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협의 박물관 이야기 <31>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Istanbul Archaeological Museums) .....터키에는 왜 고고학박물관이 많을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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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정과 비교했을 때 터키의 국립박물관은 몇 가지 특징이 두드러진다. 첫째는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처럼 터키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거대한 중심박물관 (또는 국가박물관)이 없는 대신, 콘텐츠를 달리하는 국립(國立) 고고학박물관이 여러 지역에 세워져 있고, 둘째는 궁전이나 모스크, 옛 교회 건물 자체를 박물관으로 이용하며, 셋째로 유적지나 고대의 폐허를 역시 박물관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박물관과는 차별화된다.
터키의 박물관들이 보여주는 다양성과 색다른 접근방식은 그들이 간직한 다채로운 역사적·문화적 콘텐츠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콘텐츠의 다양성과 풍부함이 곧 터키의 박물관들을 도식적이고 단조로운 체제나 상투적인 규격화에서 벗어나게 하였을 것이라는 말이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이스탄불을 ‘인류문명의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불렀는데, 이는 터키 전체에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확실히 터키는 역사적으로 2,000년 이상 유럽과 아시아 문명이 만나 뒤섞이던 무대였기에 메소포타미아, 히타이트, 아시리아, 그리스, 로마, 비잔틴, 이슬람의 문화가 켜켜이 쌓여 있는 땅이다. 따라서 그렇게 방대한 문화적 다양성을 포용하려면 단조롭고 도식적인 접근에서 벗어나 색다른 형태의 박물관을 구상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을지 모른다.
터키 정부가 자랑하는 터키의 10대 국립박물관 중에서 ‘가지안테프’(Gaziantep) 마을에 있는 <‘제우그마’ 모자이크 박물관>(Zeugma Mosaic Museum, Gaziantep)은 모자이크만을 보여주는 특수박물관인데, 이를 제외한 나머지 9개가 궁전, 모스크, 무덤, 유적지 등을 활용한 박물관이거나, 또는 고고학박물관이다. 10대 박물관 중 나머지 아홉 개 박물관의 성격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궁전 자체가 박물관인 <‘톱카프 궁전’ 박물관>(Topkapi Palace Museum, Istanbul)
2. 회교사원(回敎寺院)인 <‘아야소피아’ 박물관>(Hagia Sophia Museum, Istanbul) (참고로 2020년 7월 터키 사법부는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다시 모스크로 전환하는 법적 조처를 했다.)
3. ‘이브라힘 파샤 궁전’을 박물관으로 꾸민 <터키 및 이슬람 예술 박물관>(Museum of Turkish and Islamic Arts, Istanbul)
4.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인 ‘메블라나’교(敎) 창시자의 무덤인 <‘메블라나’ 박물관>(Mevlana Museum, Konya)
5. 터키 최고(最古), 최대 고고학박물관인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Istanbul Archaeological Museums, Istanbul)
6. 원래 <‘앙카라’ 고고학박물관>이었던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Museum of Anatolian Civilizations, Ankara)
7. 로마 ~ 동로마 시절에 소아시아 남해안 지역 담당 해군기지였던 안탈리아의 <‘안탈리아’ 고고학 박물관>(Antalya Archaeological Museum, Antalya)
8. 터키 동남 아나톨리아 지역의 가장 오랜 신전(神殿) 유적지 ‘괴베클리테페’의 <‘괴베클리테페’ 박물관>(Gobeklitepe Museum, Sanliurfa)
9. 바위산에 동굴을 뚫어 만든 10~12세기 교회 유적지인 <괴뢰메 야외박물관>(Goreme Open Air Museum, Nevsehir).
이상의 10대 박물관, 그리고 터키의 국립 고고학박물관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박물관이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들)>(Istanbul Archaeological Museums)이다.
오스만제국의 술탄 압뒬라지즈 1세(Abdülaziz)는 1867년 여름에 파리, 런던, 빈을 순방하던 중 각국의 고고학박물관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귀국 후 이스탄불에 서구식(西歐式) 고고학박물관의 건립을 지시했다.
이슬람국가인 오스만제국은 제국 영토 내에 산재한 고대 그리스나 로마, 비잔틴 문명의 유적을 오랜 기간 방치해왔다는 점에서 압뒬라지즈의 이러한 조치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이러한 시작이 결국 20세기에 들어서 터키의 박물관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박물관 건축공사는 건립 부지(敷地)를 톱카프 궁전(Topkapı Palace)의 바깥 정원으로 정하고 1881년, 당시 유명 고고학자이자 행정가인 오스만 함디 베이(Osman Hamdi Bey)의 지휘 아래 시작되어, 1891년 황실박물관(Imperial Museum)으로 개관했으며, 1908년 현재 모습인 신고전주의 양식(neoclassical style 또는 neo-Greek form)을 완성했다.
