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경제학 여정 <23> 일본을 알자 ; 히도스바시(一橋)대학 객원교수로.​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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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6월04일 17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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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sing Sun!

1980년대, 세계는 일본 경제를 이렇게 불렀다.

 

일본의 도요타 승용차가 미국 도로를 누볐고, 일본의 소니 가전제품들이 미국 가정의 부엌과 거실을 채웠다. 일본 투자자들이 뉴욕의 초고층 빌딩들을 매수했고, 할리우드의 주요 영화 제작사들이 일본인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은 손에 깃발을 든 일본인 관광객들로 붐볐고, 파리의 패션가는 일본 여성들이 누볐다. 런던의 해러즈(Harrods) 백화점은 일본인 고객으로 가득했고 로마의 트레비스(Trevis) 분수는 일본 동전으로 넘쳤다.

 

2차대전 패배로 폐허가 된 나라의 경제가 어떻게 이런 성공을 거두게 됐을까?

 

1986년 여름, 하와이의 E.W.C.에서 한일 경제학자들이 모여 일본 경제의 성공 스토리에 관해서 세미나를 한 적이 있다. 나는 그 세미나 토론장에서  야마자와 이빼이​(山澤 一平​)교수를 만났다. 1979년 이래 나와 교유(交遊)가 있었던 일본 히도스바시 대학 경제학부 교수였다.

 

그는 나에게 “일본으로 와서 일본 경제를 연구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자기가 있는 대학의 경제학과에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는 호의와 함께.

 

나는 1987년 9월부터 1년간 안식년(安息年)을 가질 수 있었다. 대학에서의 안식년이란 1년간의 유급 휴가를 의미했다. 안식년을 미국보다 일본에서 지내는 것이 더 좋을까? 귀국해서 주위 교수들과 의견을 나눈 뒤 일본행을 결정했다.

 

1987년 여름 나는 일본 재단(Japan Foundation)의 Fellow Grant( 여행비, 생활비 제공)를 받아 히도스바시 대학 경제과의 한 교수실에 자리 잡았다. 일본 경제를, 특히 일본의 산업을 알고 싶었다.

 

구니다찌(國立)역은 도쿄역에서 40분 정도 걸리는 지하철 역이다. 이 역을 나서면 우람한 벚꽃 가로수가 둘러싼 4차선 대로가 뻗어있고, 그 길을 따라 10여 분 걸으면 히도스바시 대학 캠퍼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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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히도스바시 대학 입구에서.>

 

내가 숙소로 구한 집은 캠퍼스에 붙어 있었다. 이 집에서 일본인들의 절약과 공동체 정신을 실감했다.

 

나는 일본식 단무지를 대량 구입해 냉장고에 방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날, 이 집 주인 할머니가 냉장고를 살펴보더니, “단무지가 너무 많은데, 남겨두려면 나에게 달라”고 하셨다.

 

이 분은 내가 빌린 것과 같은 집을 8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절약 정신이 몸에 배어 있었다. 난 내심 놀랐고, 나를 되돌아보았다.

 

내가 사는 주택가의 주민들은 매주 일정한 날 아침에 모두 대형 쓰레기 봉지를 들고 골목을 나와 대로변의 지정된 장소로 옮겨 놓았다. 쓰레기 수거차는 좁은 길에 들어오지 않고 대로에서 신속하게 쓰레기 수거 작업을 했다. 일본의 뒷골목이 깨끗한 이유를 알았다. 이웃과 쓰레기 수거 작업자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돋보였다.

 

히도스바시 캠퍼스는 아름다웠고 나의 교수실은 적막(寂寞)했다. 나는 야마자와 교수의 도움으로 경제학부 몇몇 교수들과 친교를 맺고 그들의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일본을 알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일본 사회엔 다양한 벤교까이(勉强會)가 있었다. 다양한 목적의 공부 모임이었다. 소수가 모여 서로의 관심 사항에 관한 지식과 의견을 나누는 이런 모임은 대학 내는 물론 대학 외에도 많았다. 나도 이런 모임 몇 군데에 가입하였다.

