈미 내각(2001~2006년) 때가 바로 그 때였다. 저성장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개혁 리더십의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의 장래를 자기에게 맡겨달라는 대통령에게, 고이즈미가 편지로 전하는 충언을 한번 들어보자.제 3부 모두를 개혁에 동참 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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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19> 당과 내각에 친정(親政)체제를 구축하라
당과 내각에 친정체제를 구축하라.
그 당정일체(黨政一體)는 오로지 개혁만을 위해서임을 잊지 말라.
내가 관저주도 개혁체제를 운용함에 있어 도움이 된 것 중에 중요한 것의 하나는, 내가 총리가 되기 전에 주요 정책을 내걸고 당내에서의 치열한 경쟁을 하고 또 대장성 등의 대신으로서 관료를 부려본 경험이 풍부하여, 당과 행정의 작동원리와 체계를 치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선에 목을 거는 국회의원을 무엇이 움직이는지, 승진에 목을 거는 관료가 무엇의 영향을 받는지 등을 익히 알고 있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관저주도 체제를 운용하는 데에 또 유리하게 작용한 점은, 내각대신, 여당 당료 등을 개혁 기조에 부응할 인물 또는 자문회의 결정과 총리 지시로 발하는 개혁 정책을 자기 일처럼 여기고 적극 추진할 인물로만 채워, 개혁을 위한 ‘친정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결국 나는, 당과 내각을 구조개혁의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데에 정치와 행정의 수단을 활용함으로써, 관저주도 체제를 개혁만을 위한 체제로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과 내각의 친정체제 구축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국회(여당)를 손에 쥐는 것이다. 여당을 총리의 손에 쥠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총리의 개혁과 이념 그리고 그 정책에 동조하게 해야 한다. 총리의 통치이념과 개혁기조 그리고 주요 정책 특히 명시적으로 밝힌 당의 공약에 동조하는 자만 선거에 공천해 줘야 한다. 여당의 공약은 지방, 계층, 집단 등의 요구사항을 집대성한 포퓰리즘의 모음집이 아니다. 공약은 개혁정책의 총화로서의 메니페스토(Manifesto)이다. 내각책임제에서 여당 총재가 총리인 이상 여당과 총리가 생각을 같이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총리와 개혁과 정책관을 공유하게 하고, 정 안되면 여당이 총리의 정책관에 동조케 해야 한다.
개혁을 위해 당정일체를 이루라.
개혁에 관한 한 모두를 주류로 만들라. 이를 저해하는 비주류니 파벌 같은 것은 분쇄하라. 필요하면 예산과 당정 인사 그리고 당의 공천권과 정치자금 배분 등 총리와 여당 총재에게 부여된 모든 권한을 동원해 당정일체를 이루도록 하라. 당정일체를 만드는 데에 필요하다면 국회해산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무소신 또는 반개혁의 당정일체는 야합이자 국가에 해악일 뿐이다. 나는 자민당 세력기반이 강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숫자만 늘어나는 기반 강화는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원내에 자민당 국회의원이 늘어나되 그들이 나의 개혁을 지지하는 자민당 의원일 때에만 그 기반 강화가 의미가 있는 것이다.
