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도, 남편만큼 힘들고 싶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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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베티 프리단의 페미니즘 원전 <여성의 신비>를 두고 “역사의 방아쇠를 당겼다”고 했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한국판 ‘여성의 신비’다. 2016년 책이 출간되고 누적 120만부의 판매량을 기록했고, 영화는 개봉 일주일도 안 돼서 손익분기점 160만을 훌쩍 넘겼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한국문학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됐다. 평범한 여성이 경험하는 차별적 상황에 대한 여성들의 공감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무엇보다 방아쇠를 뜨겁게 달구며 ‘김지영 현상’을 만든 것은 이에 반발하는 일각의 목소리다. 일부 여성 연예인이 소설을 읽었다고 SNS에 악플을 도배하거나, 영화를 보기도 전에 1점 평점을 매기며 일명 ‘평점 테러’를 하는 등의 비상식적 행동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힘들었던 점을 담담히 서술하는 영화에 대한 이들의 주요한 비판은, ‘남자도 힘들어!’이다.
남자도 일하느라 힘들어!
남자도 힘들다. 더불어민주당 청년대변인 장종화는 “82년생 장종화도 힘들다. 함께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교육비 걱정을 해야 하고, 내 책상이 없어질까 두렵다”는 영화 논평을 냈다가 철회했다. 극 중 김지영의 남편 79년생 정대현을 동정하는 많은 댓글도, “힘들게 일하고 온 남편한테 일 시킨다”, “일도 하고 정신병 걸린 아내도 신경 써야 하는 정대현이 불쌍하다” 등의 내용이다. 김지영의 경력이 단절되고, 독박육아를 할 동안 역시 정대현은 직장에서 열심히 살아 내야 한다. 가족여행 한 번 가려면 성과급을 위해 야근을 해야 하고, 승진하려면 열심히 상사 비위도 맞춰야 한다. 소위 위대한 아버지의 삶이라고 예찬하는 고된 삶을 살아 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다 힘든 마당에 앓는 소리 하지 말고 각자 맡은 일 열심히 하자는 식의 결론이 나온다. 정대현과 김지영이 서로 이해하고, 성별 갈등을 끝내자고 유야무야 넘어가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여자고 남자고 사는 건 힘들다. 다자이 오사무 말마따나, 사는 건 ‘아슬아슬한 대사업’이다. 문제는, 누가 더 힘든지 대결하는 게 아니란 걸 알아야 한다. 여자들이 안 힘들고 싶어서 김지영에 공감하고, 사회 질서에 반발하는 게 아니다. 여자들도, 딱 남자들만큼 힘들고 싶다.
여자도 일하느라 힘들고 싶다!
‘취집’(취업+시집) 대신 여자도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고 싶다. 승진해서 고액 연봉 받고 싶고, 커리어를 착착 쌓아나가면서 자부심 느끼고 싶다. 육아, 출산 등 주변 환경이 내가 하는 일을 그만두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채용 과정에서부터 성차별이 만연해있고, 암묵적으로 여성은 진급을 못하는 유리천장은 말할 것도 없으며, 경력단절 여성은 185만명에 달한다. 이 중 57.6%가 육아와 출산이 경력단절의 이유라고 답했다.
60년대 김지영 어머니 정도는 돼야 성차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 라고 나도 그렇게 정말 말하고 싶지만 위 경력단절 통계는 2018년 기준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에도 불과 2주 전에, 옛 서울메트로가 여성 응시자의 성적을 고쳐 탈락시킨 사실이 밝혀졌다. 대학 철도기관사학과를 수석 졸업한 사람도 어이없는 채용 성차별에 탈락했다. 공기업이 이러니 다른 분야는 더 심각하다. 특히 지난 2015년 서울시 보고서는 IT업계의 채용과정에서의 성차별을 보여준다. 여성임원은 아직도 5%를 못 채우고 있고, 심지어는 위기상황에서만 여성임원을 발탁해 해결하지 못하면 파면되는 ‘유리절벽’이라는 신조어까지 나왔다. 유감스럽게도 여자는 아직도 자유롭게 일할 수 없다.
여자도 일해야 한다!
