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한 한국, 세 나라의 요즘 것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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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사드 보복 뒷이야기
2017년 11월 4일, 베이징올림픽 주경기장은 인파와 함성으로 들썩였다. 그날은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 결승전이 있는 날이었다. 결승전에 오른 두 팀은 모두 한국팀. 그러나 이들을 응원하려고 4만여 명의 중국 관중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지난해 가을은 한국을 향한 중국 정부의 사드 보복이 한창 진행되던 때였다. “현대차와 기아차의 2017년 중국 판매량이 전년 대비 40% 가까이 줄었다” “10월 초 중국 국경절 연휴를 맞아 국내에 올 것으로 예상되는 중국 관광객이 반 토막 날 것으로 보인다”는 신문기사를 매일 접했다. 그러나 e스포츠 분야만큼은 사드 무풍 지대였다. e스포츠는 ‘Electronic Sports’의 줄임말로 온라인상에서 게임을 개인 또는 팀별로 겨루는 걸 말한다. 한국은 e스포츠라는 말을 만든 종주국으로 <크로스파이어> <배틀그라운드> 같은 한국산 게임은 물론 수많은 한국인 프로게이머와 코치까지 중국에 진출시킨 상태다.
한국의 e스포츠에 열광하는 중국인은 대부분 20~30대다. 중국에선 80년대에 태어난 세대를 가리켜 ‘바링허우(八零後)’ 90년대 생은 ‘주링허우(九零後)’라고 한다. 바링허우와 주링허우, 일명 ‘80후(後) 세대’는 중국이 개혁·개방하고 나서 물질적 풍요 속에 자랐다. 한 집에 자녀가 하나 또는 둘뿐이라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고 IT 기기에 친숙하며 최근 소비시장의 주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들은 자국의 정치적 이슈에 크게 관심이 없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사드 이슈 와중에도 온라인을 통한 한국산 소비는 활발했다. 중국 정부는 사드 보복의 일환으로 한국 콘텐츠 수입 및 방영을 금지했지만, 실제 한국 최신 드라마는 방송 후 3시간이면 한쥐TV앱을 통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약 2억 명의 중국인이 한쥐TV앱을 사용하고 있다. 중국의 가장 트렌디한 유통 플랫폼 ‘샤오홍슈’마저 정치적 이유는 소비 시장의 단기적 요인일 뿐이라고 진단한다.
북한 장마당 세대, 그들은 누구인가
중국에 바링·주링허우가 있다면 북한에는 비슷한 또래의 장마당 세대가 있다. 장마당 세대는 북한에서 1980~90년대 출생한 이들로 김정은 시대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는 세대다. 이들을 ‘장마당’이라고 수식하는 이유는 장마당에 기대 생존하고 성장해온 세대여서다. 계획경제체제인 북한에선 자유롭게 돈과 물건이 오가는 시장이 금지돼 있다. 그런데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고 우방이던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한 후 최악의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북한에는 고난의 행군 시기가 도래한다. 국가 배급망이 붕괴하자 북한 주민들은 살기 위해 팔 수 있는 건 모두 가지고 나와 암시장을 만들었다. 그것은 사회주의 국가 북한에서 생겨난 자생적 자본주의, 바로 장마당이 된다. 장마당에서 10대를 보낸 이들을 ‘장마당 세대’라 일컫는 것이다. 이들에게 국가 배급의 기억은 없다.
“조선노동당에 기대서는 못살아도 장마당에 기대서는 살 수 있다”
장마당 세대의 현실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북한에는 조선노동당과 장마당, ‘두 개의 당’이 있다는 농담도 서슴지 않는다. 먹고 살기 바빠 의무 교육조차 제대로 이수하지 못한 이들을 두고 ‘못 배운 세대’라고도 한다. 그러나 장마당 세대에게는 장마당이 곧 자본주의 학교였고, 시장을 통해 유통되는 남한 드라마 등으로 외부 문화 콘텐츠를 접하기도 했다. 강한 생존력과 실리주의를 지닌 장마당 세대가 이제 북한 사회의 변화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의 2030세대가 북한을 대하는 이중적 태도?
