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김진해의 주유천하> 현각과 혜민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11월21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11월19일 13시53분

작성자

  • 김진해
  • 경성대학교 예술종합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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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화엄사에서 한 달 여간 기거한 적이 있다. 대학시절이다. 순전히 그건 화엄사 원주스님을 안 덕택이다. 배낭 하나 메고 절로 찾아간 나를 스님은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리고 작은 방도 하나 내주셨다. 그 뿐이 아니다. 세 끼 공양을 처사를 시켜 독상으로 차려 들여다 준다. 절집에서 이런 호사가 어디 있겠는가. 

스님이 지금 어디 계신지는 모른다. 오랜 세월 뵙질 못했지만 항상 내 마음에 따뜻한 스님으로 자리하고 있다. 일주일쯤 머문 내가 지루한 기색을 보이자 스님은 사찰 순례를 제안했다. 화엄사를 찾아온 객승이 길 떠날 때 여비를 주며 나를 붙여 보낸 것이다. 법명도 생각나지 않는 탁발승을 따라 칠불암, 쌍계사, 도갑사 등의 사찰과 암자를 유람한 적이 있다.

 

오랜 인연의 경주 분황사 주지 스님도 절을 떠났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거처를 모른다. 스님은 경주를 방문할 때면 근처 숙소에 방을 잡아주셨다. 경주엔 맛있는 밥집이 많아 스님과 함께 식당 순례도 많이 다녔다. 그 중 하나가 최부자집 한식당으로 알려진 요석궁이다. 반찬이 정갈하고 요리가 일품이다. 

어느 날 스님은 미국을 간다는 나에게 함께 갈 수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흔쾌히 답했다. 빡빡이 승려와 장발의 나는 함께 맨해튼을 누비고 다녔다. 웬만해서 눈길 주지 않는 뉴요커들이 잿빛 가사 장삼자락에 관심을 보이곤 했다. 그렇게 뉴욕을 거쳐, 올랜도, 샌프란시스코에서 귀국을 앞두고 스님이 말했다. 사실은 미국 절집 살 만한 곳이 있나 알아보러 왔다는 것이다. 왜냐고 묻자 주지 직을 마치면 있을 곳이 없단다.

 

최근 혜민의 사태를 보면 문제는 항상 말과 행동이 다를 때 발생한다. 그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로 많은 독자들에게 위로를 안겨준 스님이다. 글로서 대중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말과 글과는 달리 그의 생활은 부족함 없이 넘쳤고 부유해보이니 독자들이 실망한 터이다. 

현각도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로 명성을 얻은 분이다. 현각이 혜민을 비판한 것은 부처의 이름을 팔아 육신의 호사로움을 누린다고 보았기에 장사꾼, 도둑놈이란 거친 표현을 쓴 것 일게다. 수행자로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누구든 유명해지면 시기질투가 많은 법. 하물며 운수납자(雲水衲子)로 상징되는 스님이 화려하게 살고 있다니 아니꼽게 볼 사람들이 많은 건 당연지사다. 범부인 나로서는 멈추면 보이는 것도 없었고, 구도는 턱도 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멈추면 보이는 것이 있나 열심히 보기도 했고, 도는 닦아보려 무던 애는 써보았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해탈만하면 된다. 근데 왜 해탈하려는가? 윤회관(輪廻觀) 때문이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나쁜 짓 하면 나락으로 떨어지고 다음 생에 아귀축생(餓鬼畜生)으로 태어나기에 그렇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苦)라고 말한다. 고통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해탈뿐이다. 그 길 만이 윤회를 벗어나는 길이다. 근데 해탈이 쉬운가. 출가해서 평생 도(道)를 닦아도 해탈했다고 말하는 이를 보질 못했으니 부처님 빼고는 사부대중 모두가 미혹의 질곡을 벗어나기 어렵겠다. 

그런데도 해탈을 위한 노력은 누구나가 한다. 모두가 고통 없이 살고 싶어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누구나가 행복해지려는 노력을 한다. 해탈을 행복과 연관 짓는 것이 무리하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탈이 불가능한 범부 중생들은 살아생전에 행복하기만 한다면 최고라는 생각이다.

 

스님의 요건은 이렇다. 첫째는 적어도 자기 것을 챙기지 않는 것이다. 탐욕을 버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혜민은 승려로서 탐욕이 지나치다. 누더기 승복을 걸친 성철 스님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둘째는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밥을 함께 나누는 삶이다. 절집에 가면 공짜 밥을 주는 이유다.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것은 여타 종교도 같다. 부처의 가르침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옛 시절 만났던 두 분 스님이 새삼 생각나는 이유가 이래서다. 

화엄사 원주스님은 아낌없이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분이었고 분황사 스님은 자기 뒷주머니 챙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 두 분의 모습을 진짜 승려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불교 종단도 스님들이 축재(蓄財) 안하게 노후와 복지 대책 마련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중들의 재물 탐욕도 그나마 좀 줄어들지 않을까.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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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11월21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11월19일 13시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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