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소년단 유엔 연설, 그리고 두 개의 연설이 더 있었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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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 한국 아이돌 최초로 유엔 무대에 서다
지난 9월 24일, 한국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은 유엔총회 단상 앞에 섰다. 우리에게 유니세프로 잘 알려진 유엔 산하 유엔아동기금(UNICEF) 청년 섹션에서 연설하기 위해서였다. 유엔에서 연설하는 한국 아이돌 그룹은 방탄소년단이 최초다. 방탄소년단 리더 RM은 ‘LOVE YOURSELF(너 자신을 사랑하라)’라는 키워드로 7분간 연설했다. 이 장면을 보며, 처음엔 세계적인 방탄소년단의 인기에 놀랐고, 그 다음엔 한국인으로서 한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리고 연설 전문을 눈으로 좇으며 연설 영상을 다시 한 번 봤다.
방탄소년단 유엔 연설의 핵심 메시지는 ‘다양성 포용’이라고 생각한다. RM은 본명 김남준을 언급하며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연설을 시작한다. 평범했던 한 소년이 방탄소년단 리더로 성장하기까지 겪어야 했던 실패와 자기 부정의 시간들. 하지만 매일 실수하고 부족할지언정 끝내 자기 자신을 끌어안아야 앞으로 나아가고 성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출신 지역, 피부색, 성 정체성에 상관없이 자기 자신을 긍정하라고 주문한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시작했지만 끝에선 ‘다양성’이란 메시지를 읽어낸 이유다. 좀 더 확장하면, 미국에선 흑백 갈등이 격화되고 유럽에선 난민 문제가 정치 극우화를 불러오는 상황, 한국에서도 각종 혐오가 난무하는 현실을 떠올리게 했다.
<LOVE YOURSELF>는 방탄소년단이 그동안 발매한 앨범 시리즈 제목이고 작년부터 유니세프와 함께 하고 있는 캠페인 이름이기도 하다. 아이돌로서 처음엔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방탄소년단의 성장기, 멤버들의 자전적 이야기로 만드는 노래들의 맥락을 알기에 방탄소년단의 유엔 연설에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방탄소년단의 유엔 연설은 이 시대의 문화 아이콘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선한 영향력을 보여줬던, 두 개의 연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배우 메릴 스트립의 수상 소감
작년 1월 8일,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2017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열렸다. 골든글로브는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에서 주관하는 권위 있는 영화·TV 분야 시상식이다. 여기서 할리우드 대표 배우 메릴 스트립은 공로상을 받는다. 소감을 말하기 위해 무대 위에 선 그녀, 그리고 그녀가 6분간 쏟아낸 강렬한 언어는 우리가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수상 소감이 되었다.
메릴 스트립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요즘 미국 사회에서 가장 비난 받는 사람들”이란 농담기 어린 말로 시작한다. 그 이유는 이들이 “할리우드, 외국인, 기자(Hollywood, Foreigners, Press)!”여서다. 실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고도의 비판을 시작하겠다는 뜻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반(反)이민 행정명령을 발동했으며, “언론은 국민의 적”이라며 권위 있고 전통적인 언론들을 가짜뉴스라 낙인찍길 서슴지 않았다. 또 공공연하게 백인남성우월주의를 드러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사회에서 배제하고자 한 이들이 그 시상식 자리에 있던 할리우드 배우들, 기자들의 속성과 같았다. 메릴 스트립은 배우 사라 폴슨, 에이미 아담스, 나탈리 포트만, 루스 네가, 라이언 고슬링 등의 출신과 성장배경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할리우드는 다양한 이들이 모인 곳이고, 그렇기에 ‘예술’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정책에 대한 비판 중 이보다 우아한 비판은 없었다.
그녀의 연설 중 특히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다. 연기란, 다른 사람의 삶으로 들어가 관객들이 그 사람 인생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도록 하는 것인데 최근에 깜짝 놀랄만한 연기 하나를 봤다고 말을 이어간다. “그 연기는 제게 충격을 줬습니다. 좋은 연기여서가 아닙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자리에 오르길 자처하는 사람이, 장애인 기자를 따라했던 순간입니다.” 공식석상에서 장애인을 흉내 내며 비하했던 트럼프 대통령을 지적한 것이다. 약자를 모욕하는 행위를 공적 자리에 서는 사람이 행할 때, 권력이 있는 사람이 행할 때 그 행위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런 행동을 해도 된다고 승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무례함은 무례함을 낳습니다. 폭력은 폭력을 부릅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람들을 맞닥뜨릴 때, 무차별적으로 확산되는 혐오에 좌절할 때마다 나는 그녀의 연설을 반복해서 본다.
더 주목받았어야 할, 배우 려원의 수상소감
2017 KBS 연기대상 시상식장, 여기엔 배우 려원도 있었다. 려원은 드라마 <마녀의 법정>에서 주인공 마이듬 검사를 연기해 최우수 연기상을 받았다. 감사 인사에 앞서 그녀는 중요한 얘기를 한다. “성범죄는 감기처럼 이 사회에 퍼져있지만 가해자들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드라마를 통해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 더 강화돼서 가해자들이 제대로 처벌 받고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피해자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말이다. <마녀의 법정>은 성범죄를 다룬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는 작년 10월부터 11월까지 방영됐고, 시상식은 12월 말에 있었다. 그 후 1월 말에 서지현 검사의 폭로를 시작으로 올해 상반기, 미투 운동은 한국 사회를 뒤흔든다. 미투 운동은 현재진행형이고 가해자 처벌과 성범죄에 관한 형법 개정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사회는 할리우드와 달리 문화예술인의 소위 ‘정치·사회적 발언’에 엄격하다. 자연스레 문화예술인들은 사회 이슈에 대해 활발하게 발언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기에, 려원의 수상 소감이 더 고마웠다. 그녀는 자신이 출연한 드라마의 의미를 진정으로 알고 있었다. 배우이자 한국 사회 구성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외면하지 않았다. 미투 운동 진행 국면을 지켜보며 그녀의 발언이 더 주목받았어야 했다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를 더한다고 생각한다.
연설 바람이 부는 문화예술계를 보며
방탄소년단의 유엔 연설, 메릴 스트립과 려원의 수상 소감은 문화예술인들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 좋은 예다. 이들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묵직한 화두를 귀 기울여 들을 만하다. 때로는 이들의 영향력에 힘입어 우리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속도가 빨라지기도 한다. 문화예술인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할 수 있도록 한국 사회 분위기가 유연해지길 바란다. 그런데 한켠으론 씁쓸하다. 온전히 문화예술인들의 축제여야 할 시상식장이 ‘연설의 장(場)’이 된 탓이다. 이들이 사회적 발언을 하는 데에는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할 것이고 감수하거나 잃을 게 많을 테다. 그럼에도 문화예술인조차 직설적인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 안될 만큼 세계는 분열돼 있고 우리 사회는 곪고 있다. 이들이 던진 화두를 이어 받아 현실을 바꾸는 건 결국 전체 사회 구성원들의 몫이다. 방탄소년단, 메릴 스트립, 려원의 연설에 감동하는 한편 이들이 무대 밖, 스크린 밖에서 전투적 각오로 연설해야만 하는 상황의 이면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잊을 만하면 이들의 연설 영상을 찾아보길, 반복해서 보길 권한다. 유튜브에서 언제든 볼 수 있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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