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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 클린턴 그리고 북핵(北核)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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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1월31일 12시20분

작성자

  • 이상돈
  •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20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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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북핵 문제가 이렇게 고약하게 된 근본원인을 1994년 제네바 핵 협정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1992년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북한 핵 개발 문제가 심상치 않게 언론에 나왔다. 그해 대선에선 대외정책 경험이 없는 빌 클린턴이 당선됐다. 나는 그 때 대통령 취임식 전후로 열흘 동안 워싱턴을 방문했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서울에 있는 가족이 괜찮겠냐고 걱정을 해 주었다.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시 미 군부가 영변을 정밀 폭격할 계획을 세워놓았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우리는 당시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는 정권 교체기였다. 이처럼 미국과 한국에는 새 정부가 들어섰고, 자연히 새 정부가 북핵 문제를 재검토할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군사조치 가능성은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2차 대전 전쟁 영웅인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병역을 기피한 클린턴 신임 대통령에게 “미국 대통령은 필요하다면 군대를 위험한 외국에 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충고를 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병역을 교묘하게 기피한 빌 클린턴은 대통령 임기 중 군대와 관련된 행사나 일정을 아주 싫어했고, 군 지휘관을 만나는 것도 기피했다. 군복 입은 사람들은 자기를 병역기피자로 볼 것이라는 자격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클린턴이 자기가 미군 총지휘관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그야말로 큰 결심을 하고 미군을 소말리아에 보냈다. 1993년 10월, 미군 레인저 부대는 소말리아 반군(叛軍) 두목을 잡겠다고 작전을 개시했는데, 반군의 뜻밖의 공세에 고전(苦戰)을 해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 뉴스를 접한 미국인들은 깜짝 놀랐다. 지도에서 어디 붙어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곳에 왜 군대를 보냈냐고 물었고, 클린턴 자신도 충격에 빠져 버렸다. 이 전투는 영화 <블랙호크 다운>으로 잘 알려져 있다. 추락한 헬기 조종사를 구하러 위험한 곳으로 진입해서 영웅적인 전투 끝에 전사한 델타 포스 소속 두 저격수에게는 사후에 명예훈장이 수여됐다. (베트남 전쟁 이후 처음으로 수여된 명예훈장이었다.) 

 

소말리아에서 혼이 난 클린턴은 북한에 대한 군사적 조치는 아예 대안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워렌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이 이끄는 클린턴의 외교팀은 워낙 약체여서 아무 결정을 못 내리고 세월을 보냈다. 그런 와중에 조지아 땅콩농장에서 은퇴해 있으면서 심심해하던 지미 카터가 자기가 북한과 협상 물꼬를 튼다면서 1994년 6월에 평양을 방문했다. 부인과 함께 북한을 방문한 카터는 김일성을 만나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희희낙락했다. 김일성도 전직 미국 대통령이 자기를 알현하러 왔다면서 호탕하게 웃는 등 두 사람은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미국에 돌아와서 카터는 “김일성이 매우 인자한 사람”이라고 평을 해서 많은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 

 

카터가 평양을 가기 전에 미 국무부는 카터에게 정확한 지침을 주지도 못했다. 카터는 평양에서 돌아오자마자 자기가 한 건을 했다는 식으로 발표를 해버렸다. 이런 상태에서 북한과 미국이 협상을 시작했으니 처음부터 북한에게 유리한 협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 해 10월 21일, 양국 대표는 카터가 김일성과 만나서 합의를 본 내용을 기초로 한  미·북 핵 협정에 대해 서명을 했다. 이것이 제네바 핵 협정인데, 한국이 북한에 경수로를 건설해 주고 미국은 중유를 제공하고, 북한은 영변시설을 폐쇄하고 핵 사찰을 받으며, 미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푼다는 내용이었다. 카터가 제멋대로 합의를 해 놓아서 미국은 협상에서 별다른 레버리지가 없었다. 

 

이 협정은 누가 보아도 북한에게 유리한 것이었다. 그런데 김일성은 이 유리한 협정이 성사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카터가 평양을 다녀간 후 한 달 후인 1994년 7월 8일 사망했기 때문이다. 워싱턴에선 김일성이 카터를 만나서 너무 즐겁게 웃어서 심장마비가 왔을 거라는 농담이 돌았다. 

