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의 미학, ‘펭수’와 ‘천리마마트’가 더 생기려면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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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하!”
요새 최고 인기를 누리는 EBS의 펭귄 캐릭터, 펭수의 인사말이다. 그런데 뜯어보면 펭수는 좀 이상하다. 대충 박아 넣은 것 같은 사백안, 210cm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짧다란 팔다리, 거기다 괄괄한 목소리까지. 유튜브 백만 구독자 수를 거느린 인기 캐릭터치고는 너무 ‘대충’ 생겼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어이없게 생겨서 펭수는 더 귀엽다. 펭수의 인기 요인이야 솔직함, 다재다능함 등 많지만, ‘대충’ 역시 펭수의 주 매력 포인트다. 소위 말하는 ‘병맛’이기 때문이다. 병맛은 맥락 없고 형편없지만 중독적인, 즉 B급 감성을 일컫는다. tvN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드라마 ‘쌉니다 천리마마트’도 좋은 예시다. 마트를 망하게 할 작정으로, 점원이 왕이라며 곤룡포를 입힌다던가, ‘옆 마트가 더 쌉니다’라고 광고하는 식이다. 이건 뭐지? 싶지만 재미있다. 드라마에서는 오히려 손님이 몰려 점장이 곤란해 하고 있다. 드라마의 시청률도 케이블 1위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B급의 매력은, A급이 아니라는 데 있다. 사회적으로 정해진, 잘나가는 A급의 기준을 대놓고 거부하는 매력이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해, 고상한 취미를 가져야 해, 성실하게 일해야 해 등 엘리트로 가는 길을 걷어차 버린다. B급의 이상하고 당당한 매력은 신선하고 중독적이다. 충주시 행사를 홍보하는 병맛 포스터로 주목을 받은 충주시 공무원 조남식 씨도 그렇다. 고구마 축제를 ‘고:고구마 구:구우면 마:마시써’ 삼행시를 그림판으로 대충 실은 포스터 등이 SNS에서 화제가 됐다.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기존의 홍보물들이) 다들 돈을 들여 만드니 아무도 보지 않는 예쁘기만 한 작품이었다”라고 말했다. 진부한 A급보다는, 예쁘진 않아도 독특한 B급을 쌓아올리는 ‘대충의 미학’으로 대박이 났다.
B급은 ‘꼰대 반대’ 정신을 안고
신체에 제일 해로운 벌레(蟲)라는 대’충’에 미학이 생긴 건, 역설적으로 꼰대들 덕분(?)이다. 권위적인 사고를 하는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의 특수한 상황을 공감하지 못하고 ‘나 때는 말이야~’를 일삼는 것을 꼰대라고 한다. 이들이 강요하는 성공의 가치와 A급 라이프스타일을 거부하는 B급은 그래서 ‘안티 꼰대’라는 시대정신과도 맥을 같이 한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사회생활도 대충 하는 펭수도 그렇다. EBS 김명중 사장이 참치 한 번 같이 하자고 불러도, 펭수는 ‘내가 더 좋아하는 일’인 유튜브 하느라 바쁘다고 퇴짜를 놓는다. 개인보다 회사며, 사생활 앞에 일이어야 성공한다는 꼰대들에 감히 연습생 펭귄이 날리는 일침이다. 내일의 성공을 위해 청춘의 아픔을 견디기보다는, 현재의 행복에 집중하고(소확행), 오늘을 후회 없이 살자(욜로) 등도 같은 맥락이다. 안티 꼰대는 시대적 정신이다. 뉴질랜드에서도 25살 여성 국회의원이 날린 일침이 유행이다. 환경문제를 지적하는 그녀에게 중진 의원들이 야유하자 “Ok, Boomer(됐거든요, 부머)”라고 대응한 것이다. 부머는 46년~65년 출생해 주류를 형성한 베이비부머 세대를 일컫는다. 밀레니얼 세대(80-00년대 출생)가 날리는 반항이다. ‘대충의 미학’은 꼰대에 저항하는 정신을 업고, 기존의 틀을 깨는 독특하고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솟아나는 샘이 된다.
대충의 미학을 막는 ‘꼰대 규제’
문제는 아이디어의 샘이 사막 한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만약 EBS에 ‘병맛 펭귄’을 이해하지 못하는 꼰대 상사가 있었더라면, 유튜브 월평균 수익 1억6천만 원을 내는 펭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펭수는 그렇지 않아 다행이지만, 다른 산업 분야의 ‘펭수’들은 지금 규제에 막혀 고사하고 있다. 기발한 아이디어들에 수요도 반응하는데, 정작 시장에는 뛰어들 수가 없다. 월세만 내고 주방을 공유하는 ‘공유 주방’은, 자본 부담 없이 젊은이들이 배달 사업을 할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지만, 식품위생법 규정에 막혀 기형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우리나라 인터넷은행 1호로 모바일금융시대를 연 케이뱅크도, 자금조달이 복잡한 규제에 막혀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다. 주방은 이래야 한다, 은행은 이래야 한다 등 고리타분한 ‘꼰대 규제’에 갇히면 ‘대충의 미학’도 없다. 여러 생각을 배양하고, 실험할 수 없는 사회는 빠르게 늙는다
개인적으로 북유럽이 유토피아인 양 얘기하는 걸 안 좋아하긴 하지만, 스웨덴에 좋은 예시가 있다. 인구 부족, 청년 실업으로 조용히 죽어가던 소도시 말뫼는 스타트업 단지로 이를 극복했다. 연구의 산실을 만들어 IT는 물론이고, ‘비알콜 주류에서 술맛 재현하기’ 등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연구하게 했다. 그 결과 나온 고급 비알콜 양주 Gnista는 북유럽을 넘어 영국에까지 수출되고 있다. 이 독특한 B급 도시는 그렇게 가장 젊은 도시로 탈바꿈했다. 덴마크와도 이어지게 교통편을 마련한 정부와 규제에 생각이 막히지 않게 한 의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학 강의실 불 끄는 걸 고용이라고 세고 있는 정부나, 데이터3법을 1년이 넘게 체류시키고 있는 우리나라 국회와는 정말 딴판이다.
그러나 청년 문제의 주인공은 언제까지나 청년이다. 정부와 국회는 도움을 주되, 젊은 아이디어를 내는 건 청년이 되어야 한다. 그냥 대충 해서는 작품이 못 된다. 대충에 ‘미학’을 곁들여야 한다. 청년다운 열정과 끈기있는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작품이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스웨덴 정부가 말뫼의 교통편을 개발해주고, 의회가 규제를 풀어줘도 결국 아이디어가 나오지 못하면 말뫼도 없었다. 어느 시대나 자기 때 청년기가 힘들다고 하는 만큼, 젊은이에게 녹록지 못한 사회다. 적어도 내 문제의 주인은 내가 되고자 하는 생각으로 일단 견뎌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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