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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모이니핸과 닉슨 대통령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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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6월04일 13시40분

작성자

  • 이상돈
  •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20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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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부터 2001년 초까지 24년 동안 뉴욕 주를 대표해서 4선 상원의원을 지낸 패트릭 모이니핸(Daniel Patrick Moynihan 1927~2003)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인이자 지식인이었다. 진보성향의 민주당원이지만 케네디/존슨 행정부의 방만한 복지 정책과 도시 정책이 실패했다고 설파하면서 닉슨 대통령의 백악관에서 보좌관을 지낸 모이니핸은 그 후 주 인도 대사와 주 유엔 대사를 지냈고, 1976년 선거에서 뉴욕에서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후 4선을 지내고 2001년 초에 은퇴했다. 모이니핸이 은퇴한 상원의원 자리를 채운 사람이 힐러리 클린턴이다.

 

모이니핸은 이처럼 화려한 공직 생활을 했는데, 모이니핸이 성장하게 된 계기는 닉슨 대통령과의 만남이었다. 보수적인 공화당 대통령 닉슨과 민주당원이며 진보적 사회학자인 모이니핸의 만남은 닉슨 대통령 임기 중에 있었던 특기할 만한 사건이었다. 모이니핸은 자기 생각을 실현시키기 위해 닉슨을 필요로 했고 닉슨은 그러한 모이니핸을 좋아했다는 사실은 리차드 닉슨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아일랜드계(系)로 키가 크고 항상 나비 넥타이와 정장 차림의 멋쟁이였던 모이니핸이었지만 그는 뉴욕 맨해튼의 노동자 계층 구역에서 어렵게 성장했다. 어릴 때 그는 신문배달도 하고 42번가 유흥가에서 구두를 닦으면서 돈을 벌었다. 총명한 모이니핸은 학비가 무료라서 ‘가난한 사람들의 하버드’라고 불리던 뉴욕시립대학(CUNY)에 입학했다. 해군에 입대한 후 터프츠 (Tufts Univ.) 대학의 해군 ROTC로 선발돼서 졸업한 후에 해군 장교가 됐다. 전역 후에 다시 터프츠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외교학 석사 학위를 획득했다. 외교관이 되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자 다시 터프츠 대학에서 국제노동기구(ILO)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애버럴 해리먼 뉴욕 주지사의 스피치 라이터를 지내고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1960년 대선 때 케네디를 지지하는 운동을 한 모이니핸은 케네디 행정부가 발족하자 아서 골드버그(Arthur Goldberg 1908~1990) 노동장관의 보좌관을 지냈다. 케네디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던 골드버그 장관은 젊은 모이니핸을 총애했는데, 골드버그가 대법관이 된 후에 모이니핸은 정책개발 담당 차관보를 지냈다. 1965년에 노동부를 사직한 모이니핸은 뉴욕시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얻어서 도시 문제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1968년 대선을 앞두고 모이니핸은 로버트 케네디를 도왔으나 로버트 케네디는 그 해 6월 암살되고 만다.

 

모이니핸이 노동부 차관보로 있을 때인 1965년 8월, 그가 작성한 ‘흑인 가정’(The Negro Family: The Case For National Action)이라는 내부 보고서가 언론에 누출돼서 파문을 일으켰다. 모이니핸은 도시 빈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흑인의 빈곤 문제의 근원을 논하면서 흑인들이 갖고 있는 특유한 사회적 병리 현상을 지적했다. 이 보고서가 알려지자 흑인 사회는 벌컥 뒤집혔다. 흑인 단체들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발상이라면서 모이니핸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모이니핸의 이 보고서는 아무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었던 흑인 문제를 솔직하게 언급해서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1968년 11월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닉슨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물들로 내각을 구성해서 12월 11일에 일괄적으로 발표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지낸 윌리엄 로저스를 국무장관에, 대선 캠프를 책임졌던 존 미첼을 법무장관으로, 선거 재정을 책임졌던 모리스 스탠스를 상무장관으로, 그리고 자신의 오랜 친구이며 캘리포니아 부지사를 지낸 로버트 핀치를 보건교육복지장관으로 내정했다. 닉슨은 주지사 출신인 월터 히켈, 조지 롬니, 존 볼프를 내무장관, 주택도시장관, 교통장관으로 각각 지명했다. 노동장관에는 노사 문제 협상가로 알려진 시카고 대학 경영대학원장 조지 슐츠를 내정했다. (조지 슐츠는 레이건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오래 지내게 된다.) 

 

닉슨은 소련에 대한 강경론자인 민주당 상원의원 헨리 잭슨에게 국방장관을 제의했으나 대통령의 꿈이 있던 잭슨 의원은 거절했다. 그러자 닉슨은 제럴드 포드와 함께 1964년 선거 후 공화당 쇄신 운동에 앞장섰던 멜빈 레어드 하원의원을 국방장관으로 지명했다.

헨리 키신저를 안보보좌관으로 임명한 닉슨은 아이젠하워 백악관에서 경제자문위 의장을 지낸 컬럼비아 대학 경제학교수 아서 번스를 각료급 백악관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닉슨은 번스를 1년 후에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으로 임명할 생각이었다. 

