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김상국 교수의 생활과 경제 이야기<38> 왜 공산주의는 자유 민주주의에 질 수밖에 없는가?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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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1월28일 14시53분
  • 최종수정 2023년01월28일 14시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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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분들로 부터 나의 이전 글 “공산주의의 초기 효율성은 왜 비(非)효율성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가?”, “공산주의는 왜 자유민주주의를 이길 수 없는가?”라는 글에 대해서 질문을 받았다. 

 

이전 글을 아주 짧게 요약하면 ① 나라가 매우 가난하고 ② 국가의 부(富)가 소수 구릅의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있을 때 ③ 신속하게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경제 발전의 초기단계에서는 공산주의가 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④ 공산주의 권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절대 권력화 되고 ⑤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할 수밖에 없다. 또한 공산주의는 ⑥ 사람들의 기본적 욕구인 이윤추구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함으로 결국 ⑦ 개인과 기업의 자유로운 이윤추구 활동을 장려하는 자유민주주의에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독자들의 질문은 주로 “왜 공산주의는 절대 권력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가?”, “왜 절대 권력은 부패하는가?”, “공산주의의 실패를 마슬로(Maslow)의 욕구 5단계설로 설명할 수는 없는가?”로 요약할 수 있었다.

 

질문들을 받으면서 본인이 설명을 쉽고 짧게 하기 위해 건너 띈 느낌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성이 된다.

 

민감한 내용이어서 좀 더 명확한 설명을 위해 이 글을 쓴다. 먼저 첨언한다면 나의 글은 경제적 관점에서 쓴 글이기 때문에 정치, 사회적 문제들은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말하고자 한다.

 

나에게는 세상일을 판단할 때 몇 가지 기본 가정을 기준삼아 판단한다. 

 

그 중 하나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학자들은 가끔 말을 어렵게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말도 우리가 자주 쓰는 말로 설명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즉 “경제사정(하부구조)에 따라서 정치, 사회, 문화와 같은 것(상부구조)이 변한다.”는 뜻이다.

 

더 쉽게 설명하면 “먹고 살 것이 충분해야 사람들은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사람들 간의 인심도 좋아진다. 그러기 때문에 정치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사람들이 잘 살게 해주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럼 공산주의가 발생한 배경을 우선 살펴보기로 하자. 칼 마르크스(1818~1883년) 가 살았던 19세기 유럽은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세계경제가 매일매일 눈부시게 발전하는 시기였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으로 사람들은 수력, 인력, 풍력으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엄청난 힘(동력)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3억년 전 ‘석탄기시대’에 생겨난 석탄들은 유럽 여기저기에 엄청나게 묻혀 있었다.

 

그리고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배(증기선)는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범선보다 엄청난 속도로 5대양을 누빌 수 있었다. 더욱이나 선철이 아닌 강철 생산이 가능해짐으로써 총포의 발전도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그 결과 영국, 불란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제치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식민지를 개척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유럽의 부는 급격히 증가하였고 과거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부(富)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량소비가 가능해졌고, 그 소비를 만족시킬 수 있는 대량생산도 가능했다. 그래서 당시 유럽은 아시아나 미국과는 전혀 다른 엄청나게 풍요로운 세상이 되었던 것이다. 참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그러나 모든 밝은 측면(明)에는 어두운 측면(暗)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곧 소수의 엄청난 부자와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이 탄생한 것이다.

 

여기서 잠시 평화(平和)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우선 화(和)를 보자. 입 구(口) 앞에 벼 화(禾)가 있다. 즉 먹을 것이 앞에 있어야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앞서 설명했던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즉 “먹고 살 것이 있어야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사람들 간의 인심도 좋아진다.”는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화(和) 앞에 평(平), 즉 고루 평이 있다. 즉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먹을 것이 있어야 좋지만, 함께 중요한 것은 그 먹을 것(富)이 ‘고르게 어느 정도 평등(平等)하게’ 있어야 진정한 평화가 생긴다는 뜻이다. 기막힌 글자다.

 

나는 한자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지만, 가끔 이런 글자 풀이를 해 보면 ‘참으로 정곡을 찌른 표현이다.’라는 생각이 가끔 있다.

 

19세기 유럽의 풍요로움은 인류가 지금까지 누리지 못한 풍요로움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19세기의 풍요로움은 평등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지지 않고, 심하게 편중되어 몇몇의 소수집단에게 과점되었다.

