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김상국 교수의 생활과 경제 이야기<70> 행복이란? (Ⅲ) 보시(布施)의 법칙, 하느님의 뜻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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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10월07일 16시58분
  • 최종수정 2023년10월17일 10시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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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들 말에 의하면 현대인의 지능은 마지막 빙하기 말쯤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빙하기가 지금으로부터 약 12,000년~14,000년쯤 전이니 대충 약 1만 년 전에 현생인류가 완성됐다는 뜻이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1만 년 전 인류는 “어부버버” 하며 말도 시원치 않고, 인터넷도 할 줄 모르고, 곱게 화장도 안 했지만, 그들을 21세기로 데려와서 살게 하면 우리와 거의 차이 없이 살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엉뚱한 말로 글을 시작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기원전 4세기 어느 그리스 철학자의 글에 “요즘 젊은이들은 도통 예의도 없고, 학문도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이 걱정된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우리도 “요즘 젊은이들이 버르장머리도 없고, 도저히 이해되지 않은 존재들이다.”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2,500년 전 사람도 그런 말을 했다니, 어른들은 항상 ‘젊은것들’(젊은 사람들보다는 더 실감 나는 표현) 이라는 표현이 시대에 불구하고 입에 달린 말인가 보다.

이전 글에서 『인생 총량의 법칙』을 설명하면서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양, 행복할 수 있는 양, 먹을 수 있는 양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듯하다.’는 말을 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감성적으로 동의하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이런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적인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 부자고, 건강하고, 오래 살고, 행복하고, 자식들도 잘되는 그런 사람들이다. 즉 『인생 총량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불경이나 성경에서 한결같은 말씀이 있다. “내가 남을 사랑하고, 보시를 베푸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시를 베푸는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우리 범부들이 이런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왜냐면 우리는 “지금 나는 내 앞가림도 못하고 있는데?“라는 생각을 곧잘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생각들이 지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살아계신 2,500년 전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잡보장경(雜寶藏經)이라는 경전에 무재칠시(無財七施)라는 얘기가 있다. 즉 가진 것(재산)이 없는데도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에 관한 얘기다.

어떤 사람이 석가모니를 찾아와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Q1; “저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으니 무슨 이유입니까?”
Q2; “저는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입니다. 남에게 줄 것이 있어야 주지 뭘 준단 말입니까?”
가끔 우리가 생각하는 말 아닌가요?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 부처님은 조금 의아스러운 대답을 하셨다.

1. 저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으니 무슨 이유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부처님은 참으로 의외의 답을 하신다. “그것은 네가 남에게 베풀지 않고 살았기 때문이다.” 즉 ‘네가 먼저 베풀 마음이 없이 너만을 위해서 살았는데, 어찌 그런 네가 잘되기를 바란다는 말이냐. 네가 잘되기를 희망한다면, 네가 먼저 베풀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즉 ‘먼저 주려는 보시의 마음’이 있어야 네가 잘될 수 있다는 말이다. 

“네가 받고 싶은 데로 먼저 베풀어라.”라는 예수님 말씀과도 너무 일치하는 말씀이다.

여기서 그러면 한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우리 주위에는 이기적으로 살아도 잘만 사는 사람이 많은데요? 착한 사람들도 고통받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질문도 아주아주 오래된 질문이고, 많은 종교적인 답변들도 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리 가슴에 와닿지 않는 경우도 있다.

1. 토마스 아퀴나스; “선과 악은 소유와 결핍으로서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니다." "악은 악인 한에서 사물들에게 있어 어떤 실재가 아니라, 특수한 선의 결핍이다. 그것은 특정한 구체적인 선에 고유한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2. '천주는 왜 악을 창조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악은 피조물이 아니며, 다만 선(善)의 부재다.’라고 교리에는 말하고 있다.

3. “우리가 하느님에게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기적의 하느님이 아니라는 점이다. 화를 막아주고 복을 주는 하느님이 아니라, 위로의 하느님 그리고 힘이 돼 주시는 하느님이다. 고난을 당하면 위로받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는 하느님이다.” 그러나 솔직히 조금 서운한 말씀이시다.

