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협의 박물관 이야기 <23> 카자흐스탄의 국립박물관…박물관과 정치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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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은 순수문화기관이기에 흔히 정치와는 무관한 존재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박물관의 역사를 훑어보면 특히 국립박물관의 역사는 제국주의, 식민주의, 국가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역사가 종말을 고한 뒤에도 새롭게 만들어진 신생국들은 국가를 <제도화>하고, <정통성>을 확립하며, 신생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박물관이라는 문화적 상징기구를 활용해왔다. 그래서 수많은 신생국에서 웅장하고 거대한 박물관들이 정부(국가) 주도하에 경쟁적으로 세워졌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은 강력한 지도자가 통치하는 국가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진행되었다. 카자흐스탄의 경우가 그에 해당할 것이다.
카자흐스탄에는 비슷한 명칭의 <국립박물관>이 두 개 있다. 하나는 1985년에 개관한 원래의 <국립중앙박물관>(The Central State Museum of Kazakhstan)이고, 다른 하나는 2014년 새로운 수도에서 문을 연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Kazakhstan)이다. 전자는 1929년 카자흐가 구소련의 연방이었던 시절 이래 역사적 수도였던 에 세워진 국립박물관이고, 후자는 1991년 구소련 붕괴 후 독립한 카자흐스탄이 1997년에 천도한 신 수도 에 2014년에 아시아 최고의 박물관을 지향하며 신축한 야심에 찬 박물관이다.
소개에 앞서 수도의 명칭에 대한 부연 설명 또한 필요할 것 같다. <아스타나>로 수도를 옮긴 것이 1997년이었는데, 2019년 30년 이상 카자흐스탄을 통치해오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Nursultan Nazarbayev)대통령이 사임하자 카자흐스탄 의회가 수도의 명칭을, 위대한 지도자를 기리기 위해, <누르술탄>(Nur-sultan)으로 변경했다. 그러므로 카자흐스탄에는 구수도(舊首都) 알마티와 신수도(新首都) 누르술탄에 세계적인 박물관 두 개를 보유하는 나라가 된 셈이다.
10여 년 전 카자흐스탄 정부의 초청으로 <알마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했다. 1985년 새롭게 지어졌다는 건물은 전시실 면적이 17,500㎡나 되고 소장유물이 20만 점이 넘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박물관이라 했다. 4개로 크게 분류되는 전시실은 선사시대로부터 시작해서 중세와 근대에 이르는 카자흐스탄국가 형성과정을, 그리고 러시아제국 하의 근현대역사 기간을 다룬 후, 마지막으로 1991년 구소련연방으로부터의 독립 이후에 대한 전시로 꾸며져 있었다. 아주 훌륭한 박물관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카자흐스탄박물관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전시는 박물관 중앙홀에서 만나는 <황금왕자전사>(Golden Prince Warrior)일 것이다. 1969년 알마티에서 동쪽으로 65km 떨어진 이시크시 계곡에서 BC 4~5세기경 거주한 사카족 것으로 추정되는 60여 개 고분이 발견됐다. 이 고분군을 발굴한 알마티에 있는 카자흐스탄 고고학연구소의 아키세프(A. Akishev) 교수는 황금 조각을 몸에 두르고 묻혀 있던 한 유구의 존재를 확인했는데, 여기에서 무려 약 4천 점에 이르는 황금 유물이 함께 나왔다. 수천 점의 황금 유물과 함께 매장되어 있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금제품으로 장식된 이 미라는 흔히 <황금 인간>이라 이름 붙여졌다. 이는 고고학적으로 이집트 파라오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 발굴에 버금가는 발견이었다. 그래서 이 <황금 인간>은 이제 카자흐스탄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황금 인간> 관련 유물은 이제 <알마티>와 <누르술탄>에 있는 두 개의 국립박물관에서 모두 핵심적인 전시내용이 되고 있다. (이 <황금 인간> 유물의 일부는 작년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카자흐스탄특별전으로 초대되어 국내에도 소개되었다. 외국의 정상이 방문하면 그 영부인이 방문하는 곳이 대체로 국립박물관이다. 박물관에서 행해지는 많은 일들이 정치적인 상징성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10년 전 내가 방문했던 <알마티>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중앙홀에 <황금 인간> 모형을 화려한 금장식 옷을 입혀 전시해 놓음으로써 박물관에 막 들어서는 방문객들이 주목하도록 만들어놓았고, 금속공예품들은 따로 보안 시설이 더욱 강화된 방을 마련하여 입장료를 다시 한번 더 내야만 들어가서 관람을 할 수 있었다. 카자흐스탄당국이 얼마나 그 유물들을 중요시하고 있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제 <누르술탄>에 새롭게 문을 연 박물관에서는 더 현대적인 시설, 장비, 기법을 사용하는 전시가 선보였을 것이니 많은 변화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아직 <누르술탄>(Nur-sultan)에 건립된 <카자흐스탄 국립박물관>에 가보질 못했다. 알고 있는 사실은 인구 30만 명이 안 되던 작은 도시 Astana는 1997년 새로운 수도로 결정된 뒤 빠른 속도로 새로운 카자흐스탄의 미래를 보여주는 상징도시로 주목받았다는 점이다. 풍부한 경제력을 갖춘 카자흐스탄 정부가 일본인 도시계획전문가에 의뢰하여 <계획도시 안>을 마련하고 무서운 속도로 계획을 추진한 결과, 이제 인구 116만 명의 카자흐스탄 최대도시인 알마티(Almaty) 다음의 인구 113만 명의 대도시로 급성장하였다.
작년 3월 다시 도시 이름을 <누르술탄>으로 바꾼 이 도시는 거대하고 웅장한 관공서들과 초현대적인 빌딩, 그리고 다양한 공공목적의 멋진 건축물들이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국민적 긍지와 자랑으로 자리 잡았다.
새로운 박물관도 그러한 구도의 한 부분이다. 사진으로만 접한 새 박물관은 전시내용은 알마티의 국립중앙박물관과 유사한 형식이지만, 건물이 미래지향적이고 현대적인 디자인의 웅장한 규모이다. 건물 앞 넓은 광장에 세워진 조형물도 국가를 상징하는 의미가 묵직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대규모 국가적 사업은 카자흐스탄이 구소련에서 독립한 이후 새롭게 수도를 옮기고 미래 지향적인 계획도시를 건설하는 거대 프로젝트의 일환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카자흐스탄은 독립 후 석유를 포함한 풍부한 천연자원으로 말미암아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이루어왔다. 또 하나의 박물관을 뻗어나가는 수도에 건립하는 일은 독립을 쟁취한 카자흐스탄이 높아진 국가적 위상을 만방에 과시하고, 진취적 정체성과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훌륭한 수단이 된다. 새로운 비전을 담은 박물관의 건립은 또한 정치적으로 중요한 상징자산을 늘리는 일이기도하다. 왜냐하면, 새로운 박물관은 세심한 기획을 통해 과거 30여 년의 통치로 획득한 국부(國父)의 위상이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기억되며, 추앙되는 공간(祠堂)의 역할도 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의 현대사 공간에 마련된 전시물이나 그림, 동상 등등이 그러할 것이기에...
도시명을 <누르술탄>으로 바꾼 新수도에 건립된 <국립박물관>에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대통령의 동상이 들어서있다는 신문기사와 사진을 보면서, <역사>란 언제나 <현재>에 쓰여진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역사는 항상 새롭게 쓰여지는 것이리라. 근래 우리에게 부쩍 익숙해진 낱말 <역사전쟁>이 뇌리를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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