 

당시 소수의 부자를 ‘부르주아’라고 불렀고, 다수의 가난한 노동자들을 ‘플로레타리아'라고 불렀다. 즉 부르주아는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고, 그 반대로 플로레타리아는 자기 몸의 노동력 이외에는 별 재산이 없는 근로자들이었다. 

 

이것은 현재도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나 당시의 빈부 차는 너무 극심했었고,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보장도 노동조합도 인권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는 것이 큰 차이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 봐 첨언한다. 요즘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노동인권과 당시에 노동인권은 하늘과 땅 차이다. “요즘도 노동자 권한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쉽게 하지 말고, 조금 과거를 공부하고 말하기를 바란다.

 

이런 극심한 빈부차와 처참한 노동자의 생활은 경제학자이며 동시에 ‘철학자’였던 칼 마르크스를 분개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재산을 공유하여 잘 사는 공산(共産)사회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사회는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는 ‘플로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했던 것이다. 여기서의 산(産)은 ‘부를 생산하는 수단’즉 토지와 공장 등을 말한다. 그래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협동농장과 협동공장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이런 공산사회에서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칼 마르크스가 주장한 공산혁명의 주된 내용이다. 참으로 이상적인 철학이다. 플라톤이 주장한 『철인정치』와 비슷하다. 즉 지혜로운 철인(哲人, 賢人)이 세상을 다스리고 일반인들은 그 밑에서 평화롭게 사는 이상세계다. 

 

우리 동양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요순(堯舜)시대다. 세상을 정말 잘 다스린 요 임금께서 가장 지혜로운 순 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세상이 그지없이 평화로웠다는 시절이다. 

 

그런데 이 요순시대는 언제인지도 모른다.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중국 신화(神話) 속에 나오는 임금님일 뿐이다. 나도 이런 요순시대가 있다면 그런 시대에 살고 싶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매우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우선 공산사회에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능력에 따라 일 한다’는 것이 지속적으로 가능할까? 사람 간에는 분명히 능력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는 내가 노력한 만큼의 보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 논리는 그렇지 않다. 필요에 따라 분배가 되도록 되어있다. 

 

즉 노력의 정도와 거기에 따른 ‘보상이 비례’되지 않는다. 어떤 특별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그렇게 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은 열심히 일할 의지를 곧바로 잃게 되고 게으르게 된다. 이것은 사람의 본능이다. 그러므로 이런 조건에서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서는 철저한 감독과 독려가 필요하다. 쉽게 말해 사람에 대한 ‘감시와 처벌’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현재 중국의 인구는 14억이지만 감시 카메라는 7억대가 있다고 한다. 국민 두 명에 한 대의 감시 카메라가 있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필요에 따라 분배 받는다.’는 것은 더더욱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도 인간의 본성에 철저하게 위배되기 때문이다. 배가 정말 고플 때는 누가 밥만 먹여주어도 고맙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그래서 이런 시기에는 일할 기회만 주어지면 누구나 열심히 일하고, 먹고 사는 것이 조금만 나아져도 쉽게 만족한다. 

 

이 시기야 말로 마슬로가 말한 욕구 1단계로 ‘먹고 사는 생물학적인 요구’를 만족시키는 단계다. 우리나라로 치면 보릿고개가 있었던 60년대 70년대 초반, 경제개발5개년계획 1차, 2차 시절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본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분배 받는다.’는 말은 곧바로 아주 빠르게 성립되지 않게 된다. 사람의 욕심 때문이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길게 말할 필요 없이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보면 된다. 

 

그런데 나의 노력과 그것에 대한 보상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자기의 능력대로 일할까? 아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의 초기 효율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곧바로 비(非)효율성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산주의의 생산성과 생산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처럼 부족해진 생산량을 차지하기 위한 사람들 간의 투쟁은 점점 강해질 수밖에 없고, 사회는 점점 더 큰 혼란에 삐지게 된다. 그러면 누군가가 나서서 『강력하게』 이런 혼란을 조정해 주어야만 한다. 바로 그런 기관이 공산주의 국가에게는 『공산당』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공산당은 사회 전체의 생산수단(토지, 공장 등)을 독점하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눠주고 통제하는 강력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 정권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해져야만 하고, 절대 권력화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것을 우리는 『공산독재체제』라고 부른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도 인간의 욕구 측면에서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생산수단이 국가가 아닌 개인 또는 기업이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노력과 거기에 대한 보상이 처음부터 어느 정도 비례한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사회에서는 불만의 소지 자체가 처음부터 적다. 그리고 만약 인내할 수 없는 정도의 불균형이 발생하면 법에 대한 제소, 언론의 규탄, 노동조합 등에 의해 해소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 그래서 공산주의와 같은 절대적인 권력과 전 국민에 대한 감시가 필요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 공산주의 국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왜 강력한 독재체제로 변할 수밖에 없는 가를 설명하였다. 

