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 한국사회를 덮치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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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사건이 한창이던 그 때, 페이스북에서 한 게시물을 봤다. 제목은 ‘오늘자 강남역 개념녀’.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아서는 안된다. 일반화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라는 인터뷰를 한 여성의 사진이 함께 올라왔다. 좋아요는 800개가 넘었다.
댓글을 눌러보니 또 다른 여성의 인터뷰가 올라와 있다. 이번에는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인터뷰다. 사진과 함께 ‘우측X 골X 뚜껑열고 뇌에 가젤펀치 꽂아버리고 싶다.’는 댓글이 올라왔다. 다른 댓글에는 ‘얼굴과 인성은 비례한다’, ‘예쁜 애는 개념도 예쁘다’며 이른바 ‘개념녀’를 칭찬했다. 모든 댓글을 읽으면서 화가 나기 보다는 무서웠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편함이 밀려왔다. 사회에 깊게 스며들어 있어 깨닫지 못했던 여성혐오가 갑자기 피부에 와닿았다.
여성혐오란… 타자화된 여성성
여성혐오란 학술용어 ‘misogyny’의 한국적 표현이다. 이는 생물학적 의미의 ‘여성’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misogyny’의 여성혐오는 남성의 시선으로 여성을 타자화, 대상화하여 사회, 구조적으로 억압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성의 특성과 행동 등을 규정짓는 것이 남성이며, 이처럼 여성성을 객체화시키는 사회적 불평등과 성차별이 실제적 의미의 여성혐오다. 여기서 여성성의 기준은 주로 성적인 것이다. 여성은 예뻐야 하며, 그것은 남성에 의해 여성의 성적 가치를 상품화하는 것이 된다. ‘강남역 개념녀’ 사건 역시 사건과 연관성 없는 외모로 평가받고, 남성의 관점을 기준으로 ‘개념녀’라는 이름으로 다시 타자화 되어 일종의 여성혐오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여성혐오는 이렇게 규정된 여성성을 타파하고자 하는 행동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까지 이어진다. 여성은 성적으로 정숙하거나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을 벗어나는 여성들에게는 ‘김치녀’나 ‘보적보’같은 폭력적인 언행이 이어진다. 여성혐오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여성에게 들이대는 잣대와 프레임을 벗기고 동등한 존재의 인간으로서 여성이 인정받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성혐오는 전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특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실제 여성에 대한 혐오는 아주 오래된 것으로 이것이 여성혐오의 일종이라는 것 조차 깨닫기 힘들 정도로 사회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 한국 사회 역시 아주 오래 전부터 여성에 대한 차별이 있어왔고, 이는 모던걸 – 신여성 – 된장녀 – 김치녀 등의 프레임으로 계속해서 이어져왔다.
여성혐오는 왜 발생하는가
문제는 항상 수용적이던 여성들이 이러한 프레임에 대항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발생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여성들은 가부장적 권력체계에 완전히 길들여져 있었다. ‘김여사’처럼 일반적 여성을 대상으로 발생하는 여성혐오에도 그것을 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거나 관심두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차별’이라는 목소리에 ‘꼴페미’라며 극단적 여성주의자로 몰아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기득권층에 대항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힘’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남성들 역시 자신의 권력에 의문을 품고 빼앗으려고 하는 여성들이 불편해진다. 지금까지 잘 지켜온 힘의 주도권이 흔들리는 상황이 오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욕구는 다시 여성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여성혐오로 발현되는 것이다.
여성들의 태도 변화는 경제적 구조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예전에는 전적으로 남성이 경제활동을 하고 가족을 부양했다. 남성의 임금에는 가사노동을 하는 여성의 임금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성의 경제활동 인구가 급격히 높아졌다. 남성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는다는 생각이 들고, 경제적 우위에 있던 과거에는 사회적 지위가 낮은 여성에게 ‘베풀 수 있다’라고 여겨졌던 상황들이 부담스러워진다. 여성 역시 직접적인 경제적 활동을 통해 남성보다 적은 임금과 유리천장, 경력단절 등 불평등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서로의 불만은 결국 성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진다. 실질적인 문제는 사회적, 구조적 차별에서 기인함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차장, 여성할당제 등의 표면적 문제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분노의 대상은 여성이 아니라 차별적인 사회가 되어야 함에도 아직까지 남성성을 버리지 못한 사회에서는 분노 표출의 대상이 그들보다 낮다고 여겨지는 여성이 되고, 그것이 잘못 발현된 것이 여성혐오인 셈이다.
사회적 갈등 조장?... 여성혐오 타파!
여성혐오 현상은 ‘메갈리아’가 등장하면서부터 더욱 심화된 양상을 보인다.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메갈리아는 그 시발점인 ‘메르스 갤러리’와 여성과 남성의 지위를 바꾼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을 합쳐 만든 인터넷 커뮤니티이다. 이들은 ‘미러링’이라는 수단을 통해 남성에게 똑같이 그들의 언행을 되돌려주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김치녀’처럼 ‘한남충’이라는 단어를 생산하고 이를 사용함으로써 남성이 여성성을 기준 짓고 비하하는 것처럼 여성혐오 역시 똑같이 대하겠다는 의미를 가진다.
일각에서는 과격한 행동이 아니냐, 이것이 오히려 남성혐오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가장 많이 듣는 말은 ‘그만둬라’다. 물론 이들의 목적은 여권 신장이지만 때로는 과격하고 정당하지 못한 행동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성차별을 조장하는 일에 일침을 두고 여혐문제를 공론화시키는 한 방법이라는 측면에서는 획기적인 수확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이 급진적 행동을 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여성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폭력적이거나 인신공격은 자제해야 하지만 여성혐오에 대한 변화적인 태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필요악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메갈리아 등의 여성 단체가 남혐을 조장한다고 하는데 실제적인 남혐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혐이 여성을 싫어한다는 의미가 아닌 것처럼 남혐 역시 남성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그들은 기득권층이며 역사적, 사회구조적으로 차별받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껏 발생한 여혐 상황에는 관대하다가 남성성에 조그만 위해가 가해지는 순간 바로 ‘남혐’이라는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아직까지 남성중심적 사회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과연 남혐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연대하자.
여혐 현상은 단순히 여성과 남성의 대결적 구도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극단적 논리로 나뉘어져서는 안된다. 상황의 표면적인 부분만 보고 서로 헐뜯고 비난하기 보다는 본질적 문제를 봐야한다. 여성혐오를 생산하고 유지시키는 사회구조를 인식하고 타파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노력에는 성별 따위 유의미하지 않다. 단지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불평등을 평등으로 바꾸려는 태도가 필요할 뿐이다.
여성들은 ‘조심해라’는, ‘지켜주겠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규정된 ‘약한’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분법적인 사고로 규정짓고 싸우기 보다는 구조의 문제를 인식하고 여성혐오를 만들어 내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 지금은 평등한 사회로 가는 과도기적 상황이다. 어느 순간이든 고착화된 이데올로기를 깨고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가는 것은 어렵다. 끊임없는 토론과 성찰만이 평등한 사회로 이끌 수 있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모두가 함께 연대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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