이것이 터키에 만들어진, 즉 오스만제국 최초의 박물관이며, 동시에 그 당시 유럽에서도 드물게 박물관으로 설계되어 건물 자체도 크게 주목을 받은, 박물관사(博物館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박물관이다. 고고학박물관은 황실박물관이었기에 오스만제국의 직할지와 자치구의 총독이나 관리들이 획득한 유물들을 이스탄불로 보내도록 해 많은 유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고고학박물관의 첫 번째 관장이 된 ‘오스만 함디 베이’도 자신이 직접 참여한 레바논의 시돈(Sidon)지역 발굴에서 출토된 기원전 4세기 말 헬레니즘 시기의 ‘알렉산드로스 석관’을 이곳으로 가져와 전시하기도 했다.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들)>(Istanbul Archaeological Museums)은 핵심이 되는 <고고학박물관>(The Archaeological Museum)을 중심으로 <고대 동양 박물관>(The Ancient Orient Museum) 그리고 <타일 키오스크 박물관>(Tiled Kiosk Museum)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대 동양박물관은 1883년 ‘오스만 함디 베이’에 의해 예술학교로 시작된 것을 1935년 박물관으로 바꿨는데 1963년 잠시 문을 닫았다가 재단장하여 1974년에 고고학박물관의 일부로 다시 개관했다. 타일 키오스크 박물관은 메흐메트 2세(Sultan Mehmed II)의 명에 따라 1472년 톱카프 궁의 바깥 정원에 지은 작은 건물로서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의 하나이다. 1953년부터 터키와 이슬람의 예술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오스만제국은 1453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이래 20세기 초까지 유럽의 남동부, 서아시아, 그리고 북아프리카 일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기에,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의 소장품은 오스만제국의 '제국주의적 연원'이 두드러진다. 즉 소장유물이 현재 터키의 영토인 아나톨리아지역을 훨씬 벗어나 과거 오스만제국이 통치하던 모든 지역에서 나온 유물들이 다수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리스나 로마와 같은 다양한 비(非)이슬람 세계의 유물은 오스만제국의 이슬람 전통을 이어받아 새롭게 탄생한 국민국가 터키에서 자국(自國) 역사의 뿌리나 문화적 상징으로 내세울 수 없는 반면, 그렇다고 서구 문명의 뿌리를 도외시할 수도 없는 이중의 딜레마에 직면하는 상황이었다. 하나의 해결책은, 그것들이 인류 문명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고려했을 때, 오스만제국의 영토에서 발견된 유물을 <국가박물관>이라는 이념적·정치적 색깔을 띠는 기관보다는 <고고학박물관>이라는 탈이념적이고 보편적인 인류문화의 보전공간에서 활용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다양한 고고학박물관의 설립을 통해 오스만제국 이전의 고대문명을 보듬는 정책은 터키를 세계 인류의 문화유산을 보전하고 교육하는데 이바지하는 문화국가의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터키는 오늘날에도 동양과 서양을 연결해주는 지점에 있음을 활용하여 나름의 문화국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은 동양의 이슬람 문화에 더하여 그가 소장하고 있는 엄청난 고대 유럽의 유물로 인하여 유럽의 박물관들과의 교류가 활발한 편이다. 내가 2010년 방문했을 때에도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에서 그 유명한 타운리(Charles Townley)가 수집한 <원반 던지는 사람>(Townley Discobolus) 조각상을 임대해와 전시하는 중이어서 영국까지 가지 않고도 귀중한 작품을 접할 수 있어 좋았다. 이러한 교류 때문인지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설립 100주년이던 1991년에는 European Council Museum Award를 수상한 영광을 안기도 했다.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의 주요 소장품으로는 기원전 4세기 헬레니즘 시대의 알렉산더 석관(Alexander Sarcophagus)을 위시하여 수많은 그리스·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의 다양한 유물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 주목받는 소장품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평화조약(平和條約)으로 알려진 이집트의 람세스 2세(Ramesses II)와 히타이트제국의 하투실리 3세(Hattusili III) 사이에 서명된 점토판(粘土版) ‘히타이트 평화 조약’(1258 BCE), 이스라엘 지역에서 가져온 ‘실로암 비문’(히브리어 : כתובת השילוח 또는 실완 비문), ‘함무라비’ 법전보다 약 3세기 앞선 인류 최초의 성문법 ‘우르남무’(Ur-Nammu) 법전을 담은 수메르어 점토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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