 

러시아 푸틴, 중국의 시진핑 그리고 북한의 김일성 일가를 우리는 공산주의에서 최고의 직책인 ‘서기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짜르 푸틴, 황제 시진핑 그리고 김일성 왕조라고 부른다. 당연히 이렇게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왜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하는가? 

 

이것도 인간의 본성으로 쉽게 설명된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그렇게 못하는 몇 가지 제약이 있다. 바로 자신 능력의 한계, 언론, 사회적인 감시체제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법부의 독립 즉 재판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다. 

 

그러나 공산체제에서는 이런 사회적 제도가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공산체제에서 가장 먼저 강하게 통제 받는 것은 언론이다. 중국이나 러시아는  거대한 나라이면서도 신문, 방송, TV 모두 국가가 운영하는 정부 기관지 또는 국영방송 밖에 없다. 일부 소규모 민영 언론매체가 있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은 국가가 언론을 전면 장악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간판기업일 뿐이다. 이것을 보고 공산사회에서도 자유언론이 있다는 이상한 논리는 제발 자제해주기 바란다.

 

즉 이 모든 것이 뜻하는 바는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황제의 행동을 제약하는 사회적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코로나가 유행한다고 아파트 1층 문을 용접기로 용접해 버려도 아무 소리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나라 언론들은 과연 어떻게 보도할까를 생각하면 우리나라 언론과 공산사회의 언론의 자유 정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감시 장치가 없는 공산세계는 부정부패가 만연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부정부패는 수백 수천 어쩌다 수억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부정부패는 수십억 또는 그 이상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문제는 자유롭게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가 정신』(企業家 精神, 안트푸르니어쉽)을 키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실 공산주의를 약화 또는 멸망시키는 절대적 요인이다.

 

앞서 분석한바와 같이 공산주의체재에서 수장은 절대 권력을 행사한다. 즉 짜르 푸틴, 황제 시진핑 그리고 김일성 왕조가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다.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기업가들의 힘이 커지게 된다.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이를 해결하기 위한 두 가지 해법이 있다. 하나는 자기의 측근이 부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러시아의 신흥재벌 올리가르히와 중국 공산당 측근세력들이 그들이다.

 

두 번째는 지나치게 커지는 재벌세력들을 쳐버리는 것이다. 이런 행위의 예(例)가 바로 마윈을 포함한 기업가들의 추방, 거대 IT 기업들의 해체 또는 국유화, 공동부유(共同富裕)라는 미명(美名)하에 기업들을 옥죄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일정 이상 크기의 모든 기업에 당(黨)에서 감독인들을 파견하고 있다. 그리고 일체의 기업 의사결정을 할 때 그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러면 이런 사회적 부정부패와 기업가정신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 지속적인 부가 탄생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또한 마슬로(Maslow)의 욕구 5단계설로 볼 때도 공산주의는 지속될 수 없다.

 

반복해서 말했듯이 먹고, 자는 것이 불안정한 제1단계 ‘생물학적인 요구’단계에서 공산주의는 매우 효과적이다. 그러나 1단계 만족 후 제2단계인 ‘안전에 대한 욕구단계’부터 공산주의는 국민을 안전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더 불편하게 만든다. 평화롭게 사람들을 놔두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전쟁을 일으켜서 사람을 불안(不安)하게 만든다. 인구 2명 당 한대의 카메라와 우크라이나 전쟁, 중국과 북한의 끊임없는 공격적 발언 등을 보면 너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제3단계인 ‘사회적 욕구’단계는 더욱 생각할 수 없다. 절대권력의 사회에서는 절대권력 구릅에 속하지 않으면 그 나머지는 비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절대권력 구릅에 속할지라도 국민들은 끊임없는 감시 속에 살아야 한다. 이런 사회에서 제4단계 ‘자긍심의 만족’과 제5단계 ‘자기실현’의 욕구는 아예 상상조차 되지 않는 사치의 대상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국가는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발전의 방향을 정하고, 나라의 자원을 효율적인 곳에 투자하도록 배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업무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쳐야 한다. 그러나 사업을 일으키고 새로운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어 지속적인 발전을 하게 하는 것은 기업가의 몫이다. 기업가 정신(안트푸르니어쉽)이 바로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다.

 

공산주의는 이 두 가지 가장 중요한 핵심사항에서 자유주의 체제를 이길 수가 없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결국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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