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슬픈 영화가 치유하는 슬픔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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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4월20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8년04월20일 15시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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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이후 미국 영화


전년 대비 제작 편수 100% 증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수치다. 미국 영화산업에서 ‘테러리즘’ 관련 영화는 2002년 분기점을 맞는다. 2001년 9월 11일 이후에 생긴 변화다. 9·11 테러의 아픔을 상업 영상으로 내놓는 게 쉽겠냐는 우려가 많았지만 다큐멘터리, TV 시리즈, 비디오 출시작을 가리지 않고 관련 콘텐츠가 만들어졌다. 9·11이 7년이나 지난 2008년에도 ‘테러리즘’을 키워드로 하는 작품 수는 정점을 찍었다. <플라이트93>, <월드트레이드센터>와 같이 9·11을 직접 다룬 영화는 물론이고 프랜차이즈 히어로 무비에도 테러를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 빈번히 등장했다. 결코 9·11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미국인들은 그날을 적극적으로 기억하고, 추모하고, 공동의 정서를 만드는 방식으로 국민적 아픔을 이겨내려 했다. 그 과정에서 문화 콘텐츠가 큰 역할을 했다.

한국 역사의 아픔을 기록한 콘텐츠

한국인들이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작년에 주목 받은 영화중에 <택시운전사>와 <1987>이 있다. <택시운전사>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1987>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부터 6월 민주항쟁에 이르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두 사건을 다룬 콘텐츠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각각 1200만, 7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 소설이나 영화로 재가공 될지라도 역사를 소재로 하는 콘텐츠는 ‘기록물’이다. 신문기사나 다큐 같은 사실 추구 기록물이 미처 담지 못하는 역사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무엇보다 이런 콘텐츠는 ‘치유’의 역할을 수행한다. 콘텐츠로 만든다는 것 자체가 해당 역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온 콘텐츠가 많은 관객들에게 도달할수록, 비극적 역사의 당사자뿐 아니라 간접적으로 영향 받은 한국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감하며 위로받는다. 비극을 다룬 역사 콘텐츠가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이유다.

2014년 4월, 또 하나의 비극

그리고 한국 사람들의 정서적 토대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한국 사회에서 재난영화가 만들어지고 그 관객이 된다는 건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됐다. 2016년에 나란히 개봉한 영화 <부산행>, <터널>, <판도라>가 있다. 각각 좀비 바이러스, 무너진 터널 사고, 원자력 발전소 폭발을 소재로 한다. 하지만 서사는 동일하다. 세 영화 모두 재난이후 정부는 무능을 드러내고, 언론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며, 피해자가 방치되는 이야기다. 감독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보는 이로 하여금 ‘세월호 참사’라는 하나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들은 현실에서 출발해 허구의 상상력을 펼치기보다, 현실을 재연한다. ‘이미 목격한’ 우리 사회 안전 시스템의 붕괴를 그대로 베껴오는 것이다. 픽션보다 극적인 현실을, 영화적 상상력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을 테다.

TV 드라마 속 한 줄 대사 역시 세월호를 떨치지 못했다. tvN 드라마 <시그널>에는 “걘 믿은 거야. 지켜줄 어른이 있을 거라고!”라는 대사가 나온다. KBS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게 국가야.”라는 대사가 눈에 띄었다. jtbc 청춘시트콤 <청춘시대>에서 4명의 주인공은 보통의 해맑은 20대로 보이지만, 그 중 강이나는 명백히 세월호 참사를 은유하는 선박사고의 생존자로 나온다. 이런 대사와 장면들을 보면서 시청자들이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기란 쉽지 않다. 비극을 소재로 한 콘텐츠가 현실과 나란히 감상되는 셈이다. 세월호 참사라는 단일한 사건은 이렇게 콘텐츠 제작자뿐 아니라 시청자의 감상 방식마저 바꿔 놓았다.

콘텐츠, 가치 있는 추모의 방식

어떤 이들은 이제 고등학교 복도에서 학생들이 까르르 웃고 지나가는 장면만 봐도, 노랗게 핀 개나리를 보고도 세월호를 떠올리게 됐다. 오죽하면 나는, 2009년 비행기 추락 실화를 다룬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2016)를 보면서도 세월호를 떠올렸다. 세월호와는 전혀 상관없는, 전형적인 미국식 영웅주의 영화였는데도 말이다. 앞으로도 범죄 드라마의 대사 속에서, 재난영화의 한 설정 뒤편에서 세월호는 수시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재난은 애초에 예방하는 게 가장 좋지만 이미 발생하고 난 후에는 ‘재난 이후의 태도’가 중요해진다. 그때 문화 콘텐츠가 가치를 발휘한다. 미국인들이 9·11을 그렇게 견뎌냈듯, 국가적 트라우마에 허우적대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건 어쩌면 문화 콘텐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제는 비극적 콘텐츠가 추모의 한 방식이란 걸 안다. 이건 비단 세월호 참사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하다못해 연인과 이별한 후에 슬픈 노래만 찾아 듣던 경험 한 번쯤 있지 않은가. 앞으로도 맞닥뜨릴 역사적 비극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콘텐츠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비극을 은유하는 문화 콘텐츠는 보는 이들에게 심리적 연대감을 갖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비로소, 트라우마 극복의 첫 발을 내딛을 수 있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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