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먼저'라면 정의보다 실용을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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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10월19일 18시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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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정부의 국정과제 1순위는 단연 ‘정의 실현’이다. 취임 당시부터 ‘적폐 청산’을 내세웠듯이, 국민을 위해서 부정한 것들을 뜯어고치겠다는 자세이다. 과연 정치, 경제, 사법, 외교, 대북 관계 등 사회 전반에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바쁜 듯하다. 그런데, ‘정의 실현’이라는 말은 듣기 좋으나 이상하게 결과를 보면 과연 이 정의가 정말 국민들을 위한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단순히 전임 정부 업적이라고 해서 뒤집어엎거나, 적폐 대상에게는 적용하지만, 정부에는 같은 기준을 적용하지 않거나 하는 등 과정을 보면 더더욱 그런 의구심이 든다. 정부의 정의 실현이라는 게 그저 야당에 대한 보복 혹은 압박에 지나지 않는 것도 같다.

 

<그들만의 정의>

 

이러한 의구심이 드는 이유는 정부의 정의와 내 정의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정의가 무엇인가’하는 논의는 고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마이클 샌델까지 이어져 왔다. 100명이 있으면 100개의 각기 다른 정의에 대한 기준이 있다. 그만큼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런 실체 없는 추상적 가치를 국정 활동의 뼈대로 잡으면,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 정부는 부실건물도 되고 고급주택도 된다. 심지어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자재 더미에 불과할 수도 있다. 정부는 이상적인 집을 지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부만 보는 뼈대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정의가 좋은 건 알지만, 정의로 뼈대를 세운 고급주택은 이데아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경제에 정의를 들이밀 때>

 

안타깝지만 정부가 운영해야 할 국정은 이데아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 있다. 그 괴리가 가장 처참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다름 아닌 경제다. 경제에서까지 사회정의를 실현하려고 한 산물이 바로 소득주도성장이다. 문재인 정부가 경제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몇 번이나 역설한 이유는 바로 개발중심성장 때문이다. 이는 무한경쟁을 야기해 대기업의 독점을 유발하고, 근로자의 권리를 약화시켜 비정규직을 야기한다. 정부는 이렇게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경제 구조뜯를 뜯어고치겠다는 의지를 몇 번이나 표명했다. 비정규직, 저소득층, 중소기업 등 상대적 약자에 대한 가치판단을 우선한 것이다. 그래서 나온 소득주도성장은, 저소득층을 포함한 서민의 소득을 늘리면 그들이 소비를 늘려 내수를 활성화시키겠다는 계획이다. 이론만 보면, 상대적 약자도 양성하지 않으면서 내수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최고의 정책이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하다. 현재 세계는 전에 없는 호황을 누리는데 우리만 ‘잃어버린 20년’ 노선을 걷고 있다. 기업의 투자와 고용이 줄어 내수 진작은커녕 전반적인 경기가 얼고 있다. 심지어는 얼어붙은 내수를 녹이고 고용을 늘리려고 세금은 계속 투입되고 있다. 정의가 실현되길 기대했던 약자들은 고용 사각지대에 몰려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빗대 ‘달에 걸고 하는 약속’이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그 어떤 분야보다도 철저하게 현실적이어야 하는 경제에 이상적인 사회정의를 앞세운 결과는 처참하다.

 

<실용성보다 적폐청산>

 

전임정부에 대한 정의 실현은 가혹할 정도다. 정치싸움은 차치하고서라도, 국민을 위한 인프라까지 실용적인 가치를 계산하지 않고 정의실현을 앞세우는 것은 또 다른 적폐나 다름없다. 그 예시 중 하나가 4대강의 보 개방이다. 문재인 정부는 취임 당시부터 보를 개방하겠다고 약속해왔다. 녹조 심화 등의 문제가 있지만, 그보다도 4대강 사업은 절차적 정당성 결여, 공사 과정에서의 비리 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적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 벌써 16개 중 13개의 보를 개방했다고 한다.