 

닉슨은 민주당 인사를 참여시켜 통합적인 정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고, 이런 가운데 민주당원이며 하버드 교수인 사회학자 패트릭 모이니핸을 닉슨 행정부에 참여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닉슨은 모이니핸을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가 발표한 보고서와 연설문을 통해서 모이니핸에 대해 알고 있었다.

 

닉슨의 참모가 모이니핸을 만나서 닉슨 행정부에 참여할 의사를 물어보았더니 도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모이니핸은 교통장관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내각은 이미 자리가 찼기 때문에 백악관 보좌관을 하면서 도시문제를 다루어 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자 모이니핸은 흔쾌하게 동의했다. 모이니핸은 하버드로부터 2년간 휴직을 얻어서 백악관 지하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도시문제 위원회(Urban Affair Council)를 주관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2년 동안 보수적인 공화당 대통령과 진보적인 민주당원 사회학자와의 흥미로운 동거(同居)가 이루어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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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닉슨 대통령과 모이니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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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대선에서 닉슨은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 복지 프로그램이 재앙적이라면서 자기는 이것을 개혁하겠다고 약속했다. 존슨의 ‘위대한 사회’라는 복지 정책은 불과 몇 년 만에 부작용이 심각함이 드러났다.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부터 시작된 후 존슨이 의욕적으로 확대시킨 공공주택은 게토로 전락했고, 여성이 홀로 자녀를 부양하는 가정에 지급하는 수당(AFDC)는 가족 해체와 비혼(非婚) 자녀 출생을 조장하는 등 문제가 심각했다. 

 

원래는 일하는 빈곤한 가정을 돕고자 했던 AFDC는 가장이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자에게 아이 숫자대로 수당을 주기 때문에 흑인 가정이 해체되는 부작용을 초래했고 이에 소요되는 예산이 연간 60억 달러에 달했다. 또한 뉴욕 같은 부유한 동북부 주(州)가 자체적으로 복지 혜택을 늘리자 가난한 남부 주(州)로부터 흑인들이 동북부 도시로 대거 이주해서 도시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 복지 급여가 빈민을 흡입하는 효과를 가져 왔으며 그로 인해 동북부 대도시는 인종 갈등이 심화되는 등 부작용이 심각했다.  

 

국내 정책은 각료와 참모들이 협의해서 결정하면 된다고 생각한 닉슨은 도시와 복지 문제를 백악관 도시문제위원회에서 토론하도록 했다. 이 위원회를 주관한 패트릭 모이니핸은 문제가 많은 AFDC를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이니핸은 일을 하면서도 가난한 가정에도 연간 1600 달러 소득을 보장해서 부족한 액수를 연방정부가 보전해 주는 일종의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하려고 했다. 밀튼 프리드먼이 제안했던 네거티브 소득세와 비슷한 발상이었다.

 

하지만 컬럼비아 대학 경제학 교수 출신인 아서 번스(Arthur  Burns 1904~1987) 보좌관은 이런 발상에 반대했다. 균형 재정론자인 보수 경제학자 아서 번스는 닉슨을 자주 만나서 이에 대한 반대 의사를 전달했다. 닉슨과 가까운 모리스 스탠스 상무장관도 모이니핸의 발상은 근로의욕을 저하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부정적 의견을 냈다. 각료 중에는 로버트 핀치 보건교육복지부 장관만 모이니핸에 동조했다. 팽팽한 토론 끝에 조지 슐츠(George Shultz 1920~2021) 노동장관이 구직을 하거나 직업교육을 받아야 가족수당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런 논의 끝에 닉슨은 ‘가정 지원 플랜’(Family Assistance Plan : FAP) 구상을 1969년 8월 8일 직접 발표했다.

 

