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협의 박물관 이야기 <42>루브르박물관 (Le musée du Louvre)…세계의 연인 ‘모나리자’의 박물관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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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박물관>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모나리자>가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고의 걸작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매년 8백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루브르를 찾는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하다. 물론, 이는 코로나19 사태 이전의 이야기이긴 하다.
코로나19가 세계를 강타해 혼란스러웠던 작년, 한 신문(동아일보 20. 5. 28)에 흥미로운 가십성 기사가 떴다. 프랑스의 기업가 스테판 디스탱앵(Stephen Dysteng-en)이라는 사람이 코로나 사태로 파산 직전에 놓인 프랑스 문화예술계를 지원하기 위해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를 매각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루브르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회화 5점과 드로잉 22점을 가지고 있으니 그 가치가 40조 원으로 평가되는 모나리자를 높은 가격에 처분해 프랑스 문화예술의 미래에 투자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가 모나리자를 매각할 리 만무하니 이는 단순히 문화예술계가 처한 위기상황에 대해 주의를 환기할 목적이었을 터이다. 그나저나 모나리자의 추정 평가액이 40조 원에 달한다는 소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모나리자는 몇 개가 더 존재한다. 그래서 영국박물관과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박물관에도 모나리자가 있다. 이들 중 루브르박물관의 소장품이 가장 뛰어난 불후의 명작으로 꼽힌다.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한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503년경에 그리기 시작하여 그가 죽기 2년 전인 1517년경에 이르러서야 완성한 작품으로 다빈치가 가장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기에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자신이 간직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흔히 프랑스의 첫 번째 르네상스형 군주 국왕으로 불리는 프랑수아 1세(François 1er(1494~1547)의 초청을 받아들여 1516년 프랑스로 이주하였는데,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왕 중에 최초로 미술품 컬렉션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19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사망하자, 모나리자는 그를 프랑스로 초청했던 프랑수아 1세에게 넘겨져 왕가의 소장품이 되었다. 그러던 것이 프랑스 혁명 이후 혁명지도부의 방침에 따라 1797년부터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에 상설 전시되어 루브르를 대표하는 작품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모나리자>가 프랑스 왕가의 소장품에서 루브르박물관의 전시품으로 바뀌는 변화는 프랑스 시민 혁명이 가져온 결과물이었다. 프랑스혁명 이전까지의 상황을 보면, 16세기의 프랑수아 1세가 미술품 컬렉션을 시작한 이래 18세기 루이 16세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규모의 예술작품들이 왕실에 의해 수집되었고, 이들은 여러 왕궁에서의 장식품이나 소장품으로 활용되었는데, 프랑수아 1세의 경우 그의 수집품은 퐁텐블로 성(Château de Fontainebleau)에 모아두었기에 이를 사람들은 ‘퐁텐블로 박물관’이라 불렀다.
1789년 5월 혁명이 발발하고, 그해 11월에 교회 재산의 국유화가 단행됨에 따라 엄청난 예술적, 역사적 유산이 하루아침에 종교적인 맥락에서 분리되어 국가재산으로서 공공영역의 범주에 포함되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1792년 4월에는 망명자들의 재산과 왕립 아카데미, 왕의 컬렉션도 국가의 문화유산이 되었고, 8월에는 베르사유를 비롯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왕실 소유 작품들을 루브르로 옮기도록 하는 법령이 제정되었다.
이 당시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de Robespierr)의 측근으로 문화계의 독재자로 불린 쟈크 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 1748~1825)는, 그 당시 공공박물관 건립을 위해 구성된 박물관전문위원들의 혁명 정신 부족을 비난하면서, 왕궁이나 귀족의 거처, 종교시설 등에 소장되어 대중에게 공개된 적이 없는 작품들이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될 수 있도록 조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특히 튀일리궁전(Palais des Tuileries)과 생 오귀스탱 성당(Saint-Augustin)에 있는 소장품들을 루브르로 옮기는 계획을 밀어붙였다.
여담 삼아 한 마디를 덧붙이면, 쟈크 루이 다비드는 현재 루브르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회화 작품 중 두 번째 크기의 대작인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을 그린 화가로,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자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이후 나폴레옹 1세의 정치 체제에 협력하는 대가로 나폴레옹 황제의 궁정 화가가 되어 활동한 인물이었다.
그 당시 프랑스의 많은 사람이 루브르궁을 국가의 공공박물관으로 지정하는데 동의한 이유는 루이 14세가 베르사유궁을 지어 거처를 옮긴 뒤 루브르궁은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 건물로 사용되어 당시 문화예술인들의 활동공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루브르박물관으로 유물을 옮기는 작업은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넘어야 할 장애물은 소위 구체제(Ancien Régime)의 상징을 파괴해야 한다는 여론이었다. 그래서 1793년 국민의회는 왕권과 관련된 기념물을 없애라는 명령을 발동하기도 하고, 생드니에 있는 왕의 무덤을 파괴하거나, 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중앙 문과 왕의 갤러리에 있는 조각상들이 제거되는 반달리즘이 일부 용인되었다.
이러한 반달리즘에 대응하여 부정하고 싶은 과거의 상징일지라도 기념물들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존재해 타협의 여지를 만들었다. 1790년 10월 13일에 발족한 ‘기념물위원회’(Commission des monuments)가 제시한 견해가 그중 하나로서 예술가와 학자로 구성된 동 위원회는 모든 기념물은 ‘역사의 발자취’로서 국가 소유의 문화유산으로 간주해 보존 대상이 된다는 의견을 냈다.