 

 그러나 해체하는 작업에도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었던 것을 다시 원상 복귀시키는 것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짓이다. 보를 개방하는 데는 설치할 때와 맞먹는 비용이 든다. 아무리 문제가 있는 사업이라고 해도 실효성이 있다면 유지하고, 문제점을 보완하는 방식을 택해야 하는 게 실용적이다. 실제로, 덕분에 홍수·가뭄 피해를 덜 본 지역에서는 지역신문, 농어민신문 등에 보 개방을 반대하는 기사를 실으며 반대하고 있다. 심지어 여러 단체가 연합해 반대 기자회견까지 열었으니 실효성은 인증이 된 셈이다. 이러한 실용적 쓰임을 무시한 채 정의를 실현하겠다며 개방하는 데 든 비용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다만 개방하면서 생긴 전력 매출 손실액만 243억을 초과한다는 것만 기사화되었을 뿐이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그들만의 정의’를 우격다짐으로 실현시키는 게 아니라 실익이다. 실익을 철저히 따져보지도 않고 국민의 세금을 쏟아부은 것은 정권만 바뀌어도 ‘신(新)적폐’가 될 것이다.

 

<심판만 하면 후퇴뿐>

 

‘정의 실현’ 정부의 근본적인 문제는 실용적 쓰임이 없다는 데 있다. 정의를 실현할 때는 오로지 심판뿐이다. 전 정권 사업들을 죄다 심판하며 백지화시키고, 전임정부 관계자들을 구속하기만 할 뿐이다. 다음에 정권이 바뀌어서 이 짓을 똑같이 반복하게 되면 우리 사회는 도대체 몇 년을 뒷걸음질 쳐야 하나. 우리 정치문화는 반세기도 전에, 자고 있던 사람 눈에 불빛을 쏘아대며 ‘인민군 편이냐, 국군편이냐’ 다그치던 그 문화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기존의 후진적인 정치문화에 열심히 기여하고 있을 뿐이다.

 

<고(故) 박완서의 실용주의>

 

한국문학의 거장인 고(故) 박완서는 전쟁 증언, 여성주의 등 다방면에서 뛰어났지만, 특유의 냉철한 현실인식은 특히 뛰어났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예리한 현실 묘사는 그의 가치관 밑바탕에 깔린 실용주의적 사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작품에 관습이나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가장 좋은 것’을 찾아 행동하는 실용적 인물들을 많이 등장시켰다. 양공주와 비슷한 시선을 견디면서도 가족들을 위해 미군 PX 부대에서 일했던 본인이 그랬고, 가부장제 관습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가장 우선적 욕구를 위해 행동한 ‘아주 오래된 농담’의 현금이 그랬다.

 

실용적이라는 것은 결국 내게 가장 좋은 것이다. 내게 가장 큰 이익이 될 만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옳고 그름의 영역에서 벗어난 본능의 영역이다. 그래서 실용주의적 관점에서는 타인의 행동도 가치판단을 유보한 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처럼 생존의 본능 앞에 시시비비가 올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이해관계에 따른 가치의 우선순위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타인에 대한 속단을 유보할 수 있다. 박완서의 작품에서 ‘속물 독립운동가’ 같은 입체적이고도 현실적인 인물을 계속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다양한 시각으로 타인을 넘어 인간사를 조망할 수 있게 하는 실용주의는, 그래서 그 무엇보다도 인간적이다.

 

문재인 정부가 정말 ‘사람이 먼저’라고 생각한다면, 내로남불이 될 수밖에 없는 정의실현보다는 인간적 실용성을 우선해야 한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에 마지막으로 박완서를 덧붙이자면, 그의 작품 ‘미망’을 통해 얘기하고 싶다. 근·현대의 대서사시를 담은 ‘미망’에는 근대화를 마주하는 인물들의 자세가 묘사된다. 허정인은 그의 논문에서 그런 근대화의 양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근대의 극복은 근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위에 올라타서 그것과 관계하며 그것을 변용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 … 근대를 폐기처분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의 폐허 위에서 쓸 만한 것을 찾아 다시 집을 짓는 행위, 쉼 없이 재출발하는 그 행위가 근대를 다시 쓰고 극복한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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