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확실한 낙관이 필요한 때 본문듣기
작성시간
관련링크
본문
2018년 개인을 읽는 키워드, 자존감
서점에 가면 동시대 사람들의 최신 관심사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바뀌는 검색어로는 한 해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을 알기에 부적절하고, 고민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책에서 답을 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일 년 동안 일주일이 멀다하고 서점을 들락거리며 지켜본 바, 2018년 개인을 읽는 키워드는 ‘자존감’이다. 자존감은 ‘자아존중감’의 줄임말로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여 자신의 가치에 관한 전반적인 사고와 태도를 말한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오늘처럼 내가 싫었던 날은 없다> <나라는 이상한 나라> 등.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는 책 제목만 봐도 자존감이란 키워드가 금세 추려진다. 15년 전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필두로 쏟아지던 “독하게 공부해서 하버드 갔다”류의 자기계발서 열풍이 가고 바야흐로 ‘자존감계발서’의 시대가 온 것이다.
재밌는 사실은 자존감계발서와 자기계발서 열풍의 배경이 같다는 점이다. 바로 ‘경쟁’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져만 간다. 특히 생애주기에 따라 달성해야할 목표가 분명한 한국 사회에서 경쟁은 누구에게나 평생의 레이스다. 자기계발서가 개인을 채찍질 해 경쟁에서 오직 승리!를 외쳤다면, 자존감계발서는 경쟁에 고통 받는 개인들이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든 결과물이다. 자존감계발서는 2·30대 청년들이 주요 독자다. 경쟁에 노력으로 임해도 바늘구멍 같이 좁은 문, 불공정한 외부 요인으로 인한 무력감 등이 경쟁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게다가 경쟁은 단일한 목표 아래 줄 세우기식 서열 평가다. 하여, 개인들로 하여금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취가 꼭 한 가지 모습이어야 할까?’를 묻게 만든 것이다. 김난도 교수도 2019년 트렌드 키워드로 ‘나나랜드(나를 위한 삶)’를 선정한 바 있다. 경쟁에서 파생된 ‘나’와 ‘자존감’ 열풍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2018년 한국 사회를 읽는 키워드, 불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언론사들이 앞 다퉈 ‘2018 대한민국 10대 뉴스’ 등을 내놓는다. 뉴스에 나오는 사건·사고를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 민낯이 보인다. 순위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미투 운동, 소득주도성장 논란, 사법부 재판 거래 의혹, 각종 안전사고를 2018년 한국 사회를 뒤흔든 큰 뉴스로 꼽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불신’이라고 생각한다.
미투 운동은 서지현 검사의 언론사 인터뷰로 촉발됐다. 그 후 문화예술계·학계·정치권 등에서 성범죄 폭로가 이어졌다. 미투 운동은 원래 피해자들이 서로 공감하고 연대하고자 “미투!(Me too·나도!)”라고 하는 데서 시작했는데 한국 사회에선 폭로전 양상으로 흘렀다. 서지현 검사만 해도 검찰 내부에서 구제 받지 못했기에 언론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검사마저 쉽게 피해자가 될 수 있고 법적 절차를 밟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점. 분야를 막론하고 조직의 자정 능력과 한국의 형사법적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여론에 호소하게 만들었다. 미투 운동에 더해 사법부 재판거래 의혹은 법원 전체와 법원의 존재 이유인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연루된 대법관들은 판사의 소명의식을 가지기는커녕 대법원장에 상명하복했다. 법원행정처는 원고들의 삶이 달린 사건을 상고법원 도입을 위한 거래 수단으로 삼았다. 사법부 재판거래 의혹은 평생 법원 근처에 갈 일 없을 사회 구성원들마저 법원을 불신하게 만들었다. 법원이 다시 신뢰를 회복하는 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다.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로로 대표되는 소득주도성장은 그 효과를 두고 많은 논란을 낳았다. 정부는 밀고 나가는듯하다가 한 발 물러나고 기업들 말을 들어주는듯하다가 친노동으로 선회했다. 그 과정에서 경제 주체 간 갈등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부정적인 경기 전망보다 경제를 더 위축시키는 건 불확실성이라고 한다. 현재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논란은 정부의 불확실한 태도에 대한 불신이라고 생각한다. 정부는 기업과 근로자 모두에게 신뢰 받고 있지 못하다. 경제 정책만이 아니다. 강릉 펜션 사고, 일산 열수관 사고, KTX 탈선 등 최근만 해도 굵직굵직한 사고가 잇달아 터졌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에 대한 높아진 국민 관심도는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한다. 그런데 정부는 여전히 사후약방문식 실효성 없는 규제 강화에 그친다.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정부의 재난예방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쌓인다. 그 불신이 정권지지 철회로 이어지는 건 순식간이다.