동 위원회가 12월에 발표한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지정된 모든 기념물은 국가 소유이다. 그러므로 모든 프랑스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83개의 각 도 départements 에 골고루 소장되어야 한다. ② 모든 국가 기념물은 각 지방의 시내 한가운데 이미 교육적인 기능을 지닌 건물에 ‘박물관’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곳에 소장될 것이다. ③ 박물관은 찾기 쉬운 곳에 있어야 한다. 곧 폐쇄될 곳이거나 다른 용도가 없는 교회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공공박물관으로서의 루브르는 프랑스혁명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유럽의 다른 박물관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즉 프랑스에서의 시민 혁명은 과거 왕족이나 귀족, 그리고 권력화 된 성직자들이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예술품과 기념물을 탐욕스럽게 취하고 즐기던 관행에 종지부를 찍고 이제 그것들을 국가 소유의 문화유산으로서 만인이 공유하도록 하는 새로운 제도를 시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다시 말해 구체제의 붕괴로 예전에는 엄격하게 통제되던 공간에 대한 대중의 점유가 곧바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유럽의 다른 박물관들의 경험과 구별된다는 말이다.
구체제(Ancien Régime)를 극복한 공화국의 정신을 담는다는 측면에서 루브르박물관의 초기 전시작품의 선정 문제는 큰 쟁점이 되었다. 박물관으로서의 루브르는 1793년 8월 10일 537점의 회화를 전시하며 첫선을 보였는데,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몰락한 귀족과 교회에서 징발된 수집품들이었다. 작품선정의 기준은 건전한 공화국의 정신에 어긋나는 작품의 배제였기에, 풍속의 타락이나 나약함을 드러내는 따위의 작품이 먼저 배제되었고, 광신적인 종교화나 군주제를 신격화하는 그림 역시 제외의 대상이었다.
초기의 이러한 배제의 원칙은 그 기준의 적합성에 대한 회의가 싸여감에 따라, 그리고 나폴레옹이 1796년 이후 이태리, 오스트리아, 이집트 등지에서의 여러 전투를 통해 전리품으로 가져온 뛰어난 예술품의 숫자가 엄청난 규모로 증가함에 따라 점차 희석되기에 이른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등장한 담론이 기념물이나 예술품의 탈(脫)맥락화이다. 즉 박물관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작품이 놓이면 그것이 원래 속해있던 맥락으로부터 분리되기 때문에, 이러한 탈맥락화를 통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부연하면 박물관은 전시된 작품들을 구체적인 맥락에서 분리하여 순수하게 작품 자체로 존재하도록 만들고, 이러한 탈맥락화의 논리는 공화주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작품들이 박물관에 전시되는 것을 합리화시켜준다.
이러한 담론의 전개는 루브르박물관이 혐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을 구체제의 잔재를 문화유산의 이름으로 전시하는 방법을 통해 혁명에 부응하는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데 활용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사실 이러한 해석이 던져주는 의미는 가다머(Hans-Georg Gadamer)가 말한 “박물관은 그 소장품의 역사를 은폐함으로써만 가능하다”라는 짧은 한마디에 잘 함축되어있다.
그런 점에서 루브르박물관은 삶의 맥락에서 분리된 작품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순수미술사의 탄생에 크게 이바지하였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다만 역사의 흐름은 루브르박물관이 시민이 주인 되는 공공박물관으로 순탄하게 성장하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폴레옹이라는 독재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인이 사랑하는 루브르박물관이 현재의 규모로 크게 발전하는 데는 나폴레옹의 역할이 컸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프랑스는 1789년 5월 시민혁명으로 구체제를 무너뜨린 후 80년간 혁명과 쿠데타, 그리고 선거 등을 거치며 공화정, 제정, 군주정으로 국가 체제가 바뀌는 불안한 정치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루브르박물관 역시 정치적 상황의 영향을 받으며 변모해왔는데, 현재의 박물관 모습을 갖춘 것은 쿠데타를 통해 공화정을 무력화시킨 나폴레옹 치하에서 이루어졌다.
위대한 프랑스를 꿈꾼 나폴레옹은 조국 프랑스를 열강의 반열에 오르게 하고, 동시에 루브르박물관을 세계적인 예술품과 주요 문화유산의 보고로 만들고자 하는 야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가 치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 스페인,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이탈리아의 국보급 예술품들을 빼앗아 루브르로 가져왔다. 1798년 감행한 이집트 원정에는 180명가량의 학자를 대동하여 이집트의 고대 유적을 비롯하여 이집트에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 고대 이집트의 역사나 풍속 등을 조사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러한 이유로 나폴레옹이 통치하던 시기에 루브르박물관 소장품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고 박물관의 명칭도 ‘뮈제 나폴레옹’(Musée Napoléon)으로 바뀌었다가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패한 뒤 명칭을 되돌리기도 했다. 루브르박물관의 소장품은 나폴레옹 이후에도 루이 18세와 샤를 10세 재위 기간에 다시 한 번, 더 큰 규모로 소장품이 불어났으며, 제2 제국(나폴레옹 3세 통치 기간) 중에는 20,000여 점의 수집품이 들어온 것이 파악되고 있다.
현재의 루브르박물관은 나폴레옹이 가져온 수집품으로 채워진 이집트 고대유물관을 필두로, 근동 유물관, 그리스와 에트루리아, 로마 유물관, 이슬람 미술관, 조각 전시관, 장식품 전시관, 회화관 그리고 판화와 소묘 관 등 9개의 전시관을 두고 있다.
루브르박물관의 시작은 공화주의 정신과 시민적 문화 향유가 바탕이 되어 만들어진 공공박물관이었으나, 격동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국주의적 정복의 저장고로 이용되기도 했다. 역사 과정은 언제나 다면적이고 복합적이며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아서 역사의 교훈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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