4.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신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꺾고 우리를 인도하지 아니하신다. 그냥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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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하거나 정말 해석하기 어려운 말들이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나는 내 나름대로 이렇게 정리하였다. 나의 이 생각은 종교적이지도 않고, 철학적이지도 않다. 다만 내가 살아오면서 ’이렇게 생각되었다.‘라는 것을 꾸밈없이 말하는 것이다. 비판하지 마시고 그냥 평범하게 ‘그런가 보다.’라고 가볍게 들어주시기 바란다. 

하느님이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자비와 사랑과 그에 따른 기도(복)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이유라고 생각한다. ① 내가 보시를 베푸는 시점과 기도의 성취 시점이 일치하지 않거나 ② 내가 바라는 복과 하느님이 주시는 복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 내가 보시를 베푸는 시점과 보상(기도)의『시점』이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고 싶은 상품이 있으면 돈을 주고 그 물건을 산다. 『즉시 보상』이다. 즉 돈을 주면 그 자리에서 원하는 물건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이나 부처님께서 주시는 복은 그런 즉각적인 보답(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남에게 이런 착한 행위를 했으니, 또는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했으니 내가 원하는 것을 『지금』 들어 주세요.’는 우리들의 생각이지 그분들의 생각은 아니라는 느낌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이것이 너무 절실하여 기도하였다. 또는 아니라고 부정할지 모르지만 ‘내가 이만큼 선행을 했으니, 내가 바라는 이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바란다. 즉 선행과 기도가 맞바꾸어지기를 무의식적으로 강하게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선행이 좋은 결과로 바로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시를 베푸는 시점과 보상(기도)의 시점이 일치하지 않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조상의 보시와 선행이 나의 대(代)에 나타날 수도 있고, 내가 지금 행한 선행과 보시가 나의 자식 대에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확고한 나의 생각이다. 또한 역(逆)으로 악행에 대한 보상도 당대에 또는 다음 대에도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주위에도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으며,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 그러나 관찰해 보면 부모의 선행이 자손의 복으로, 또는 역으로 부모의 악행이 자손의 부족함으로 나타나는 것을 상당히 많이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결과가 ‘신(神)의 개입’이 있어서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솔직한 나의 강한 느낌이다.

부모의 보시와 남에 대한 사랑은 우선 좋은 자식을 갖게 하고, 설령 자식이 어떤 점에서 부족할지라도, 그것을 보충해 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 다른 하나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옳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박한 필요가 있을 때 그것이 매우 중요하고, 급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도 한다. 간단한 예로 입시 철이 되어 부모님들이 자기 자식이 합격하기를 희망하는 기도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실 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생각을 못 하고 있지만 그분들이 보시기에는 지금의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 더 본원적인 것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 각자는 이런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 너무 절실하여 빌고 또 기도하였지만,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지내 놓고 보면 그 절실했던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거나, 또는 훨씬 더 좋은 방향으로 해결된 경험 같은 것이다. 나의 경우에도 그런 느낌이 많았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신(神)의 개입’이 있어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나의 기도대로 들어 주셨다면 얼마나 우스운 결과가 나왔을까?’하는 생각을 우리는 가끔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절대자는 우리의 기도를 우리의 방식이 아니라,‘그분들의 주관대로 들어주시고 인도’하신다고 생각한다.
 
2. 저는 가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남에게 무엇을 주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답하셨다.

“그렇지 않다. 아무 재산이 없어도 남에게 줄 수 있는 7가지 보시가 있다.”

첫째는 안시(眼施)다.
사람을 대할 때 호의를 담은 눈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다. 따뜻한 눈은 말하지 않아도 가장 호소력이 있다.

둘째는 화안시(和顔施)다. 
얼굴에 화색을 띠고 부드럽고 정다운 얼굴로 남을 대하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할 수 있는 덕을 부르는 것이다.

