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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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개구리소리가 쏟아졌고, 이윽고 비가 왔다. 우리는 비가 와도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장이 서지 않는 무싯날 빈 가게는 우리들의 좋은 놀이터였다.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아니 많이 올수록 장터 빈 가게들은 우리들의 아늑한 놀이였다. 그런데 그 장터가 빤히 보이는 내 구석진 방에서 나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아이들 소리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으레 아이들은 거기로 모여들었다. 비가 오면 갈 곳은 달리 그곳뿐이었다. 나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고 그곳의 주인공이었다. 간혹 아이들이 없을 때도 나는 그곳에 있었다. 그러노라면 부근 중국집에서 짜장면 반죽을 내리치면서 부르는 구성진 식당보이의 노래까지 따라 부르곤 했다. 그런데 그 장터가 갑자기 낯설어졌다. 그래서 난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서울내기 때문이었다. 녀석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서울내기가 전학왔다.
아이들이 하나 둘 녀석의 곁으로 모였다. 처음엔 그런 아이들의 태도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나 동네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확고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녀석은 확고했던 나의 자리를 흔들고 있었다. 우선 녀석의 세련된 차림새와 무엇보다 경사(서울말 말끝이 올라 간다해서)를 쓰고 있어서 산골 촌놈들을 기죽이기에 충분했다. 아닌 게 아니라 아이들이 나 보란 듯이 녀석에게 아양까지 떨어댔다. 녀석들은 공공연히 서울내기가 태권도도 배웠고 싸움도 잘해 한두 살 많은 형들도 꼬리를 내린다고 하며 떠벌리고 다녔다. 언젠가부터 그런 녀석들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까지 서울내기 주변으로 몰리기 시작하더니 끝내 내 주변에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비가 그치지 않았지만 나는 집을 빠져나왔다. 마땅히 갈 곳은 없었다. 그냥 뒷산 아래 교회당 처마 밑까지 단숨에 뛰어갔다. 가능한 아이들의 노는 소리와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노는 소리는 거기까지 따라와 있었다. 아이들 소리는 개구리 소리와 섞여 분간이 어려웠다. 서울내기만 아니었다면 모든 소리는 아름다운 향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당 처마 밑에서 듣던 소리들은 참으로 처량했다. 울고 싶었지만 대신 뒷산을 오르기로 했다. 산을 오를수록 소리는 멀어졌고 곧 조그마한 동굴에 다다랐다. 거기는 아무도 모르는 나와 몇몇 아이들만 아는 일종의 비밀 아지트가 있었다. 그곳에 우리가 놀면서 깔아놓은 자리도 그대로 있었다. 그 자리에 벌렁 누웠다. 따뜻한 온기가 비에 젖은 나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피곤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개구리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스르르 눈이 감겨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덧 비는 멎었고 하늘은 개어 있었다. 저만큼 가는 햇살 줄기가 마을까지 이어져 있었다. 아이들 소리는 한층 경쾌하게 들려왔다.
누워 있는 발 아래로 비 개인 마을이 보였다. 마을은 언제 보아도 한편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마을에 대하여, 마을의 아이들에 대하여, 거기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차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 그때 맨 먼저 치밀어 오른 것은 오기였다.
서울내기에 대해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 서울내기를 이용해 기를 펴려던 녀석들의 말을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었다. 설사 녀석들의 이야기가 모두 맞다 해도 내가 그들을 피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표면적으로 들어난 것은 그 서울내기가 떠돌이로서 술집을 하고 있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불쌍한 아이라는 사실이었다.
산을 내려 온 나는 아이들을 피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향해 스스로 닫았던 문을 열고 본래의 나로 돌아갔다. ‘자, 할 테면 해보자.’는 식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너무 싱겁게 끝나버렸다. 대부분 아이들은 서울내기가 몰고 온 바람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둘이 함 붙어봐라’
결국 그들에 의해 떠밀리다시피 내 앞에 선 서울내기는 내 얼굴을 보자말자 울음을 먼저 터트렸다. 행실이 못된 장터 아이들 몇몇이 그동안 내 위세에 기를 펴지 못하다가 새로 온 서울내기를 이용해서 기를 펴고자 한 것이었다. 녀석도 그동안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거짓으로 위세를 부리던 짓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ifsPOST>
- 기사입력 2025년02월15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5년02월21일 12시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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