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8 인공임신중절실태조사가 말해주는 것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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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2월22일 17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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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생명권의 충돌.’ 고등학생 시절 생명윤리 교재에서 낙태라는 주제가 등장하면 어김없이 나오는 구절이었다. 헌법 재판소가 올해 4월 약 7년 만에 낙태죄에 대한 위헌 판단 여부를 앞두고 있다.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낙태죄 논쟁을 ‘여성의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로 이해하고 있다. 현행 형법은 제269조와 제270조에서 낙태한 여성과 의료진만을 처벌하고 있다. 임신한 여성이 낙태를 하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모자보건법에 따라 유전적 문제나 질환, 성폭행에 의한 임신 등 제한적 사유에 한해서만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 낙태를 허용한다. 국가와 남성의 책임은 낙태죄 논쟁에서도, 현행 법제에서도 모두 빠져있다.

 

2018 인공임신중절실태조사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선고 여부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지난 2월 14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이하 ‘보사연’) ‘인공임신중절실태조사’(2018년, 만 15세~44세 가임여성 1만 명 대상, 이하 ‘조사’) 결과를 발표한 것과 맞물려있다. 본 조사는 보사연이 보건복지부의 의뢰를 받아 온라인 설문 형태로 실시했다. 이 조사는 지난 2017년 11월 말 23만 명이 청원한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한 청와대 답변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한 답변으로 청와대는 2010년 조사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던 임신중절 실태조사를 재개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 본 조사는 국가승인통계가 아니기 때문에 정부공식발표라 보기는 어렵다. 또 현행법상 낙태가 범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답변 결과가 과소추정 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조사는 우리 사회에서 낙태죄 폐지에 대한 인식 변화가 크게 일어났다는 것, 따라서 이제는 낙태죄 논의가 사회적 합의를 이룰 시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본 실태 조사 결과 중 가장 두드러지는 응답은 다음과 같다. △성경험이 있는 여성 10명 중 1명, 임신한 여성 5명 중 1명꼴로 인공임신중절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약 75.4%가 낙태죄 개정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낙태죄 개정이 필요한 이유 중 '인공임신중절 시 여성만 처벌하기 때문에'라고 한 응답자 비율이 66.2%로 가장 많았다. △‘낙태에 있어서 남성보다 여성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89.4%가 "사회인식이 그렇다"고 밝혔다. △낙태와 관련한 국가의 할 일(우선순위 1순위)은 ‘피임·임신·출산에 대한 남녀공동책임의식 강화’(27.1%)라고 응답한 비율이 가장 높았다.

 

태아 대 여성의 대립 구도를 넘어, 헌법재판소의 응답은?

2018 인공임신중절실태조사의 결과는 국가가 출산, 양육을 여성만의 문제로 규정해왔음을, 그리고 더 이상 이에 대한 개선이 미뤄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덧붙여,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선택권’의 대결이라는 대립 구도가 깨져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올 4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폐지 위헌 선고 여부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헌법 재판소는 사법권만 있고 입법권은 갖추지 않은 국가기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국민의 기본권과 관련된 법익 형량을 통해 사회의 갈등을 조정하고 합의의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선택권’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서 우리 사회는 주로 ‘생명권’을 공익에, ‘선택권’을 여성의 무책임한 ‘사익’에 대입해 왔다. 그러나 ‘선택권’은 여성이 출산과 임신중단을 모두 결정할 수 있는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말이다. 현행법 상 출산만이 유일한 합법적 선지일 때 여성에게 진정한 선택권이 주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 태아의 생명권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려해야 한다. 출산 후 안정적인 상황에서 양육되기 어려운 태아가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과연 진정한 의미의 생명권을 보장받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헌법재판소는 현재 낙태죄 처벌조항인 형법 269조 1항 등에 대한 헌법소원 심판을 심리 중이다. 지난 2012년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헌법소원에서 재판관 4:4로 합헌 결정을 냈다. 약 7년이 지난 지금,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2012년 결정에 참여한 재판관들은 모두 퇴임했으며, 진보 성향 재판관들이 이번 재판부에 다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을 구속하는 굴레로 작용해왔던 낙태죄 조항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이제는 확실한 매듭을 맺어야 한다. 국가와 남성의 책임을 함께 고려함과 동시에, 논의의 새로운 균형점을 마련해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그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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