2001년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4월에 집권하여 6월 동경도 의회 선거에서 ‘고이즈미 개혁’을 내걸고 압승을 한 직후였다. 나카소네 등 당 중진들이 나더러 7월 선거를 참의원에 중의원을 더하여 중참(衆參) 동시 선거로 치를 것을 권하고 나섰다. 오래간만에 ‘인기 있는’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들어섰을 때, 국회를 해산하여 총선을 치르면 최근 수년 자민당 중의원 숫자를 늘릴 수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이들 중참선거 제안을 거부했다. 당시 자민당을 좌지우지하는 파벌에 휘둘리는 의원이 늘어나면 오히려 나의 총체적 구조개혁 추진이 더 어려워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나와 내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의 자민당 내 권력 기반이 확보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총선을 치르면, 자민당 의원이 늘어는 나겠지만, 나와 내 개혁을 지지하기 보다는 거부감을 가진 후보들이 더 많이 당선되어 개혁저항세력의 기세만 더 올리게 된다는 것이 당시 나의 생각이었다. ‘자민당이 의석을 늘려 안정세력이 되면 아무도 내 개혁을 아랑곳 하지 않을 것이다. 자민당 세력기반이 적당히 불안해야 개혁을 둘어싼 여야간 정책 경쟁에 무게가 실린다’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유사한 일이 2003년 총선에서 또 벌어졌다. 그 해 봄에는, 리소나 은행 부실문제가 (국유화와 경영진 부실책임과 구조조정 등으로) 단호하고 명쾌하게 해결의 길로 들어선 후 경제위기설이 사라지고 경기도 체감할 정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2002년 깊어진 불황의 골에서 잠시 40% 대에 머물던 내각 지지율도 덩달아 눈에 띄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당내 파벌들이 조기 총선 카드를 쓰자는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마지막 총선을 2000년 6월에 치렀으니까 2004년 6월까지는 총선을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총리인 내가 인기가 있고 내각 지지율이 든든할 때 앞당겨 총선을 치러서 자민당 국회의원을 늘리자는 얘기였다.
이 제안도 나는 거부했다. 자민당 의원이 늘어나는 것만으로는 내 개혁 추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였다. 총선과 자민당 승리가 나의 개혁 추진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9월 예정된 자민당 총재부터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나는 우정민영화를 최우선 공약으로 삼았고, 가메이 후보는 우정민영화 저지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61%의 지지로 내가 압승했다.
이 총재선거로 우정민영화가 자민당의 공약으로서 더욱 탄탄히 자리매김된 것이다. 우정민영화 등 ‘고이즈미 개혁’이 자민당의 공약으로 자리잡자마자, 10월에 국회를 해산하고 11월에 총선을 치렀다. 그 총선에서 자민당 국회의원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우정민영화 등을 지지하지 않는 자민당 의원은 줄었지만, 고이즈미 개혁을 지지하는 자민당 의원은 늘어났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내 개혁을 지지하는 의원이 늘어나느냐였다. 자민당 의원이 줄어든 것은 유감이지만, 개혁저항세력이 줄어들었으니 그 총선은 내 바람대로 치러진 셈이었다.
개혁에 동참할 때만 당정일체가 선(善)이다
2005년 9월 우정총선으로 자민당에서 개혁저항세력을 몰아내고 개혁지지세력으로 물갈이를 하기 전까지, 나는 당정일체와 사전승인 관행의 이름으로 나의 개혁추진을 저지하려는 개혁저항세력의 획책과 반발을 단호히 물리쳤다. 자민당에서 나의 개혁법안을 제출하는 것조차 승인해 주지 않겠다고 했을 때 나는 그 사전승인 관행을 무시하고 법안제출을 관철시켰다. 자민당이 당정일체의 관행을 들어 나의 개혁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을 때도, 그 관행 또한 무시해 버렸다. 국민이 선택한 총리의 뜻과 그 통치이념을 여당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는 내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2005년 우정총선으로 자민당을 개혁세력으로 대폭 물갈이 한 후에는, 내각의 자문회의 담당대신과 자민당 집행부가 상호 긴밀한 협조 관계를 구축해 총리의 의지가 그대로 여당의 정책기조에 반영되도록 했다. 명실공히 ‘개혁의 당정일체’를 이룬 것이다. 여당이 ‘고이즈미 개혁’과 뜻을 같이 할 때에만 당정일체가 선(善)인 것이다. <ifs POST>
<순서>
왜 지금 개혁의 리더십인가? 제 1부 제대로 된 잠룡라면 제 2부 대권을 잡고 나면 개혁의 무대는 이렇게 꾸며라 제 3부 모두를 개혁에 동참시켜라 제 4부 논란이 많은 개혁과제를 택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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