2018년 세계를 읽는 키워드, 분열
올해 국제 정세를 보여주는 단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지난 6월 캐나다에서 열린 G7(선진 7개국) 정상회담 사진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팔짱을 끼고 메르켈 독일 총리를 똑바로 바라보고, 메르켈 총리 역시 탁자에 손을 짚은 채 트럼프 대통령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메르켈 총리 옆에는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메이 영국 총리가 서 있다. 메르켈 총리와 트럼프 대통령 사이에 서 있는 아베 총리는 답답한 표정이다. 보호무역, 파리기후변화협정, 이란 핵 합의를 두고 미국과 다른 국가들은 사사건건 갈등했다. 결국 올해 G7 공동성명에서 미국은 빠졌다. 2차 대전 이후 세계 질서를 이끌며 G7으로 불리던, 미국과 6국이 분열하는 순간이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2년, ‘동맹’의 의미가 변했다. 그동안은 자유 무역과 세계 안정을 추구하는 가치 동맹이었다면, 이제는 철저히 손익을 따지는 이익 동맹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세운 동맹의 기준이다. 나머지 국가들이 아무리 전통 질서를 고수하려해도 초강대국 미국이 노골적으로 아메리카 퍼스트를 추구하면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영화관이나 공연장에서 앞줄에 앉은 사람이 혼자만 더 잘 보기 위해 일어나버리면 뒷줄에 앉은 사람들도 줄줄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G6 국가들 뿐 아니라 올해 미중관계도 다사다난했다. 미국은 중국 수입품 2000억 달러에 10%의 관세를 부과했고, 화웨이 최고재무책임자 멍완저우를 체포했다. 문제는 미국이 다른 국가들을 상대로 미국 편을 들라고 편 가르기를 한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각국도생(各國圖生)’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다. 최소 트럼프 대통령 1차 임기인 2020년까지 ‘분열’은 세계를 긴장시키는 키워드가 될 것이다.
크고 확실한 낙관이 필요한 때
“요즘 전 세계가 동시다발적으로 사춘기를 겪고 있는 것 같다”는 표현을 읽었다. 이 표현을 2018년 키워드인 개인의 자존감, 한국 사회 불신, 세계 분열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은 사회가 정해준 목표에 표류하고, 한국 사회의 공적 기관들은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며, 각 나라는 생존 경쟁에 몰두한다.
나는 이 모든 일들이 ‘롤모델 부재’ 그리고 ‘가치 부재’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기성세대의 성공 방정식을 따르길 거부하는 젊은 세대가 우리 세대만의 답을 찾기 위해 자존감을 파고든다. 중요한 건 그 후다. 자존감을 되찾은 젊은 세대가 충만한 자존감을 바탕으로 추구해야할 비전을 제시 하는 일 즉, 새로운 롤모델이 필요하다. 젊은 세대의 다양한 성취를 인정해 줄 사회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2019년 개인들은 자존감에서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불신과 세계 분열은 가치 부재 탓이다. 국가란 무엇인가. 좋은 지도자는 어떠해야 하나. 법은 정의로운가. 전 정권 탄핵을 거치며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한 번쯤 생각해봤을 질문들이다. 새 정부 출범에 기대를 걸었지만 집권 2년차, 우리가 바라는 국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세계 질서가 안정적으로 상호작용한 지 약 30년. 그 과실은 한계에 이르렀다. 경제적으론 보호무역주의, 정치적으론 극우 포퓰리즘 부상이 증거다. 어쩌면 세계는 역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 역사를 이어나갈 다음 세계사적 가치가 필요하다.
개인의 작은 행복에 집중하고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사는 게 요즘 말로 ‘힙하다(새로운 것을 지향하고 개성이 강하다)’고 여겨지는 시대. 이대로 흘러가 버리면 미래를 기약할 수 없고 남는 건 없다. 촌스럽지만 지금이야말로 본질·공동체·이상(理想)·통합·지향점·진보 등 추상적인 것들, 우리가 공통적으로 추구해야할 큰 가치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묶어주는 건 ‘크고 확실한 낙관’일 테다. 2019년에는 개인의 자존감, 한국 사회 불신, 세계 분열을 넘어 근거 있는 희망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싶다. 그러한 바람을 담아, 2019년 키워드를 크고 확실한 낙관으로 정해본다. <ifs POST>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