 

제네바 협정이 체결된 후 11월 8일에 치러진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역대급으로 참패했다. 공화당이 선거에서 압승을 해서 상하원이 모두 공화당 지배하에 들어갔다. 공화당 의원들은 북한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있는 핵 협정에 시큰둥했다. 새로 하원의장이 된 뉴트 깅리치가 이끄는 공화당은 매사에 클린턴이 하는 일을 반대 했고, 섹스 스캔들 때문에 탄핵의 궁지에 몰린 클린턴은 대외정책에 관심을 둘 수가 없었다. 미국 정부가 그런 상태에 있은 틈을 타서 김정일은 비밀리에 핵 개발을 계속했고, 오사마 빈 라덴은 9.11 테러를 준비했다. 미국 대통령이 오럴 섹스는 섹스가 아니라는 이론을 만들어서 자기를 변론하고 있을 때 세상은 위험하게 바뀌어 간 것이다.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 지도부는 카터가 1991년 걸프 전쟁을 망칠 뻔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1990년 8월, 이라크 군대가 쿠웨이트를 점령하자 부시 대통령과 그의 외교 군사팀은 쿠웨이트를 해방하기 위해 이라크에 통첩을 하고 안보리를 소집하는 등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 와중에 카터가 후세인을 만나서 협상으로 해결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카터는 자기의 구상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과 캐나다의 멀로니 총리에게 서신으로 보냈는데, 이것을 읽어 본 멀로니 총리가 하도 기가 막혀서 이를 부시 대통령에게 알렸다. 부시 대통령이 카터에게 엄중 경고하고 멋대로 이라크에 가면 국가안보사범으로 다루겠다고 엄포를 놓자 카터는 포기해 버렸다.  

 

이렇게 시작된 경수로 사업이 잘 될 수가 없었다. 북한은 영변 외에서 핵시설을 비밀리에 가동 했고 미국 인공위성은 그것을 포착했다. 클린턴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평양에 보내서 김정일을 달래 보려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2001년 조지 W. 부시가 대통령에 취임했고, 9.11 테러가 발발하자 부시는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더불어 ‘악(惡)의 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부시 정부는 아프간 전쟁에 이어서 이라크 전쟁에 몰두해서 북한 문제는 손을 대지도 못했다. 2003년 1월 북한은 핵 비확산협정(NPT)에 탈퇴했고, 이어서 미국과 유럽, 그리고 유엔안보리는 북한에 대해 경제제재를 가했다. 

 

북한은 1994년 제네바 협정으로 심각한 경제위기와 기근을 극복하고 체제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제네바 협정이 북한의 김씨 왕조를 살려 놓은 것이다. 

 

오바마 정부 시절에 클린턴과 카터는 구금되어 있는 미국인을 데려오기 위해 2009년과 2010년 각각 평양을 다녀온 적이 있다. 오바마 정부의 국무부는 1994년 카터의 평양 방문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두 사람에게 확실한 지침을 주고 다른 합의 같은 것을 절대로 하지 못하도록 단속을 했다. 2010년에 평양을 갔을 때도 카터는 너무 좋아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카터가 또 좋아한 나라는 쿠바이다. 2002년에 카터는 미국의 전·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쿠바(1958년 공산화 후의 쿠바)를 방문해서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는데, 너무 좋아서 얼굴에는 웃음이 만발했다. 2011년도 카터는 쿠바를 또 방문했다. 간첩 혐의로 감옥에 있는 미국인을 석방시키기 위함이었는데, 그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 2016년 11월, 카스트로가 사망하자 카터는 “카스트로의 조국에 대한 사랑을 기억한다”고 추모를 했다. 카터는 재임시에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인의 인권을 침해했다면서 비난했지만, 이처럼 김일성과 카스트로는 끔찍하게 사랑했다. 땅콩농사나 할 사람이 대통령이 되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호텔과 골프장이나 경영할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것도 마찬가지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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