닉슨 대통령의 최초 국내 정책 제안인 FAP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백인 저임금 노동자들은 물론 찬성했고 남부 흑인들도 찬성했지만 북동부 흑인들은 복지 수당이 삭감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런 내용을 담은 법안은 1970년 4월에 하원을 무난하게 통과했으나 상원에서 심의하는 동안에 많은 반대에 봉착했고, 결국 상원은 더 이상 다루지 않기로 해서 무산되고 말았다. 기업을 대변하는 월스트리트저널은 물론이고, 흑인과 빈민을 대변하는 진보 세력이 모두 반대했기 때문에 좌초한 것이다. 결국 닉슨의 FAP 구상은 실패로 돌아갔고, 기존의 AFDC는 그대로 유지됐다. (문제가 많은 AFDC는 레이건 대통령이 1980년 대선에서 이슈화했으나 임기 중 개혁을 하지는 못했고, 노동 요소를 가미한 복지 개혁은 클린턴 행정부에서 비로소 이루어 졌다. 클린턴의 복지 개혁은 1969년 닉슨 구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닉슨 대통령 임기 첫 1년 동안 모이니핸은 헨리 키신저와 함께 언론으로부터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다. 풍부한 지식과 번득이는 위트로 모이니핸은 언론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언론은 당시 미국의 2대 문제였던 베트남 전쟁은 키신저가, 그리고 도시와 빈곤 문제는 모이니핸이 끌고 간다고 쓰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 들어서 토론이 많던 백악관 분위기는 바뀌었다. 모이니핸의 토론 상대였던 아서 번스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되어 백악관을 떠났다. 그 후 1년 간 모이니핸은 외부 강연과 토론 등으로 닉슨 행정부의 정책과 관련 없이 여러 사회 경제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파하는데 시간을 썼고, 닉슨 대통령은 모이니핸의 그런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모이니핸은 닉슨 백악관을 대표하는 학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비록 소속 정당은 달랐지만 닉슨과 모이니핸은 성장과정에서 공통점이 많았다. 남부 캘리포니아 시골에서 닉슨의 아버지는 열심히 일했지만 가난했다. 맨해튼의 헬스 키친이란 열악한 지역에서 모이니핸의 어머니도 열심히 일했지만 가난했다. 닉슨과 모이니핸은 열심히 일하지만 그래도 가난한 가정에게 정부가 지원을 해야 그런 가정에서 자라는 자기들 같은 아이들이 잘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두 사람은 일하지 않고 정부 돈을 타먹는 AFDC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1970년 들어서 닉슨은 순차적으로 개각을 했다. 닉슨은 자신과 오랫동안 교분이 있었던 로버트 핀치가 보건교육복지장관으로 부족하다고 보고 백악관 보좌관으로 불러들이고 국무차관보이던 매사추세츠 출신인 엘리옷 리차드슨(Elliot Richardson 1920~1999)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닉슨은 베트남 전쟁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월터 히켈 내무장관을 파면했다. 또한 닉슨은 재무장관 데이비드 케네디가 역부족이라고 생각해서 나토 대사로 내보내고 텍사스 주지사를 지낸 존 코널리(John Connally 1917~1993)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 민주당원인 코널리는 케네디 대통령이 댈러스에서 암살당할 때 같이 차에 타고 있었다. 닉슨은 1972년 대선에서 텍사스 주를 생각하고 그를 영입한 것이다.

 

1971년 초, 모이니핸은 하버드로 돌아가기 위해 닉슨에게 사의를 표했다. 당시 유엔 주재 대사를 교체하려 했던 닉슨은 모이니핸에게 유엔 주재 대사직을 제의했지만 모이니핸은 사양했다. 모이니핸은  2년 동안 그의 가족은 하버드 대학 근처 집에 살고 자기는 워싱턴에서 사는 두 집 살림을 해서 거의 파산 상태라면서 더 이상 보스턴 집을 떠나서 살 수 없기 때문에 하버드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한편, 닉슨은 1970년 상원의원 선거에 나가서 낙선한 조지 H. W. 부시에게 적절한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했다. 존 코널리도 1968년 대선에서 텍사스에서 닉슨을 위해 선거 운동을 열심히 한 부시를 챙기라고 닉슨에게 부탁했다. 닉슨은 부시를 유엔 주재 대사로 임명했다. 부시는 포드 행정부에서 주 중국 대표부 대사와 CIA 국장을 지내게 된다. 돌이켜 보면, 부시가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데는 이 때 유엔 주재 대사로 발탁된 것이 계기였다.  

 

모이니핸이 하버드로 돌아가고 2년이 지난 1973년 초, 닉슨은 모이니핸에게 인도 주재 대사를 제안했고 모이니핸은 이를 받아드렸다. 닉슨이 사임하고 난 후에도 대사로서 머물렀던 모이니핸을 포드 대통령은 유엔 주재 대사로 임명했다. 7개월 동안의 유엔 주재 대사로 있는 동안 모이니핸은 시오니즘(Zionism)을 인종주의로 규정하는 결의를 통과시키려는 제3세계 국가들과 맞서 싸워서 언론에서 유명해 졌다.

 

1976년 들어서 모이니핸은 대사직을 사임하고 뉴욕에 자리 잡고 상원의원 선거를 준비했다. 현직인 제임스 버클리 상원의원이 보수당/공화당 후보로 본선에 나오는 것이 분명했으나 민주당은 후보가 난립한 상태였다. 벨라 압주그 하원의원 등 여러 명이 민주당 프라이머리에 나왔고 그 중 압주그 의원이 앞섰지만 페미니스트인 그녀는 너무 진보적이어서 본선이 위태롭다고 생각됐다. 이런 상황에서 모이니핸이 민주당 후보 경선에 뛰어들자 지명도에 앞서고 중도층 유권자를 흡수할 수 있는 모이니핸이 승기를 잡아서 민주당 후보가 됐다.

 

모이니핸은 아일랜드계인데다가 유엔 주재 대사를 하면서 유태인을 위해서 제3세계와 싸웠기 때문에 뉴욕에 많은 아일랜드계와 유태계 표는 모이니핸의 것이었다. 본선에서도 모이니핸은 제임스 버클리를 여유 있게 누르고 당선됐다. 모이니핸은 그 후 24년간 상원의원으로 있으면서 당파에 치우치지 않은, ‘미국 의회의 살아있는 지성’으로 활약했다. 2003년 3월, 모이니핸은 76세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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