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경제학 여정(旅程) <20> 백골 부대, 그리고 서강 학보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2년05월14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2년05월14일 12시10분

작성자

  • 김광두
  • 국가미래연구원 원장, 남덕우기념사업회 회장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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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학생들 때리지 말아요!”

“넌 뭐야?”

 

백골 부대라 불리는 데모 진압 경찰들이 학내로 들어왔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팼다. 심지어 도서관에까지 진입해서 학생들을 붙잡았다. 그들은 머리에 하얀색 철모를 쓰고 있었다.

 

나는 이들에게 항의했다. 그 와중에 나와 백골 부대 경찰 사이에 시비가 붙은 것이었다. 그들 몇 명이 나를 에워싸고 폭력을 행사하려 했다. 그 순간 학생들이 몰려와 나를 방어하려 했다.

 

“야! 그 사람은 교수야. 손대지 마!”

 

지휘관인 듯한 사람이 뒤에서 소리쳤다. 그 지휘관은 유일하게 UCLA라는 문자가 인쇄된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때 내가 경찰들에게 폭행을 당했다면 상황이 어떻게 되었을까?

 

서강대 경제과 교수로 부임한 1981년 가을의 캠퍼스는 학생들의 시위로 평화롭지 못했다. 경찰들의 시위에 대한 자세도 매우 거칠었다. 1960년대 후반의 한일회담 반대 시위 당시, 경찰은 학내엔 진입하지 않았었다. 더욱이 대학의 도서관은 학교의 성지(聖地)였다. 그런데 81년엔 시위 진압 경찰이 도서관까지 학생을 잡으러 들어왔다.

 

이런 분위기에서 강의가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어려웠다. 강의실 분위기도 차분하지 못했다. 학생들이 시국에 관한 질문을 할 때 난처했다. 학생들의 정의감을 존중해야 했지만, 자칫 학생들이 일신상 피해를 입는 상황에 대한 우려도 해야 했다. 대학생 때, 시위에 나서는 우리를 막아서는 교수들이 원망스러웠었다. 그런데 내가 교수가 되어 비슷한 상황에 처해보니 학생들의 장래에 대한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모교에서의 첫 학기에 나는 경제학 원론, 미시경제학, 국제경제학 등 3과목을 가르쳤다. 당시엔 3과목, 주당 9시간 강의가 교수에게 주어진 기본 의무였다. 강의 요일과 시간은 교수의 선호에 따라 배정되었다. 나는 월, 수, 금을 택했다. 시간은 오전 시간이 좋았다.

 

나머지 시간엔 산업연구원과 KDI의 연구에 참여했다. 1982년 나는 “기술이전의 비용과 적정성”에 관한 연구보고서를 출간했다. 그 후(83년? 84년?) 나는 프랑스 여행길에 “The Cost and Appropriateness of Technology Transfer”라는 영문 버전으로 프랑스 파리 10 대학에서 이 내용을 학생들에게 강의했다.

 

나는 강의를 수강생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쉽게 하려고 노력했다.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사례들과 용어를 최대한 활용하여 경제이론의 이해를 도우려고 노력했다. 특히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에 관하여는 상황이 주어질 때마다 설명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경제행위뿐 아니라 개인, 조직, 국가 모두는 끊임없이 선택에 부딪히고, 그 판단의 합리적 기준은 기회비용이기 때문이었다.

 

9시 출근, 6시 퇴근. 이것이 연구원 생활이었다. 이런 얽매인 생활 패턴에 비해 대학 교수로서의 일상은 매우 자유로웠다. 월급은 절반 정도로 줄었고, 제공받은 아파트도 연구원 퇴직과 함께 비웠다. 물질적으로 불편해진 것을 “자유”로 보상받은 셈이었다. 12월 중순이 되자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기말시험 채점 등을 끝내고 두 달 정도의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1982년 봄학기였다. 학생들의 시위는 여전했다. 그런데 학교 본부에서 나에게 서강대 학생들이 편집·발행하는 서강학보사 주간 교수를 맡아 달라 했다. 당시 서강학보사는 소위 “운동권”의 본산이었다. 주간 교수는 감독관이었다.

 

“나는 여러분들의 정의감을 존중한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미래가 어두워지는 것도 방관 할 수는 없다.”

 

내가 학보사 편집장과 기자들을 만나 나누었던 대화의 요지였다. 당시의 편집장은 경제과 학생인 우찬제 (현재 서강대 국문과 교수)였다. 그러나 그들과 나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XXX는 죽일 놈!”

 

서강 학보 인쇄소 벽에 쓰여진 낙서였다. 그 ‘XXX’는 바로 나였다.

나는 “표현의 기법”을 강조했고, 그들은 직설적 표현을 좋아했다.

거기가 충돌 지점이었다.

 

당시 정부 당국은 대학언론을 검열했다. 기사의 내용이나 표현이 일정 수위를 넘으면 기자를 징계할 것을 학교 당국에 요구하거나 직접 해당 학생기자를 연행하기도 했다. 징계 받거나 연행당한 학생은 취업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해외 유학 절차를 밟을 때도 이런 기록을 가진 학생들은 어려움에 봉착했다.

 

편집장이었던 우찬제는 경제학도의 합리성과 젊은이로서의 정의감을 바탕으로 편집에 임했다. 기사의 배분에 있어서는 합리성이, 기사 내용에는 정의감이 배어 있었다. 나와 그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나를 “기득권자”로 보았고, 나는 그를 “표현 기법이 미흡한” 젊은이로 보았었다고 회고한다. 우찬제는 국문학으로 전공을 바꿔 대학원에 진학하여 문학 작품들에 나타난 “돈(MONEY)의 의미”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나는 1982년 가을학기에 부교수 발령을 받았다. 연구원에서의 경력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그리고 서강학보사 주간이라는 보직도 벗어났다. 당시엔 조교수로 임명되면 자동으로 정년이 보장되는 관행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부교수”는 역시 “조교수”보다는 기분 좋은 호칭이었다.

 

1960년대 후반의 서강대 경제과는 독보적이었다. 미국 등지에서 학위를 끝낸 교수들이 집단으로 모여 있었고 교육 방법이 소수 정예(精銳)주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두환 정부가 서강대에 입학생 대폭 증원을 요구한 결과 82년 당시엔 소수 정예 교육이 어려워졌다. 또한 해외에서 학위를 받은 경제학자들이 속속 귀국함에 따라 주요 대학의 경제과 교수들의 구성이 비슷해졌다.

 

그러나 “서강학파”로서의 자부심과 자유 시장경제 체제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하는 학풍은 도도(滔滔)히 흐르고 있었다. 나는 모교에서 교수로 활동하게 된 것도, 서강학파의 일원이 된 것도 행운으로 생각했다. 나를 받아준 박대위 교수, 김정세(金貞世) 교수, 김병주 교수, 조성환 교수, 이효구 교수 등의 당시 경제학과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당시에 김종인 교수는 휴직 중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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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석사 졸업생들과 함께. 1982년. 졸업 가운을 입은 학생들 사이에 좌측부터 김정세, 김병주, 이효구 교수,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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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서강대에서 처음으로 지도한 석사 학생들과 함께. 좌측부터 기 홍(전 대상기획 대표이사), 송종국(전 과학기술정책연구원장), 필자, 김원식(건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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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22년05월14일 12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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