 

 도쿄에 있는 아시아경제연구소( Institute of Developing Economies)는 풍부한 자료를 보유한 도서실과 연구역량이 축적된 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야마자와 교수의 도움으로 이곳의 자료에 쉽게 접근하고, 이곳의 연구자들과 자주 만나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특히 이곳에서 열리는 다양한 주제의 세미나에는 전문가와 교수는 물론 일본 정부 관료, 기업인들도 참여했기 때문에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경제연구센터, 노무라종합연구소 등도 일본 경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풍부한 연구 자료와 경험이 축적된 연구 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필요할 경우, 이들 연구 기관들을 방문하여 자료를 보고, 관련 연구자들과 토론을 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구니다치와 도쿄, 도쿄시 내에서의 이동은 모두 지하철을 활용했다. 당시 도쿄의 지하철망은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어 매우 편리했다. 그러나 요금이 저렴하진 않았다.

 

일본인들은 다양한 마쓰리(祭り) 놀이 문화를 즐겼다. 각 지역마다 지역 특성을 나타내는 마쓰리들이 펼쳐졌다. 구니다치에서는 벚꽃 마쓰리가 제일 인상적이었다. 나도 동료들과 어울려 캠퍼스 벚꽂 나무 밑에 돗자리 깔고 둘러앉아 사케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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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일본의 한 마쓰리에서.>

 

이 시기에 한국인으로서 특이한 경험은 은행원이 나의 집에 찾아와 은행 돈을 빌려갈 것을 권유했던 일이었다. 한국에서는 은행 돈 빌리기가 어려웠는데, 은행원이 집까지 찾아와 돈을 빌려 가라고 하다니! 일본은 이미 국내 저축이 투자를 초과하는 나라였다. 그래서 해외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었다.

 

나는 이 시기에 일본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공동체 중심주의로 인식했다. 개인들은 자기가 속한 조직, 지역,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할 수 있다는 의식구조를 갖고 있는 것으로 느꼈다. 미국이나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의 개인주의 이데올로기와는 달랐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전국시대(戰國時代)와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가문(家門)중심 공동체의식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거치면서 국가공동체 중심으로 발전되어온 결과로 보여졌다.

 

이런 사회적 의식구조는 1868년에 도꾸가와 가문을 무너뜨리고 메이지(明治)천황을 앞세운 엘리트 사무라이들이 그들이 전통적으로 누려왔던 특권들을 포기하는 개혁을 함으로서 공고해졌다.

 

이러한 공동체 중심주의 이데올로기의 토양(土壤)에 메이지유신을 통한 선진 제도와 기술 도입이 뿌리를 내려 매우 효율적인 사회적 생산 체제(Social Production System)가 자리 잡았다.

 

이런 역사적 흐름을 거쳐 1980년대에 일본 경제는 강한 제조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미국 등 세계시장을 누비게 되었다. 그 강한 경쟁력은 빠른 선진 기술 도입·모방과 숙련노동자들의 높은 노동 생산성으로 가능했다.

 

그러나 공동체 중심주의는 어두운 그림자도 안고 있었다. 정부의 민간 활동에 대한 개입이 강했고, 조직문화가 경직적이었다. 민간이나 개인이 자율에 의한 창의력을 발휘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여건이 조성되어 있는 셈이었다. 이런 특성은 표준화된 제품의 경쟁력 강화엔 도움이 되겠지만, 차별화된 고성능 첨단 기술제품과 서비스에는 장애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1988년 8월 1년간의 히도스바시 캠퍼스 생활을 마치고 서강대의 노고산 언덕으로 돌아왔다. 히도시바스 대학에서 큰 도움을 주신 야마자와 교수의 강녕(康寧)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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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7년 가을, 일본 황궁의 정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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