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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블 붕괴 후 ‘잃어버린 25년’ 중에 딱 한번 일본경제가 빛을 발한 때가 있었다. 거센 당내 저항을 극복하고 5년 5개월의 총체적 구조개혁으로 일본을 다시 일어서게 한 고이즈미 내각(2001~2006년) 때가 바로 그 때였다. 저성장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개혁 리더십의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의 장래를 자기에게 맡겨달라는 잠룡들에게, 고이즈미가 편지로 전하는 충언을 한번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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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5> 국민에게 ‘무엇을 해 준다’고 하지 말라, ‘자유롭게 하겠다’고 하라
국민의 염원은 정부 도움이 아니라 구조개혁이었다
내가 일본 총리가 된 것은 2001년 4월이었다. 당시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고이즈미 총리 아래 경기가 좋아질까 나빠질까’라는 질문에 ‘좋아 진다’고 답한 국민은 39%로, ‘나빠 진다’는 답과 같은 수준(38%)이었다. 처음부터 국민은 나에게서 ‘정부가 도와 준다’, ‘정부가 나랏돈을 들여 경제를 일으킨다’는 둥 달콤한 걸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국민이 바라고 있던 것은 일본 정치, 여당 자민당, 일본경제, 일본행정 즉 일본의 총체적 환골탈태(換骨奪胎)였다. 그들이 새 지도자로부터 바랐던 것은 정부의 도움, 정부에 의한 경기부양, ‘국민을 섬기는’ 행정이 아니었다. 장기집권에 낭비와 부패에 찌든 구태(舊態)정치, 부실을 털어내지 못하고 정부에 기대어 연명하는 ‘잃어버린 10년’ 불황의 구태경제, 규제와 지원으로 민간 위에 군림하는 구태행정을 타파하라는 것이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부담만 되고, 섬기기 보다 위세 부리기만 몸에 밴 ‘큰 정부’의 족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국민이 절실히 원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그 여론조사에서 71%의 국민은 고이즈미가 ‘국민의 감각에 가까운 정치가’라고 답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내가 변혁에 대한 국민의 염원을 틀리게 읽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나는 잠룡 시절부터 늘, 특히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나설 때면, ‘자민당이 변하지 않으면 자민당을 부순다’는 말로 정치개혁을 주장했고, ‘개혁 없이 성장 없다’ ‘성역 없는 구조개혁’ 등으로 구조개혁을 통한 일본경제 재활을 역설했다. ‘관(官)에서 민(民)으로’ ‘중앙에서 지방으로’의 캐치프레이즈는 ‘큰 정부’의 비대한 행정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오늘 잘 해주겠다’는 말을 입에 담기 보다는, 내일의 활력 있는 일본을 위해 오늘의 구조개혁의 고통을 이겨내자고 했다.
정치·경제·행정 등 일본의 총체적 구조개혁이 고통 부담 없이 추진되리라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국민은 구조개혁 추진이 ‘잃어버린 10년’ 불황을 더 심화 시킬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80% 가까운 지지율로 구조개혁을 줄기차게 외치는 나에게 일본의 변혁과 장래를 맡겼다. 구조개혁에 관한 한 나는 집권 전에 이미 국민과 한 통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큰 정부’의 말로(末路)는 부채 더미 속의 제로 성장
내가 집권하기 전 대부분의 내각 특히 ‘잃어버린 10년’ 불황 속의 자민당 내각은 국민에게 ‘준다’는 약속을 하고 집권하고 연명해 왔다. 일본 내각은 90년대 초부터 10년 넘게, 경기를 부양한다, 지원해 준다, 도와준다, 금리를 낮춰준다, 보호해 준다, 육성해 준다, 균형 발전 시켜준다, 부실은행을 구제해 준다 등 온갖 것을 정부가 해 준다고 약속하면서 집권의 하루하루를 늘려왔다. 민간경제의 자력 재활이나 건전한 나라살림은 기대할 수 없는 정책기조이자 관행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해가 갈수록 또 불황이 깊어질수록 민간부문과 지방이 더욱 중앙정부의 ‘따듯한 손길’을 기대하게 되고 기업도 근로자도, 제조업도 은행도, 도시도 지방도 정부에 의존하게 되었다. 규제 강화와 재정적자 누증은 멈출 줄 몰랐다. 나의 내각이 들어설 즈음, 국가부채는 전체 경제(GDP 기준)의 1.5배를 넘어서고 있었지만 성장률은 제로 수준에서 헤매고 있었다.
나는 자랑스런 ‘신(新)자유주의’자다
90년대 내각의 정책 기조와는 대조적으로, 나는 1995년에 자민당 총재선거에 후보로 처음 나설 때부터, 국민이나 지방 또는 민간이나 특정 부문에게 무엇을 ‘(해) 준다’는 사탕발림 약속을 한 적이 없다. 내가 집권하면 자민당과 일본 정치를 바꾸고 정부와 민간의 구조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집권 구상을 줄기차게 주장했지, 정부가 국민이든 기업이든 누구에게 무엇을 (해) 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도 정치인이다. 국민에게, 지방에, 기업에, 무엇을 해주거나 도와준다는 약속이 정치적 지지기반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몸소 체험해 온 바였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사탕발림이 더 큰 효험을 발휘한다는 것은 정치를 하지 않는 일반인도 능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10년’ 불황 속에서 ‘작은 정부’ 공약에 집착했던 것은, 포퓰리즘이 일본과 그 경제를 더욱 깊은 불황의 수렁으로 빠트릴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점을 국민에게 알리고 이해를 구하면 국민이 ‘개혁 정치인’ 고이즈미의 충정을 언젠가 알아주고 나에게 나라를 맡겨 줄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국민에게 ‘해 주겠다’고 한 것은 ‘편하게 또 자유롭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첫째, 공기업 민영화 등 공공개혁을 추진하고 재정지출을 극력 억제하고 거기서 도출되는 자금과 인력 등 경제자원을 민간 부문으로 돌리겠다고 했다.
둘째, 공공부문과 그 지출의 감축을 통해 재정을 건전하게 하여 국민의 조세부담을 덜어주겠다고 했다.
셋째, 규제개혁과 개방으로 민간부문과 시장을 규제와 무역장벽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했다.
한마디로 나는 정부 지원에 대한 의존의 족쇄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민간부문이 자유로운 시장경제 체제 안에서 스스로 일어나 활력을 되찾도록 하겠다고 한 것이다. (나의 비판자가 즐겨 쓰는 표현을 기꺼이 빌리자면) 일본에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내지 ‘작은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총리 나 자신의 비전이자 포부였다. <ifs POST>
<순서> 왜 지금 개혁의 리더십인가?
제 1부 제대로 된 잠룡이라면
제 2부 대권을 잡고 나면: 개혁의 무대는 이렇게 꾸며라
제 3부 모두를 개혁에 동참시켜라
제 4부 논란이 많은 개혁과제를 택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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