베티 프리단은 그 유명한 ‘이름붙일 수 없는 문제들’(problem that has no name)을 세상에 발표했다. 남편 내조, 가사노동, 육아를 전담하는 미국 중산층 주부들이 느끼는 심리적 문제들을 처음으로 입밖에 낸 것이다. 침대를 정리하고, 식료품을 사고, 아이들에게 땅콩버터 샌드위치를 만들어주고 집안일을 하며 하루를 보내며 밤에는 남편 옆에 누워 잠을 청하는 그런 안정적인 삶을 살면서 주부들은 혼자 생각했다. ‘왜 행복하지 않지?’
당시 경력단절녀였던 프리단은 현실적인 해법을 찾지는 못했지만, 여성들도 일을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여성은 보수 없는 가사노동에서 벗어나, 사회에 진출해야 한다. 그래야 노동을 통해서 경제력을 갖추고, 자아도 실현한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점에서 자아 실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돈을 벌어야 대등한 지위를 성취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돈만큼 대등한 건 없다. 역사상 인종, 신분, 성별을 넘어선 인류의 협업은 주로 비즈니스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가사 노동을 업으로 하는 건 괜찮지만, 무보수로 일하는 경력단절녀가 문제가 되는 이유다.
1960년 이름 없는 문제들은 2019년 성차별 채용, 경력 단절, 유리천장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역시 해결은 아직도 요원하다.
여성의 사회진출을 원활히 하는 것이 결국 사회에도 도움이 된다. 단순히 노동가능인구가 늘어나는 것만이 아니다. 기능보유자, 고학력 등 여성들의 전문 노동력을 아깝게 썩히는 것은 재원 낭비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 4차 산업혁명시대가 오면서 노동시장은 급변하는데, 기존 노동인구는 시장의 수요를 충족할 수가 없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능력을 발휘하는 유연한 노동인구만이 새로운 패러다임에 적응할 수 있다.
출산, 육아 등이 여성의 사회진출을 막지 않게 하려면 관련 인프라가 잘 되어 있어야 한다. 지금 한국에는 긴급하게 분만할 수 있는 시설도 별로 없다. 다 서울에 밀집해있고 충남, 강원도 등 지방의 시군 중 절반에 분만 시설이 없다고 한다. 게다가 산부인과, 산후조리원에서 신생아 관련 의료사고도 다반사다. 인프라도 없고 관련 의료관리 체계도 허술하다. 이를 위해 인프라를 보충하고, 관련 실험에 투자하면서 서비스를 다듬는 과정에서 오히려 관련 산업이 발달할 수 있다.
여성이 사회진출은 저출산 해결의 열쇠이기도 하다. 보통 ‘여자들이 공부를 많이 하고, 밖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애를 안 낳는다’는 말은 분노를 부를 뿐만 아니라 틀렸다. 지금은 여성이 사회진출을 위해서 아등바등 기형적으로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를 안 낳는 것이다. 당장 출산, 육아 때문에, 혹은 미래의 계획 때문에 진급과 채용이 막히지 않는 사회가 되면 당연히 출산율도 높아진다. 저출산으로 고민하던 독일은 보육 시설 국가 전담 지원, 출산휴가 강제 적용 등 일과 가정을 양립하는 정책을 골고루 시행해 2018년 43년 만에 출산율 최고를 기록했다.
이런 점에서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끝내 김지영이 일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물론 김지영이 자기 이야기를 책으로 낸다는 걸로 노동을 대신하긴 했지만, 그건 책으로 많은 수입이 있었을 작가와 같은 소수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다. 평범한 김지영이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회사에 나갔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부부가 더 적극적으로 베이비시터를 찾거나, 남편이 육아휴직을 내거나 등 여러 방법을 도모해서라도 김지영은 일을 했어야 한다.
방아쇠는 당겨졌으니…
영화에서 불거지는 성별 갈등은 사실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남자가 더 힘드네 여자가 더 힘드네 등의 논의는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똑같이 힘들고 싶은 것이고,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을 똑같이 받고 싶은 것이다. 김지영의 이야기는 사회진출에서 소외된 사람으로서,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된 인간에 대한 얘기다. 가끔은 변화가 너무 느리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적어도 방아쇠는 당겨졌다는 생각으로 더 나은 사회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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