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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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의 그림자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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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6월08일 09시30분
  • 최종수정 2023년06월08일 09시28분

작성자

  • 이상돈
  •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20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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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의 <리더십> 번역본이 출판되자 키신저에 대해 언급을 하면서 키신저 말을 무조건 정답처럼 인용하는 칼럼과 기사가 많이 나왔다. 특히 키신저가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이끌었다고 쓴 기사도 있다. 키신저가 큰 족적을 남긴 안보보좌관이며 국무장관임은 분명하다. 키신저 외교의 성과로 미국이 중국과의 관계를 정상화 하는 계기를 만든 것과 베트남 전쟁을 끝내는 협상을 이룩한 것을 드는데, 이것이 과연 키신저의 업적인지는 의문이다.   

 

키신저는 유럽 출신이고, 박사학위도 유럽 외교라서 아시아는 그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  넬슨 록펠러로부터 용돈을 받아가면서 그의 자문 역할을 하다가 존슨 대통령이 1968년에 북베트남 폭격을 중단하고 북베트남에 평화회담을 제안하면서 국무부에 자문으로 참여했다. 로버트 케네디 암살 후 그해 대통령 선거가 공화당 후보인 리차드 닉슨에게 유리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해서 존슨 정부가 북베트남과의 평화회담을 곧 시작할 것이라는 비밀정보를 닉슨 측에 은밀하게 전달한 것이 키신저가 닉슨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다. 그전까지 닉슨은 키신저를 클레어 루스 여사가 초대한 파티에서 만나 인사한 적 밖에 없었다.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과 평화회담을 대선 직전에 발표해서 민주당 후보인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을 도울 계산이었다. 그러자 닉슨 측은 남베트남 티우 대통령과 잘 아는 애너 체놀트 여사를 통해서 닉슨이 당선되면 남베트남 정부가 보다 좋은 조건으로 협상을 하게 될 것이라고 티우에게 비밀리에 연락을 하며, 티우 대통령은 베트콩이 참여하는 평화협상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해서 존슨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이렇게 해서 대선 전에 평화회담 개시를 알리려던 민주당은 낭패를 당하고 닉슨이 무난하게 당선된다. 닉슨은 이런 뒷거래가 알려지는 것을 꺼려했고, 그래서 키신저를 경질할 수 없었다. 키신저가 그 사실을 폭로하면 닉슨은 1972년 재선이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닉슨은 국무부와 CIA를 불신했다. 그래서 닉슨은 키신저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고 키신저는 유능한 스태프를 끌어 모어서 혹독하게 일을 시켰다. 키신저는 기자와 통화하는 것을 좋아해서 일과 시간의 1/3~1/2을 기자와 통화하는데 썼다. 그러면서 자기 스태프가 언론과 상대하는 것을 금지했고 심지어 스태프의 전화에 도청장치를 달기까지 했다. 

 

닉슨은 야인으로 있을 때 아시아 국가의 방위는 아시아 국가가 스스로 해야 한다는 독트린을 천명한 논문을 Foreign Affairs지(誌)에 발표할 정도로 외교 방향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중국을 국제무대로 불러와야한다는 발상도 닉슨이 한 것이다. 닉슨은 임기 초에 키신저에게 자기가 임기 중에 중국을 방문할 것이라고 하자 키신저는 깜짝 놀랐다. 이는 닉슨의 참모들이 나중에 펴낸 회고록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중국 방문은 닉슨의 아이디어였고 키신저는 닉슨의 ‘agent'로서 역할을 충실히 했을 뿐이다. 워터게이트로 물러난 후 닉슨은 자기의 업적마저 키신저의 업적으로 여겨지는 것을 보고 씁쓸해 했다. 

 

베트남 전쟁도 닉슨이 직접 합동참모본부와 함께 이끌어 갔다. 캄보디아에 대한 비밀폭격은 국무장관과 국방장관도 모르게 진행했고 키신저만 알고 있었다. 1970년 캄보디아 침공, 1971년 라오스 작전도 모두 닉슨이 합동참모본부와 결정했다. 로저스 국무장관과 레어드 국방장관은 항상 반대하기 때문에 닉슨은 신경을 쓰지 않았고 키신저는 닉슨의 군사적 결정을 그대로 따르는 'yes man'이었다. 1972년 북베트남군의 춘계 대공세에 대해 닉슨이 대대적인 폭격작전에 나설 때도 마찬가지였다. 

 

닉슨은 1972년 대선 전에 중국과 소련을 방문하고 또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키려 했다. 이는 물론 보통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 실무를 맡아서 성공리에 진행한 키신저의 능력은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당시 백악관 안보실은 밤에도 불이 켜져있었지만 윌리엄 로저스 국무장관은 오후 6시면 칼날 같이 퇴근을 해서 국무부 건물은 깜깜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런 큰 외교사안의 출처가 닉슨 대통령이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닉슨은 잘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그럼에도 닉슨이 워터게이트로 물러났기 때문에, 그리고 동부 진보언론이 닉슨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했기 때문에 이 모든 업적을 키신저가 이룬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켰다고 해서 키신저는 레둑토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탔다. 그 후 노벨 평화상은 권위가 땅에 떨어져 버렸다. 키신저는 상금을 베트남 전몰장병 자녀 장학금으로 전액 기부했다. 당시 키신저가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북베트남과 이면 거래를 했다는 의혹이 일었는데, 카터 행정부 들어서 그것은 사실로 드러났다. 즉, 키신저는 북베트남에 대해 재건 비용으로 미국이 33억 달러를 주겠다는 비밀각서를 써주었던 것이다. 이런 지원을 의회가 동의할 가능성도 없었고, 또 북베트남이 평화협정을 위반하고 1975년 봄에 사이공을 점령하자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북베트남은 미국이 정말로 그 돈을 줄 것으로 생각했으나 반응이 없자 카터 행정부 들어서 각서를 공개했다. 이에 발끈한 미국 의회는 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닉슨은 이 각서에 대해 평화협정의 전제 조건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키신저는 이에 대해 언급을 회피했다. 이런 협상을 했는데도 노벨상을 탔으니 한심한 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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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백악관을 방문한 애너 체놀트(Anna Chennault 1925~2018). 2차 대전 중 남중국에서 활약한 Flying Tigers 항공단을 지휘하고 장제쓰 군대 공군을 지원했던 전설적인 클레어 체놀트(Claire Chennault 1893~1958) 장군의 부인이며, 열성적인 공화당원이고 대만 정부의 워싱턴 로비스트였다. 정권 창출 공신의 자신만만한 웃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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