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영혼의 경제학 여정 <1> POP QUIZ, 연속 3회 “0”점을 받고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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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서강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한 한 신입생의 봄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고교 교복을 벗고, 입시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고, 무한한 자유를 즐기면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며 막걸리 잔을 높이 들고 이탈리아의 세기의 테너 마리오 란자의 “Drink! Drink!”를 목 터지게 외쳤다.이 외침은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학생들의 생활을 배경으로 제작된 “황태자의 첫사랑”이란 영화에서 마리오 란자가 맥줏집의 식탁 위에 서서 생맥주 잔을 들고 신나게 부르는 “축배의 노래”에 나온다. 나는 대학 졸업 직후 독일에 갈 기회가 있었을 때 이 집에 들러 맥주를 마시며 흉내를 내 보았다.
내가 숙식을 해결했던 하숙집은 경의선에 인접해 있었다. 지금은 그 기찻길이 산책하기 좋은 숲길로 조성되어 있다. 기차가 지나갈 땐 모든 소리가 기차 바퀴 소리에 흡수됐다. 그러나 그 소리는 어쩐지 고향 생각을 불러일으켜 오히려 좋았다.
우리 하숙집 마당에는 세면 센터(?)가 있었다. 하나뿐인 공용 수돗물 꼭지가 그곳에 있어서 붐비는 시간에는 시장터를 방불했다. 공용 화장실 앞 줄서기 풍경도 흡사했다. (60년대 우리 가정집의 구조는 대부분이 이런 형태였고, 연료는 구공탄(九孔炭)이었다. 영하의 날씨에도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몸은 동네 공중목욕탕에서 가끔 씻었다.
당시 한 하숙집에 평균 8명 정도가 있었다. 방 하나에 두 사람이 함께 기거했다. 책상 두 개를 놓고 둘이 누우면 꽉 찼다. 잠을 자는 공간이 식당도 되고, 빽빽하게 둘러앉으면 술집도 됐다. 술안주는 김치가 대세였다.
하숙집 대항 농구 시합은 이런 구성을 배경으로 가능했다. 우리들은 나름대로 작전을 짜고 시합에 임했다. 막걸리 내기였다. 지는 하숙집 팀이 막걸리 값을 냈다. 이기면 좋아서, 지면 화나서, 하숙집에 돌아와 또 마셨다.
학기 초에 신입생들은 각종 막걸리 모임에 초대되었다. 학연, 지연에 관련된 선배들이 환영모임을 했고, 다양한 서클들이 초대해서 가입을 권유했다. 이래저래 막걸리 사발을 수없이 들어 비우고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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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재미있고 설레는 모임은 “미팅”이었다. (요즈음의 세대들은 이런 모임을 뭐 라 부르는지?) 다른 대학 여학생들과 단체로 만나 대화하고 사회자 지도에 따라 오락(손수건 돌리기로 노래하기, 포크 댄스 등)도 하는 신기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당시 고교 시절에 남학생이 여학생과 교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경제학과 과(科)대표와 사교성이 뛰어난 몇몇 클라스 메이트들이 서강대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화여대나 연대, 홍대 앞의 다방(요즈음의 커피숍, 카페)이나 빵집에서 죽치고 있으면서 미팅 교섭에 나서곤 했다.
이대는 기숙사가 있어서 교섭이 상대적으로 쉬웠다. 당시에는 모바일 폰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있어야 남녀 간 수급 균형이 가능한 인원을 동원할 수 있었다. 하숙집에는 전화기가 한 대 있었는데 주인 안방에 있어서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사용할 수 있었다.
<사진은 대학시절의 필자. 1967년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
이런 즐거운 모임들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내는데, 사건이 터졌다. 경제학 원론 시간에 치른 “POP QUIZ” 테스트에서 연속 3번 “0”점을 맞은 것이다. POP QUIZ는 예고 없이 보는, 10분 정도의 답안 작성을 주는 시험이다.
당시 경제학 원론 강의는 남 덕우 교수님이 담당하셨다. 교재는 Paul Samuelson의 “Economics”였다. 매우 두꺼운 책이었다.