한국의 2030세대를 중국의 바링·주링허우나 북한의 장마당 세대처럼 한 단어로 정의하긴 어렵다. X·Y·Z세대, 밀레니얼 세대, N포 세대 등 그간 세대를 규정하고자 하는 수많은 단어들이 쏟아졌지만 확실하게 포괄하는 단어는 없는 듯하다. 그러나 한국의 1980~90년대생 역시 중국의 바링·주링허우, 북한의 장마당 세대와 또래일 뿐만 아니라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지난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 문제가 뜨거웠다. 이 문제를 두고 세대별로 의견이 갈렸다. 기성세대는 북한과의 스포츠 교류를 목격한 경험이 있고, ‘남북 평화’라는 대의를 생각해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2030세대는 이를 ‘불공정 문제’로 인식했다. 단지 북한 선수라는 이유만으로 올림픽 출전권을 ‘낙하산’으로 획득하는 것에 분노했다. 기성세대는 요즘 청년들이 통일 의식이 결여됐다고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곧 분위기 변화의 계기가 찾아온다.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고, 평양냉면에 관한 농담이 이어지면서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대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정상회담 전에는 김정은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4.7%에 불과했지만 정상회담 후에는 48.3%로 급격히 증가했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젊은 세대는 통일 후 가장 하고 싶은 것으로 ‘대동강 맥주 축제 가기’ ‘평양 거리·명소 탐방’ ‘옥류관 가서 냉면 먹기’ ‘기차 타고 유럽 가기’ 등을 꼽았다.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통일의 역사적 의의나 무게감과는 거리가 먼 통일 후 상상인 셈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젊은 세대의 북한에 관한 입장은 일관되다. 평창올림픽이든 통일이든 이를 모두 내 삶과 직결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중국·북한·한국 2030세대의 공통점은 ‘실용주의’
이쯤 되면 중국, 북한, 한국 청년들의 공통점이 보인다. 중국의 바링·주링허우, 북한의 장마당 세대, 한국의 2030세대는 모두 실용주의 세대다. 사드 보복을 위해 중국 정부가 관광객 한 명까지 제한하는 ‘국민 총 동원령’을 내렸지만 중국의 젊은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 가수의 음악을 들었다. 북한 청년들은 “국가가 무섭긴 하지만 일단 먹고 살고 봐야 한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경험하며 자랐다. 개성 한옥마을 탐방을 꿈꾸는 한국 청년들에게 우리는 원래 한 민족이니 통일해야 한다는 엄숙주의는 통하지 않는다. 이념이나 대의, 국가적 가치관보다 직접적인 내 삶의 변화에 주목하는 것이다.
본인이 바링허우이면서 책 『바링허우』을 쓴 양칭샹은 부모세대와 바링허우 세대의 역사 인식을 비교했다. 부모세대의 삶은 국가의 역사와 일치한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의 영향력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부모세대에게 역사는 추상적인 담론이 아니라 ‘실체’였다. 하지만 자녀세대인 바링허우들은 이런 역사의식을 계승하지 못했다. 바링허우들의 성장과정 동안 발생한 역사적 사건들은 대부분 개인의 생활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역사는 역사고 생활은 생활이었다. 그래서 바링허우들은 대지진이나 올림픽 성화 봉송의식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역사적 이벤트에 높은 참여 의지를 보인다. 이럴 때 일시적으로나마 역사적 존재감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중국 청년들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주어를 한국 2030세대로 바꾸어도 내용상 어색함이 없다. 당에 헌신하기보다 나만의 가게를 갖는 게 꿈이 돼버린 북한 청년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세대는 곧 각 국가의 주역이 된다. 역사의 전환을 주도하고 그 변화를 삶 속에서 실체적으로 받아들이며 살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 중국 굴기, 북한의 개혁 개방, 남북 평화와 통일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눈앞에 둔 삼국이 ‘요즘 것들’의 가치관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주변 국가들 이해관계 조정, 하나 된 국론 형성과 더불어 미래 세대의 가치관 고려까지. 자국 우선주의를 위한 더욱 복잡해진 삼차 방정식이 세 나라 기성세대의 눈앞에 있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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