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로 보는 미국과 한국의 ‘인권’ 온도 차이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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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지원금 금지하는 정부에 소송 거는 캘리포니아
장애인 차별적 조항 포함된 ‘모자보건법’ 폐지 주장하는 한국
같은 날 지구 반대편에 있는 두 나라에선 낙태에 대한 사뭇 다른 논의가 오고 갔다.
3월 4일 캘리포니아주를 비롯한 20개 주가 낙태(인공인심중절) 지원금을 철회하겠다는 트럼프 정부에 소송을 제기했다. 지구 반대편 한국에선 ‘낙태’라는 검색에 여전히 ‘비밀 보장’, ‘불법 수술’ 등이 연관 키워드로 등장하며 ‘우생학적’ 이유로 인공중절을 허용하고 있다. 두 곳의 풍경 차이는 다른 시대의 다른 세상 같아 보인다.
◆낙태지원 금지한 행정부 상대로 소송하는 캘리포니아
지난달 4일(현지 시간) 미국 캘리포니아(CA)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낙태 지원 금지 정책에 맞서 소송을 제기했다. 2월 트럼프 행정부가 연방 정부의 가족계획 프로그램인 ‘타이틀 엑스(Title X)'를 발표하며 낙태를 지원하는 기관에 대해 예산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것에 반대하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보수성향의 기독교 단체를 비롯한 낙태 반대 단체들은 정부의 정책 변경을 환영했지만 민주당 소속인 케이트 브라운 오리건 주지사는 “여성과 가족에 대한 트럼프 정부의 또 다른 공격”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하비어 베세라 캘리포니아주 법무부 장관은 “지금은 1920년이 아니라 2019년”이라며 “여성의 건강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시대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새 정책으로 영향을 받는 여성 400만 명 중 100만 명이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NYT는 캘리포니아 외 20개 주와 워싱턴DC가 새로운 보건 정책에 반대해 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미국의 임신중절 합법화는 1964년 제정된 시민권법 아래 여성의 평등을 지지하는 발걸음들이 계속되다 1973년 ‘로 vs. 웨이드’ 사건으로 확정됐다.
1960년대부터 꾸준히 제기된 페미니즘 운동과 인권 운동을 기반으로 낙태를 포함한 성(性) 관련 이슈들은 공개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혼으로 임신한 젊은 여성인 제인 로(가명)가 낙태를 금지하고 있던 당시 헌법 소원을 냈고 수정헌법 14조에 의거, 단지 생명의 위협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임신 6개월 미만 여성의 낙태를 금지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선고했다.
◆법적으로 불법인 낙태, 그럼에도 ‘음지’에서 여성들의 건강을 위협한다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현행법상 낙태(인공임신중절)는 일부 예외 경우를 제외하고 금지돼 왔다. 2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인공임신중절 실태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낙태 시술을 받은 진료 건수는 5만 건에 다다른다. 이는 2011년 16만 8000건과 비교했을 때 3배 이상 감소한 수치지만 의료계에서는 실제 낙태 시술을 받는 여성의 숫자가 조사된 수치보다 더욱 많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현행법상 낙태는 본인이나 배우자가 우생학·유전학적 질환이 있거나, 강간 등에 의해 임신한 경우 등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된다.
여성계는 “낙태죄 폐지는 시대의 요구”라며 형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측은 “1953년 만들어진 낙태죄가 여전히 형법에 남아 여성의 판단을 범죄화하고 있다”며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몸에 대해 내리는 판단을 국가가 범죄로 지정하고 처벌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우생학적 그림자 속 모자보건법 차별 조항
낙태 금지 국가에서 예외적으로 낙태를 허용하고 있는 모자보건법도 인권을 침해하는 요소가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일하게 허용되는 조항 속에서도 차별적인 요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달 5일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장애인 권리를 위해 임신중절 허용 사유를 규정하는 모자보건법의 폐지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권위는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는 장애 여성을 강제불임 시술이나 낙태로부터 보호할 것을 권고했다”며 “모자보건법 제14조는 우생학을 바탕으로 한 장애 차별적 조항”이라고 설명했다. 장애인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낙인효과를 가져올 수 있어 폐지에 대해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자보건법 14조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본인과 배우자의 동의를 받아 인공 임신중절 수술을 받을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유전되는 정신장애는 없고 신체질환이 유전된다고 하더라도 성인으로 성장하여 성생활과 임신도 할 수 있는 정도의 질환이라고 설명한다. 또 부모가 유전질환이 있어도 그 자식에게 유전질환이 무조건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태어날 가치조차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지구의 한 편에선 낙태를 지원하는 정책을 철회한다는 이유에서 주들이 들고 일어서지만 한국에선 ‘유일하게 낙태를 허용하는 조항’ 안에 장애인을 차별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두 사례는 임신중절의 찬반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인권 수준’의 문제다.
이는 단순히 임신중단 폐지 논란을 넘어 논의 속에서 다른 다양한 인권들이 침해되는 문제다. 낙태 반대 논리의 핵심은 생명권이다. 생명권은 타인의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다. (임신중절을 반대하는 종교계의 주장은 생명이란 고결하고 소중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생명권의 보호에는 더욱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을 포괄적 사회적 약자로 보고 경제적인 지원을 하는 미국, ‘보호할 가치가 없는 생명’이란 기준으로 제도나 정책을 결정하는 일을 경계하는 세계 인권 선언이다. 현실에 조금 더 밀접하게 닿아있는 ‘살아갈 권리’도 본질적 인권에 부합할 수 있어야 한다.
헌법재판소는 오는 4월 초쯤 낙태 수술에 대한 위헌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헌법소원은 2017년 2월 산부인과 의사 A씨가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이 위헌이라며 위헌소원을 내면서 시작됐다. 형법 제269조 1항은 임신한 여성이 낙태한 경우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형법 제270조 1항은 의사가 임신한 여성의 동의를 받아 낙태하게 한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으로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생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것 역시 생명의 현장이자 ‘삶’이다. 한 아이를 기르는 육아의 책임이 여성에게 전가되고 있는 현실에서 태아의 생명권을 앞세워 한 여성의 삶을 포기하라고 과연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오늘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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