영문 원서를 그대로 사용했다. 따라가기 참 힘들고 벅찼다. 거기에 더해서 매 주마다 1회씩 요일 예고가 없는 10분짜리 시험을 보았다. 서강대학의 교육 방침이었다.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하라는 취지였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자유와 즐거움이 가득한 캠퍼스 라이프를 마음껏 즐겼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했다. 연속 3주 3회의 Quiz 시험에서 모두 “0”점을 맞은 것이다. 충격이었다. 이럴 수가!
POP QUIZ 성적이 중요한 것은 이 점수들의 합계가 최종 학점을 결정할 때 1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계속 이렇게 나쁜 점수를 맞으면 이 과목에서 “A” 학점을 받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전공 필수 과목에서 “C”이하의 학점이 나오면 나의 원대한 계획이 물거품이 된다. 나는 경제학 교수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전남 광주에서 서울에 온 촌놈이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가면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불안과 반성이 함께 몰려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막걸리 잔을 던지고 “Principles of Economics”를 손에 들었다. 영어 사전과 함께. 이 교과서는 매우 친절하게 경제 이론을 설명했지만, 나의 영어 실력으로는 문장과 단어가 어려웠다. 전체 700페이지가 넘는 내용을 두 학기에 모두 소화하는 계획이었는데, 남 교수님은 첫 Chapter부터 끝 Chapter까지 모두 강의하셨다. 글자 크기도 적어 한 시간 강의를 예습하는데 3~4시간이 걸렸고 복습하는데 1시간 이상이 필요했다.
바라고 바랐던 휴강은 한 학기 중 한 번도 없었고, Pop Quiz도 거르는 적이 없었다. 고난의 행군이었다. (당시 담당 조교가 후에 중앙대 경제과 교수로 봉직한 김인기 선배였는데, 우리 학생들에겐 원망의 대상이었다. 퀴즈 문제와 답안지를 들고 나타날 때 얼마나 미웠던지. 감기라도 걸려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우스겟 소리가 우리들 사이에서 흔하게 들렸다.)
당시 서강대 도서관은 현재의 본관 2층에 있었다. 재학생 수가 400명 수준이었고 60년에 개교한 대학이라 규모가 매우 아담한 도서관이었다. 현재 총장실, 부총장실, 회의실 등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서고로 사용되었고, 복도가 공부하는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내려 보면 서강대 정문과 그곳으로부터 본관을 향해 올라오는 길, 농구장, 배구장, 그 주변의 캠퍼스 풍경이 보였고, 멀리에는 당인리 화력 발전소와 경의선 철도, 그리고 이 둘 사이의 넓은 평야에는 채소밭들이 펼쳐져 있었다.
이 복도가 이제 나의 주(主)생활 공간이 되었다. 하나의 테이블을 아침 일찍 선점해서 책과 노트를 올려놓고 강의실을 오갔다. 하숙집이 학교와 가까운 곳에 있어 항상 쉽게 선점할 수 있었다. 도서관은 평시에는 밤 10시, 시험 기간에는 11시까지 개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는 통행금지 시간이었다.
중간고사(학기당 2회,) 기말고사 기간에는 아침 식사를 자제했었다. 시간 절약도 필요했지만 머리를 가장 맑게 유지하기 위해서다.
결과는 좋았다. 그 이후 Pop Quiz는 대부분 8점 이상이었고, 경제학 원론은 1, 2학기 모두 “A” 학점을 얻었다. 당시 학점은 절대 평가였다. 과목에 따라서는 “c” 학점 이하만 주는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대학 생활 전체를 놓고 회고해 보면 이 시기에 가장 치열하게 공부했다.
경제학 원론, 거시경제학, 수리 경제학, 국제경제학 등은 모두 영어 원서로 배웠는데, 후에 미국의 대학원에 가보니 그곳 학부 학생들이 들고 다니는 교과서들이었다. 서강 경제학과의 60년대 교육 수준은 당시의 유일한 선진 경제 강국이었던 미국과 동급이었다. 이런 훈련을 받고 갔기 때문에 미국 유학에서 고생을 덜 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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