셋째는 언사시(言辭施)다.
말로 써도 남에게 얼마든지 베풀 수 있다. 부드러운 말을 쓰고 추악한 말을 쓰지 않는 것이다. 사랑의 말, 칭찬의 말, 위로의 말, 격려의 말이 그것이다. 사람이 짓는 업보(業報) 중에서 입으로 짓는 업이 가장 많다. 욕설(惡口), 거짓말(綺語), 이간질(兩舌), 이치에 닿지 않는 말(妄語)이 그것이다. 조심해야 한다.

넷째는 신시(身施)다.
몸으로 베푸는 것이다. 부모·스승·종교 지도자들을 보면 일어나 맞이하고, 경배하는 것이다. 무거운 남의 짐을 들어주는 것도 바로 신시다.

다섯째는 심려시(心廬施)다. 
행동으로 보시를 베풀고 마음으로도 화(和)하고 착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 열고 따뜻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면 상대방은 그 마음을 알고 위로와 기쁨을 얻는다. 

여섯째는 상좌시(上坐施)다.
때와 장소에 맞게 자리를 내주고 양보하는 것이다. 웃어른들이 계시면 자리를 펴 앉게 하고, 부족하면 내가 앉은 자리에 앉게 하는 것이다. 지하철의 경로석, 임신부석이 그런 것 아닐까?

일곱째는 찰시(察施)다.
굳이 묻지 않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미리 알아서 도와주는 것이다. 더욱 큰 보시다.

이 일곱 가지 덕목을 요약하면 따뜻한 눈빛과 환한 얼굴로 사람을 대하고, 나쁜 생각과 말을 하지 않으며, 어려운 사람이 있을 때, 내가 몸으로라도 도와 줄 수 있으면 기쁘게 도와주라는 말씀이다. 지극히 평범하고, 돈이 없더라도 마음만 있으면 우리가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일들이다. 즉 우리가 하려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그러시면서 끝에 “네가 이 일곱 가지를 몸소 ①행하여 ②습관이 붙으면 너에게 ③행운이 따를 것이다.”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가 받고 싶은 대로 먼저 행하여라.”는 말씀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너희가 그것을 ① 행하면 ② 행운이 따를 것이다. 즉 복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이다. ‘먼저 행하라.’ 성경에도 똑같은 말씀이 있다. 

3. 그런데 최고의 보시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한다.

무주상보시는 상대방에 대한 생각이 없이, 즉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는 생각이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보시(사랑)를 베푸는 것이다. 즉 ‘내가 베풀었다’라는 생각이 없이 상대방이 필요하기 때문에 내가 가진 것을 그저 베풀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최상의 보시이고, 진정한 사랑이라는 뜻이다.

휴정(休靜) 선사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닌 한 몸이라는 생각에서부터 무주상보시가 이루어진다. 이런 보시를 위해서는 우리 인생이 맨몸으로 왔다가 맨몸으로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이에게는 분수대로 나누어주고, 마음이 빈곤한 자에게는 진리의 말로 용기와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며, 모든 중생들의 마음에 평안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참된 보시”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베풀었는데 너도 그래야 하지. 또는 최소한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니 그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이 좋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어 가는 것 같다. 

“너희가 베푼 것을 지상에서 받는다면, 하늘에서 받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젊었을 때 이런 생각이 가슴에 와닿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는 요즈음에 조금씩 그 말에 느낌이 더해진다. 

그러나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리 나아진 것 같지도 않다. 다만 지상에서 받지 않으면, 천상에서 더 많이 받는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고, 남에게 베풀고 난 다음에 느껴지는 ‘마음의 평화와 행복감’이 과거보다 좀 더 소중하게 생각되는 것일 뿐이다. 

“네가 행복하고, 오래 살며, 자식이 잘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베풀고, 사랑하라.”는 성경과 불경 말씀이 더 가깝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내가 더 크게 이기적으로 변한 것인지, 아니면 절대자의 가르침에 한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냥 더 나아진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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