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협의 박물관 이야기 <45> 몽골국립박물관 (National Museum of Mongolia) 칭기즈 칸이 유라시아에 남긴 자취를 이곳에 모두 담아내면 어떨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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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은 ‘바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질풍처럼 대평원을 가르던 몽골의 기병들은 먼지가 가라앉자 역사의 뒤안길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유목민은 바람이 그러하듯이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머물면 생명력을 잃고 동화된다. 그래서 몽골의 쿠빌라이가 중국을 정복했지만, 그 자리에 머물자 중국은 결국 몽골을 다시 어리석고(蒙) 낡은(古) 족속이라 조롱해 마지않았다. 2세기에 걸쳐 한때 세계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인들은 곳곳에 거대한 자국을 남기고 다시 그들의 고향 몽골 평원으로 돌아와 있다. 그리고 산업화시대 몽골의 기마병들은 이제는 말을 타지 않는다. 역사는 몽골의 칭기즈 칸이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정복자였음을 말해주지만, 현실에서의 몽골은 역사가 심어준 이미지를 배반한다. 객관의 눈으로 보면 현실의 몽골은 자원이 풍부한, 그러나 인구 겨우 3백여만 명의 가난한 나라일 뿐이다. 그래서 몽골인은 중국이 자신들을 굳이 몽골 대신 몽고(蒙古)라 칭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울란 바르트와 베이징을 오가는 열차는 오늘도 몽골에서 생산해내지 못하는 대부분의 생필품을 중국의 시장에서 사 가려는 몽골인들로 붐빈다. 유목 사회의 시대적 적응이 늦어진 대가를 치르는 중인 것이다.
산업혁명 이전의 세계역사에서 유목 사회의 역할에 처음 주목한 학자는 14세기 이슬람 학자 이븐 할둔(Ibn Khaldun)이었다. 할둔에 따르면 유목민은 수렵채집민과는 달리 농경사회의 변방에 거주하며 그들의 발달한 문물에 접근할 수 있는데 더하여, 거친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생활방식이 요구하는 근검절약과 연대와 협동이라는 중요한 덕목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기동력이 뛰어나지만 다루기 힘든 말이나 낙타를 사육하는 집단에서는 많은 수의 동물과 사람들을 최적의 장소로 인솔해 나아갈 수 있는 출중한 지도력의 확보가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요소들이 잘 결합하면 그것은 곧 강력한 군사력으로 변환될 수 있었다. 반면 정착 생활을 하는 농경사회는 일찍이 생산성의 향상과 노동의 분화로 발전된 문명을 이루었다. 다만 문명의 발달은 계급의 형성과 불평등의 제도화, 그리고 지도층의 사치와 나태, 향락의 유혹을 불러들였다. 할둔은 근검절약, 단체정신이 베인 유목민(Umran Badawi)의 생활양식을 '아사비야(Asabiya)' 라 불렀는데 바로 이 ‘아사비야’가 도시를 이루어 정착 생활을 하는 농경민(Umlan Hadhari)에게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그러한 이유로 기강이 해이해진 농경사회는 단결력을 갖춘 유목민에게 정복되지만, 유목민 역시 농경사회의 문명에 안주하여 동화됨으로써 정복과 동화의 주기가 반복된다는, 당시로서는 탁월하게 창의적인, 역사이론을 제시했다. 돌이켜보면, 칭기즈 칸의 몽골군대가 농경 문명사회의 정복에 한창 나서고 있을 시기에, 저 멀리 아프리카 튀니스의 한 이슬람학자가 몽골의 장래를 예언하고 있었던 셈이다. 할둔의 예언대로 몽골제국은 부족들이 단결하여 바람처럼 움직이던 유랑 생활을 잊고 정복한 농경 정주민(定住民)의 문명에 동화됨에 따라 오늘의 운명을 맞았다.
