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정치 세계 속 한반도의 운명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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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욕망의 메커니즘 속에서 작동한다. 한반도의 운명도 환경과 인물이 변화함에 따라 새롭게 형성되는 욕망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동안 세계에서, 그리고 한반도에서 북한은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욕망의 과정에서 하나의 대상으로 소비되어 왔다.
단절된 대상이 갖는 폐쇄성은 목적에 따라 여러 해석을 낳고 의미 부여를 가능케 한다. 극우 정치는 이러한 점을 공략한다. 배제와 혐오를 구심점으로 세력을 집결하고 통치권을 발휘한다. 현재 미국과 동유럽과 남유럽으로 비대해지고 있는 극우 세력들의 정치가 그렇게 행해진다. 反이민자를 내세워 세력을 모으고 더 많은 소수자를 배척하고 소외시킨다. 북한 역시 극우 정치의 국제적 무대 속에서는 성소수자나 난민과 같은 ‘소수자’였다. 미지의 대상인 북한은 여러 이해관계에 의해 사용되어 왔고 여러 강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핵을 가지고 있는 북한은 언제나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가능한 나라였고. 위험한 국가로 전 세계인의 마음에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자연스레 북핵 문제는 북한에 대한 (공포를 가장한) 혐오를 바탕으로 북한을 국제 사회에서 배제시키는 방식으로 다뤄져왔다.
욕망, 그 방향을 바꾸다
미국에서 발생하는 욕망의 변화가 북핵이 소비되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기존 미국의 정치에서 북한의 존재, 북한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 위험은 보수 세력을 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존립의 근거였다. 극우정치가 작동되는 원동력과 유사하다.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결정과 관계 정상화를 위한 의지를 보임에도 북한의 영원한 비핵화는 불가능하다는 불신이 미국 내 확인되는 극우 여론에 자리 잡고 있는 이유다. 미국 내 다수를 형성하고 있는 강경파들은 북한이 핵무기 원료 등을 은닉할 가능성을 기정사실로 보고 비핵화는 여전히 달성되지 않았고 합의는 미흡하다는 주장을 계속한다. 이것이 기존 미국 내 자리 잡았던 욕망의 메커니즘 속에서의 북한이다.
트럼프의 욕망은 사뭇 다르다. 정치적 성공으로 명성을 얻으려는 트럼프의 욕망이 비핵화의 진전을 이끌어냈다. 한 정당의 궁극적 욕망이 집권유지라면 제 3자의 인물로 등장한 트럼프의 욕망은 무언가를 해냈다는 대통령으로서의 타이틀인 것이다. 공화당 엘리트들이 해내지 못한 것을 트럼프는 해낸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북핵 문제를 해결하면 우리는 트럼프의 극우정치를 용인할 수 있을까? 아니면 북핵 문제 해결과 극우 정치는 별도로 분리해 숙고해야 하는 것인가?
변화하는 한반도에서의 ‘평화’
한반도 운명에 대한 지금의 기대와 희망은 환경과 인물의 변화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욕망이 변했듯, 한반도의 욕망도 변했다. 광복 이후 한반도는 여전히 긴장의 연속이었다. 북한은 사실상 적멸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보수의 정치적 욕망은 북한을 정치공동체의 파트너의 범주에서 배척시키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남한만이 한반도 내의 유일한 국가임을 공고히 시켰다. 이것이 한반도의 익숙한 풍경이다.
지금의 한반도는 평화와 화합이라는 바람으로 승경(勝景)에 대한 희망을 바라보고 있다. 촛불시민혁명은 배척을 기반으로 했던 기울어진 정치지형을 상당한 정도로 정상화시켰다.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한국의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한반도에 대해 다양한 논의의 가능성이 상당한 자율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싸움이나, 특정 정당의 ‘집권 유지’라는 욕망에서 탈피해 논의의 범주를 확장시키고 한반도의 다양한 상상력을 가능하게 했다.
나아가 북한은 핵무기를 완성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나오도록 만들었다. 촛불혁명과 북미간 핵 논의에 대한 필요성이 한반도 평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것이다. 여기에 문재인의 중재자로서의 신념과 관계 정상화에 대한 김정은의 필요가 한반도의 욕망 지평을 바꾸었다.
극우정치, 극우정치로 격파한다
트럼프가 자국에서 내세우는 난민을 비롯한 소수자를 배제하는 극우정치는 현재 그가 한반도를 대하고 있는 모습과 그 욕망의 결을 달리한다. 그럼에도 극우정치와 북핵문제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시작으로 미국 내의, 그리고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는 극우정치의 분열과 파괴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었던 북한은 국제사회의 일환으로 품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극복하고 ‘다름의 공존’을 이끌어내는 시작이 될 수 있다.
정치와 외교는 동지와 적의 이분법 위에서 작용하지만 그 적은 공존해야 할 존재로 필수적이다. 무조건적으로 틀린 이데올로기는 없다. 그 방식과 발현의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서로의 본질을 부정하는 양립 불가능한 사실이 모여 역사를 만들 듯 다름의 공존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든다. 북한이 ‘자유의 가치’를 훼손하는 위험국가이기에 배제해야 한다는 논리는 퇴행적이다. 세상은 결국 바뀐다. 정치적인 믿음이 아닌 통계적인 확신으로 정치사회적 구조가 진보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 역사는 비탈길을 굴러간다. 이 세계의 관성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한반도만의 평화 공식이 필요하다. 현 시점에서는 미국을 지렛대로 삼아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한반도만의 공식으로 북핵 문제를 풀 때 미국과 유럽의 극우정치라는 변수에 대처할 수 있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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