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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묻다, 가축 살처분과 함께 버려지는 생명윤리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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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6월21일 17시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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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3일 아시아 지역 최초로 중국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frican Swine Fever: ASF) 바이러스가 발병했다. 인접 지역인 우리나라도 ASF 차단 방역에 힘쓰고 있다. 지난 6월 17일 강원도 양구군에서 실시된 아프리카 돼지열병 가상방역 합동훈련에서는 살처분 및 사체처리 등 매몰 현장 방역 시연이 이뤄졌다. 중국에서는 6월 현재까지 돼지 약 100만여 마리가 ASF의 전파를 막기 위해 살처분되었다.

 

한국의 마구잡이식 가축 살처분 실태 


살처분이란 구제역이나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 등 특정 질병이 발생했을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역 조치다. 말 그대로 살(殺), 죽임으로써 처분(處分)하는 것이다. 가축전염병예방법 제20조에 따르면 시장ㆍ군수ㆍ구청장은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정하는 제1종 가축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될 경우 가축의 소유자에게 그 가축의 살처분을 명하여야 한다. 살처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국가 재난까지 선포되었던 2011년의 구제역 파동이다. 2010년부터 2011년까지 무려 소·돼지 350만 마리가 살처분 되었다. 하지만 구제역 당시 뉴스에서 돼지 살처분이라는 용어를 언급할 때는 아무렇지 않게 듣고 넘겼던 것 같다. 그보다는 시장에서 돼지고기 가격이 어떻게 들썩이고 있는지, 삼겹살 가게 주인이나 중소 상인들의 피해가 어떠한지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한국의 가축 살처분 대응 방식 실태가 심각하다고 느낀 것은 우연히 유튜브에서 돼지 살처분처리 현장 뉴스를 보고 난 뒤였다. 

 

해당 영상은 2011년 1월 구제역 당시 경기도 이천시에서 이뤄진 돼지 400마리의 생매장 영상이었다. 가로 30m 깊이 10m 정도의 구덩이 안에는 돼지들이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현행 가축전염병 예방법에 따르면 사체를 넣은 후 지표까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매몰해야 한다. 돼지 한 마리를 묻는데 필요한 공간도 최소 1 세제곱미터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평지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매몰이 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정상적으로 서 있지 못해 세로로 선 채로 압사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구제역 매몰지는 경기도 2000여 곳 등 전국 4500여 곳이나 된다. 

 

살처분의 역습, 묻는다고 끝이 아니다


한국의 비인도적인 가축 살처분 방식에는 윤리적인 쟁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막대한 가축 살처분은 농촌 사회에 현실적인 피해를 주고 있다. 살처분 이후 주변 지역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2011 구제역 이후 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침출수가 터져 나오고, 토양이 검게 변하는 등 부작용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사실상 매몰지들이 살처분 이후 방치되었기 때문이다. 남한강 식수원 인근인 경기도 여주 돼지 매몰지에는 아직도 앞다리 살점 등의 사체가 침출수와 함께 튀어나와 있다. 보통 매몰 후 3년 자연분해 되어야 하지만, 규정보다 많은 돼지를 묻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썩지 않은 사체가 발견되는 것이다. 비닐이나 생석회를 무차별적으로 함께 매몰한 것도 사체분해를 지연시키는 원인이다. 침출수를 빼내는 오염방지 시설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추가 오염을 막기 위해서 미생물을 활용한 자연 발효나 사체 소각 등 후속 조치가 필요하지만 역시나 예산이 문제다. 돼지들을 땅속 깊이 묻어버렸다고 끝이 아니다. 무분별한 살처분의 대가는 반드시 막대한 환경피해와 함께 되돌아온다.

 

살처분이 초래하는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


살처분 작업자들의 정신적 피해도 심각하다. 올해 초 국가인권위원회는(이하 인권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가축 살처분 작업자들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심리적 지원을 강화할 것을 권고했다. 살처분 참여자들은 가축들의 비명소리나 떼죽음 장면을 정면으로 목격한다. 2017년 인권위가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에 의뢰해 가축 살처분에 참여한 공무원과 공중방역 수의사 268명의 심리 건강 상태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6%가 PTSD 판정 기준을 넘겼다. 살처분의 트라우마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참여자도 있었다. 살처분 참여 작업자 중 비(非)공무원의 비중이 늘어나는 것도 문제다. 살처분 작업에 일용직 노동자가 많이 배정됨에 따라 정해진 기간 안에 목표량을 할당받는 경우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목표량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살기 위해 뛰쳐나오는 가축들을 굴착기로 밀어 넣는 등 비인도적 행위를 피할 길이 없다. 살처분 참여자는 작업 뒤 6개월 후 자치단체에 신청하면 심리치료를 지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참여자들은 살처분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살처분 참여자에 대한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정신적·심리적 치료 지원 및 추후 관리가 절실하다.

 

생명을 묻다, 동물의 권리는 어디로?


물론 가축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가축을 처분해야 하는 경우도 분명히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가축 질병이 인간이 만든 공장식 대량 가축 생산 구조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동물 복지를 고려한 축산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살처분되는 동물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한국형 가축 백신 개발과 방역 확대와 같은 예방적 조치도 뒤따라야 한다. 다행히 현 정부 들어 방역정책국이 신설되었으며, 겨울철 오리 사육 제한제를 통해 2017년 3,280만 마리에 달했던 살처분 가금류를 240만 마리로 줄이기도 했다. 살처분 규모의 축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한 사회를 평가하는 기준 중 하나는 사회적 약자와 동물을 대하는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동물의 권리에 대해 아직 다양한 쟁점이 부딪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소한 동물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낄 수 있으며 생명체로서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은 분명하다. 무분별한 대량 살처분 방식은 생명윤리를 마치 쓰레기처럼 처분하는 것과 같다. 지속가능한 축산업과 생명윤리의 보호를 위해 현행 살처분 방식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가 활발히 이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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