2012년 나는 정년퇴임으로 자유로운 생활이 허락됨에 따라 가보고 싶은 여행지(旅行地) 목록을 작성했는데, 몽골은 세 번째에 올라 있었다. 차례가 되어 몽골을 방문했을 때 찾은 몽골국립박물관은 얼른 보아 작고 초라해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몽골제국의 아우라를 느낄 수 없어 아쉬움이 남았다. 박물관 입구의 마당에는 ‘칭기즈 칸의 이름이 새겨진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는 ‘칭기즈 칸 돌(Chinggis Khan’s Stone)’이 서 있었다. 그런데 원래의 비석은 러시아의 예르미타시 박물관에 있고, 이곳의 비석은 복제품이라 했다. 이 비석은 1224~1225년 사이 칭기즈 칸과 그의 조카 Esunkhe가 현재 러시아의 Nerchinsk 마을 부근에서 Sartuul부족과의 전쟁을 치르고 세운 것으로, Esunkhe가 530m 거리의 과녁을 맞혔다는 문구가 적혀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은 비석이다. 그런데 비석이 세워졌던 지역이 이제 러시아 영토이다 보니 그를 발견한 것도, 문자를 해독한 것도 러시아 학자였기에, 그런 연유로 러시아의 국립박물관에 보관하게 되었다 한다. 이러한 사례에 접하며 나는 유목민이 세운 광활한 제국의 역사를 국가박물관에 담아내는 일이 얼마나 복잡다단한 작업인가를 새삼 느꼈다. 그러나 일단 박물관에 들어가 열 개의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몽골국립박물관의 전시가 전문적으로 매우 잘 짜여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반도의 일곱 배에 달하는 광활한 영토 내에서의 인간 정주의 역사를 전문성 있게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몽골에서 인류가 살기 시작한 것은 약 80만 년 전이라 한다. 그래서 전시는 구석기유물부터 시작된다. 제1실의 구석기, 중석기, 신석기 실을 지나면 2전시실에서는 몽골지역의 청동기, 철기 시대에 등장한 고대 유목제국인 흉노, 돌궐의 유물을 보여준다. 3전시실이 있는 2층은 몽골의 문화 전반을 소개하는 장소로서 다양한 몽골의 전통의상과 장신구를 집중적으로 모아 놓았다, 3층으로 올라가면 4전시실에서 드디어 몽골제국에 관한 유물이 넓은 공간을 차지하여 전시되고, 5, 6 전시실은 몽골의 생활문화를, 그리고 7전시실에서는 17~20세기 초 청나라 지배 하의 몽골, 8~10 전시실은 1911년 이후 소련영향권 사회주의 시기와 1990년대 민주주의와 개혁의 시기를 주제로 전시실을 꾸며놓았다. 전시 형태를 보면 몽골국립박물관은 고고학, 인류학, 민속학, 역사학 분야의 자료를 골고루 모아 놓은 종합적 박물관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 대신 모든 요소를 망라하다 보니 몽골박물관은 너무 평범하고 특색 없는 박물관이 되고 말았다.
만일 내가 전시계획안을 만든다면 어떻게 했을까? 인류학도로서 심심찮게 해보는 놀이다. 만일 내가 계획을 짠다면 몽골을 연상할 때 세계인이 떠올리는 칭기즈 칸과 몽골제국을 중심에 놓고 전시를 계획할 것이다. 나의 몽골박물관 방문 시 관람하는 가운데 가장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전시물은 몽골제국실의 한가운데를 차지한 기마 병사(장군)의 실물 모형과 그의 양편에 세워놓은 백기(白旗)와 흑기(黑旗)였다. 백기는 몽골제국을 상징하는 평화시의 깃발이고, 몽골군대를 상징하는 흑기는 전쟁시의 깃발이다. 이러한 전시는 전쟁터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전시를 관람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라서 좋아 보였던 것이다. 여기에 만일 달려오는 몽골 기마병들의 동영상을 배경으로 깔아 입체감 있는 전시장을 꾸리면 지루한 관람 중간에 활기도 불어넣지 않을까?
