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더 좋은 집에 살고 싶은 사람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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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9월21일 17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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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서초동 아파트 산 큰집이 말이야, 처음에는 전세 끼고 시작했대!”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부동산 재테크 ‘성공 신화’이다. 인생 경험이 별로 없는 필자만 해도 심심치 않게 들어왔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가진 돈으로 투자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더 좋은 데서 살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성실히 저축한 돈을 적법하게 투자해 이익을 내는 것을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가 손가락질할 수 있는가. 농구선수 서장훈, 300억대 부동산 재벌이라는 배우 김희애도 각각 ‘건물주’, ‘재테크의 여왕’등의 별명이 붙었을 뿐 지탄받지는 않고, 또 그들이 지탄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투자와 투기의 차이는 근소하다. 단기성 이익을 목표로, 빚을 내면서까지 땅을 매입하여 시장에 혼란을 주느냐에서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무 자르듯 판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정부는 더욱더 합법의 선을 그어놓고 담합처럼 투기를 조장하는 불법적 행위를 근절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투자가와 투기꾼을 한데 묶어 규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투기세력은 분명 청산해야 할 적폐이지만, 적폐를 판단하는 기준이 문제적인 것이다. 정부는 투자할 돈이 있는 사람들을 모두 ‘잠재적 투기꾼’으로 상정하고 있는 듯하다. 이 잠재적인 적폐 세력을 청산하기 위해 쏟아낸 부동산 정책들은 이들을 향한 ‘징벌’에 가깝다. 

 

 물론 더 가진 사람이 사회에 더 무거운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미국 전 대통령 오바마가 “워렌 버핏의 비서에게 버핏과 같은 세율을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듯 말이다. 그러나 ‘가진 자’에 대한 차등적 의무와 징벌은 다르다. 차등에 대한 법적 근거가 탄탄하고, 차등으로 인한 사회적 쓰임이 시스템화되어 있을 때 차등적인 의무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된다. 반면 이번 부동산정책에서 급격히 올린 종합부동산세에 대한 법적 근거는 취약하다. 주택을 보유했다고 해서 투기한 것도 아니고, 집값 폭등에 기여한 것도 아닌데 그 결과를 나눠 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 집값이 올랐다 해도 집 한 채만 가진 사람들은 당장 수익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2022년까지 최대 3배까지도 오를 수 있는 종부세를 부담해야 하는 부당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그것도 이렇게 급격한 상승폭으로 종부세를 ‘때리는’ 것은 집 가진 사람에 대한 징벌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고가주택 보유자와 함께 ‘징벌 대상’으로 묶이게 된 1주택자 중산층들은 형평성을 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9.13 부동산 대책’에, 1주택자들의 추첨제 물량 청약 우선권을 무주택자들에게 주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사정으로 더 적합한 집으로 가길 원했던 이들은 집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양보를 강요당한 것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올라온 비슷한 내용의 글은 많은 추천을 받으며 전국민의 40.5%에 달하는 1주택자의 공감을 받았다.

 

 소위 ‘부자증세’라고 하는 이러한 성격의 징벌적 의무는 한계가 있다. 주로 소득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부자증세는 그 의미 자체에도 문제점이 있고, 기능에도 한계가 있다. 우선 1주택자들이 분노했던 이유와 마찬가지로 ‘부자’를 정의하는 기준이 모호하다. 그 기준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어쩔 수 없이 자의적인 기준에 따르면 위와 같이 형평성 논란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로는, 국가가 개인의 자산을 판단하고 처분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적법하다는 전제 하에 개인의 부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손가락질할 대상이 아니다. 기능적인 측면에서도, 부자증세를 통한 소득불평등 완화는 한계가 있다. 새로운 자본이나 혁신수단을 창출하기보다는 ‘자본 돌려막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국민이 스스로 소득불평등을 극복할 수 있게,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게 사다리를 만들어줘야 하는 큰 임무가 있다. 이 정부가 ‘운명’으로 믿는 적폐 청산과 경제구조 혁신에 실체가 있다면 그건 용들을 때려잡는 게 아니라, 개천에 다양한 분야의 사다리를 놓는게 바로 그 운명이어야 한다.

 

 이러한 징벌적 부동산 정책이 이러한 문제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적합한 효과를 냈는가 하면, 또 그것도 아닌 듯하다. 서민 및 중산층만 규제의 직격탄을 맞는 등 부작용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투자 목적으로 집을 구매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로 정부는 대출을 빡빡하게 규제하고 있다. 무주택자를 제외하고는 집 관련 대출을 아예 받을 수 없을 만큼 조건을 강화했고, 규정도 복잡하게 바꿨다. 유예기간도 없이 시행하는 바람에 시중 은행들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아예 주택담보대출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대출 틀어막기’로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당연히 대출이 필요 없는 고소득자가 아닌, 서민 및 중산층이다. 대출의 도움없이 집값을 마련할 수 있는 사람들은 ‘집값 특수’를 누리는데, 서민들은 그 때 살 걸 그랬다며 후회하느라 가정에 불화까지 생긴다. 물론 폭등한 집값의 수요를 한시적으로 진정시킨다는 의미가 있겠지만, 공급 대책 등의 장기적인 계획 없이 대출만 누르면 부작용만 커지며 상황은 나아지기 어렵다. 

 

 이러한 부작용이 자꾸 생기는 이유 역시, 체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관련 부처 간에 계속 엇박자가 나는 것도, 정책을 내놨다가 여론이 좋지 않으면 뒤집어 버리는 것도 모두 그렇다. (집) ‘가진 자에 대한 책임론’이라는 추상적이고 정치적인 신념에 의거할 뿐이다. 이념에 의거한 설익은 정책은 허술할 수밖에 없고, 정보가 부족해 빠져나갈 수 없는 서민들은 부작용에 직격탄을 맞는 것이다.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에는 지주들을 무조건적으로 매도하는 노인이 등장한다. 많은 인민재판 끝에 몇 사람이나 죽음으로 몰아넣은 노인의 분노는 결국 스스로를 옭아매며 결국 그를 파멸시킨다.  ‘가진 자’에 대한 실체 없는 분노는 자칫 위험해질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정책은 국가의 부당행위를 절차 없이 손쉽게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 아울러 잘 살고 싶은 욕망을 터부시하는 것 또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지양해야 할 것이다. 부디 정부의 다음 부동산 정책은 시장성을 잘 반영한, 현실적이며 일관적인 정책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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