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경제학 여정(旅程) <19> 석유파동, 박정희 대통령 서거, 경기침체​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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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5월07일 17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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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월, 정재석 원장이 경제기획원 차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경제기획원 창립의 아이디어 맨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브리핑의 명수(名手)였다. 그는 경제기획원 초대 경제기획국장을 맡아 경제기획원의 초석(礎石)을 쌓았다. 그가 그의 고향으로 복귀한 셈이었다.

 

그는 예리하고 깐깐한 완벽주의자 스타일이었지만 인간적으로 따뜻한 사람이었다.

 

“야 이 거지야!”

 

그가 즐겨 쓰는 말이었다. 처음 듣기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말에 애정(愛情)이 배어있었다. 자기가 아끼는 사람에게 주로 이 말을 내뱉는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거지들이 여기 모여있다고 전해주세요.”

“네?”

 

1994년 봄, 삼성동 무역회관 중식당에서 나와 식당 종업원 간에 있었던 대화다. 옆방에 정재석 경제부총리가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메모 쪽지를 종업원에게 건너 주면서 한 얘기였다.

 

“야, 이 거지들 다 모였네!”

곧 나타난 정 부총리의 반가워하는 외침이었다.

 

그는 시장경제 메카니즘의 효율성을 믿는 경제관료이기도 했다. 그는 1993년 12월 경제부총리에 취임하면서 물가안정 정책의 기본 방향으로 규제개혁과 가격자유화를 제시했다. 포퓰리즘의 굴레에 갇힌, 선거에 의해 선출된 정부에서 파격적인 정책이었다. 이런 기본 방향은 중장기적으로는 물가안정의 구조를 구축하겠지만 단기적으로는 물가 불안을 조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79년 당시 한국경제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1973년의 1차 석유파동으로 70년대 전반(全般)에 걸쳐 세계 경제가 침체 국면에 있었고, 한국은 1973년 이후 그 회임(懷妊)기간이 긴 중화학공업 투자에 집중하였기 때문이었다.

 

원유 가격이 4배로 급등한 1차 석유파동은 한국 건설업체들의 중동 진출로 어느 정도 선방(善防)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9년의 2차 석유파동 시에는 상황이 달랐다. 그동안 국내 저축의 한계로 막대한 중화학공업 투자 소요 자금의 상당한 부분을 해외 차입으로 메꾸었다. 또한 관련 시설재, 중간재 등의 수입으로 무역수지의 적자가 확대되었다. 여기에 유가 폭등이라는 악재가 겹친 것이었다.

 

투자 자원을 수출 주종 산업이었던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급격히 이동시킴으로서 경공업의 경쟁력이 약화 되었다. 그 결과 수출 증가율도 낮아졌다. 중화학공업의 특성상 그 투자 성과가 아직 나타나지 못하여 수출시장에서의 경공업 제품들의 빈틈을 중화공 제품들이 메꾸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다중의 악재들로 인하여 성장률 하락, 물가상승, 경상수지 적자 확대, 외채증대, 외환 보유고 감소 등의 경제적 어려움이 겹치게 되었다. 한국은 저성장, 고물가, 외화 부족의 3중고를 해결해야 했다. 한국경제 성장률은 78년의 9.7%에서 79년에는 6.5%, 80년에는 –5.2%로 급속히 하락했다. 물가상승률은 78년에는 11.7%였으나 79년엔 18.8%, 80년엔 38.9%로 급상승했다. 경상수지 적자는 78년의 10.9억 달러에서 79년엔 41.5억 달러, 80년엔 53.2억 달러로 확대되었고, 그 결과 외채는 78년의 148억 달러에서 79년엔 204억 달러, 80년엔 273억 달러로 폭증했다. 

 

1977년 한국은 100억 달러, 80년엔 172억 달러 규모의 수출을 하는 국가였다. 80년 현재 한국은 세계 4대 외채 국가 중 하나였다.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에 이어 4위였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외채는 한국과 비슷한 280억 달러였다. 1980년 당시 한국의 공적 외환보유액은 29.6억 달러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국내 정치도 혼란에 빠졌다. 국가 경제의 어려움과 정치적 격변으로 내가 일했던 국제경제연구원도 여러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런 흐름의 와중(渦中)에 고 정소영(鄭韶永)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이 2대 국제경제연구원 원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60년대 후반 미 위스컨신 대학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고 박정희 정부에 참여하여 1969년부터 73년까지 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박 대통령을 보좌한 후 75년까지 농수산부 장관을 지냈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추진력은 놀라웠다. 부임하자마자 연구원의 봉급을 40% 대폭 인상했다. 국내 최고 대우를 해줄 테니 연구에 더욱 진력해달라는 취지였다.그의 자존심 또한 대단했다. 그는 박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이룬 성과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경제를 높은 산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 보는 넓은 눈으로 보라는 조언을 자주 했다. 그는 겉으로는 매우 강했지만 내면은 여렸다. 미흡한 연구 결과물에 대해서는 매섭게 질책하였지만, 사후적으로 해당 연구자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는 클라식 음악 애호가이기도 했다. 그의 집에 음악실을 마련해서 음악을 즐겼다.

 

나는 79년부터 산업연구와 기술혁신연구를 병행하면서 정부의 주문 사항에 관한 단기 보고서 작성과 나의 관심 주제에 관한 독립연구를 하고 있었다. 정재석 차관이 지휘하는 경제기획원 직원들의 부탁으로 가끔 거시경제에 관한 짧은 연구도 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신군부의 무력에 의해서 진압된 후, 1980년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전두환)가 설치되면서 국보위에서 연구원들의 실태조사를 했다. 국제경제연구원을 방문한 조사팀장은 EWC 장학생으로 함께 수학(修學)했던 최상진 박사(정치학, 당시 육사 교관)였다. “세상은 좁다”라는 속언을 실감했다.

 

국보위 발 국가 출연연구원들의 구조조정설이 나돌면서 1981년 상반기에 정소영 원장이 사퇴하고, KDI의 김만제 원장이 국제경제연구원장을 겸임했다. 나는 80년 겨울, 서강대 경제과에서 제안을 받아 81년 가을학기부터 서강대로 가기로 했다. 대학 입학 당시부터의 열망이 이루어졌다.

 

1980년 말, 이 변화의 와중에 나는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술혁신연구”라는 연구보고서를 책으로 출간했다. 기술 요소가 상품, 산업, 국가경쟁력의 핵심 결정요인임을 이론과 계량작업을 바탕으로 서술하고 증명한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는 81년 가을 이후 서강대 교수로서 과학기술처, 상공부로 부터 여러 가지 협력 연구와 자문을 제안받는 기반이 되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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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국가경쟁력강화를 위한 기술혁신 연구>

 

1982년 1월, 국제경제연구원은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KORSTIC)와 통합하여 산업경제기술연구원이 되었고, 1984년 8월 산업연구원(KIET)으로 재탄생해서 현재에 이르렀다. 산업경제기술연구원 초대 원장은 고 박성상 전 한은총재였다.

 

정소영 원장께서는 타계(他界)하셔서 그 호탕한 모습을 뵐 수 없어 안타깝다. 정재석 원장께서는 관계(官界) 은퇴 후 장자(莊子)에 심취하셔서 장자처럼 노후를 즐기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다. 다수의 세속적 유혹을 모두 사양하고 한 마리 학(鶴)처럼 고고한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 정 원장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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