1999년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두고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지는 지나온 천 년대(1001년~1999년) 기간에 세계적으로 가장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을 선정했는데, 그 인물이 바로 칭기즈 칸이었다. 칭기즈 칸은 인류 최초로 아시아와 유럽을 포괄하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제국을 건설한 정복자로서 유라시아에 걸쳐있는 다양한 민족 간의 문화적 교류의 촉매 자이었으며, 군대조직에 십진법을 처음으로 도입하는 등 세계전술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런 점에서 칭기즈 칸은 세계문화변동의 촉발자로서 인터넷 발명 700여 년 전에 이미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문을 연 선구자였다. 워싱턴포스트지는 흥미롭게도 몽골제국군대가 유럽에 흑사병을 전파한 사실도 세계사의 물길을 긍정적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평가했다. 즉 역병의 만연이 초래한 노동인구의 급격한 감소가 봉건주의의 몰락과 노동계급의 분화를 가져와 근대의 태동에 이바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을 참작하면 몽골제국에 관한 전시 내용은 현재의 몽골국경 내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전성기 몽골제국 시대의 범위로 확대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달리 말하자면, 몽골제국의 영향 아래 세계문명사적인 변화를 겪은 여러 지역에서의 이야기를 전시의 주제로 삼아 계획안을 마련해보면 어떨까? 세계로 퍼져나간 몽골의 음식문화나 생활양식을 문화사적으로 풀어내는 전시나, 몽골과의 전쟁이나 접촉과정에서 발생한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사항을 지역과 항목별로 분류하여 인문학적 상상력을 더하여 보여주는 전시 등, 다양한 가능성을 발굴해나간다면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방식의 독특한 박물관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가능한 박물관이 몽골의 박물관 말고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평범해 보였던 박물관에서의 시간이 다시 즐거워진다.
(후기 1)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오랜 세월 몽골에서는 칭기즈 칸의 선양사업이 어려웠다 한다. 몽골이 청나라의 지배 아래에 있을 때는 몽골과 청 사이에 억압과 갈등이 잦았고, 1920년대 이후 소련의 위성국가가 된 공산주의 시절에는 칭기즈 칸이 폄하되고 함부로 말하는 것도 금기였다고 한다. 칭기즈 칸이 복원된 것은 1990년 민주화 이후 몽골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면서부터이다. 그러나 공산주의 시절 유일 정당이자 현재에도 유력 정당인 몽골 인민당은 여전히 힘을 발휘하여 몽골 국회의사당과 국립박물관이 있는 광장의 이름을 <칭기즈칸광장>에서 사회주의혁명의 영웅 <수흐바타르>의 이름을 딴 광장으로 다시 환원시켰다. 상징을 둘러싼 문화전쟁은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후기 2) 울란 바르트에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독립운동과 몽골 사회를 위한 의료봉사활동을 한 이태준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2회 졸업생인 이태준 선생은 1911년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중국으로 망명한 세브란스 1회 졸업생 김필순 선생을 따라 중국으로 온 뒤 애국지사 김규식 선생의 권유를 받고 몽골로 활동무대를 옮겨 독립운동과 봉사활동을 펼쳤다. 김필순 선생은 나의 종조모(從祖母) 님인 김필례 여사의 큰 오라버님이어서 <이태준 기념관>에 걸려있는 그분의 사진에 묵례를 드렸다. 김필례 할머님의 친인척 중에는 김마리아, 김규식, 김염 등 독립운동가가 많다.
최협은 누구? 서울대학교에서 인류학을 전공하고 미국 켄터키 대학교에서 인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남대학교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한국문화인류학회 회장, 대통령자문 21세기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부시맨과 레비스트로스>, <다민족 국가의 민족문제와 한인사회>(공저), <호남사회의 이해>(편저)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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