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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역 폭행 사건, 진실의 조각들
지난 14일 인터넷 게시판에 “남자 넷이 여자 둘을 폭행하여 입원중입니다”라고 시작하는 글이 올라왔다. 머리를 붕대로 칭칭 감고 피 묻은 티셔츠를 입고 있는 사진도 함께였다. 13일 새벽, 이수역 근처 술집에서 여성 2명과 남성 3명·커플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 관한 글이었다. 여성 2명 측이 최초로 올린 글만 보면, 이 여성들은 “머리가 짧고 화장을 하지 않았다” 즉, ‘여자가 여자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머리뼈가 드러날 정도로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했다. 해당 게시글은 ‘여성혐오 범죄’라 하여 인터넷에 빠르게 퍼졌고,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올라가 18시간 만에 무려 30만 명 서명을 돌파했다. 하지만 곧 당시 영상이 공개되며 사건의 다른 진실이 드러난다. 사실은 일방 폭행이 아니라 쌍방 폭행이었고, 이 여성들 역시 상대에게 모욕적인 말을 한 것이다. 결국 경찰은 양쪽 모두를 폭행 혐의로 조사했다.
처음부터 말해두고 시작하자. 이 글은 이수역 폭행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글이 아니다.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는지, 때려 마땅한 사유인지 아닌지 따지지 않는다. 여혐·남혐 한 쪽 편을 들거나 기계적 중립을 표방하지도 않을 것이다. 형사법적 시시비비를 가리는 건 경찰의 몫이고, 이 사건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좀 더 시간이 지나봐야 분명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왜곡된 진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퍼져서 잘못된 여론을 형성하는지, 그 과정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수역 폭행 사건과 같은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240번 버스 사건의 전말
지난 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240번 버스 사건’이 있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승객 목격담이 올라왔다. 5살도 안 돼 보이는 아이 혼자 내렸는데 버스는 문을 닫고 출발해버렸다. 아이 엄마가 내려 달라고 했지만 버스기사는 무시했고, 다음 정거장에서 울며 뛰어 내리는 아이 엄마에게 욕설까지 했다. 해당 글 역시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사 순식간에 인터넷에 퍼졌다. 청와대에 청원된 것은 물론 버스회사에 항의가 빗발쳤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지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루 뒤 공개된 CCTV를 보면 버스가 출발하고 몇 십 초 뒤에서야 아이 엄마는 하차를 요청한다. 하지만 이미 차선을 변경한 상태라 즉시 하차는 위험했다. 아이 엄마는 울부짖지 않았고 버스기사도 욕설을 하지 않았다. 진실이 밝혀지자 여론은 금세 잠잠해졌다. 그러나 240번 버스기사 분은 고통의 기억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쯤 되면 이수역 폭행 사건과 240번 버스 사건의 유사한 진행 구조가 보인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 하나가 올라온다. 해당 글은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즉각적으로 자아내기에 충분히 충격적이다. “부당한 일을 당했다”며 특정 인물이나 업체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식이다. 순식간에 온라인 게시판·SNS에 퍼지고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올라간다. 언론에도 보도된다. 경찰은 진상 파악에 들어가고 그렇게 드러난 진실은 최초로 봤던 글과는 다르다.
이수역 폭행 사건과 240번 버스 사건은 인터넷 마녀사냥·여론재판의 예다. 사람들은 이 사건에서 해당 글을 SNS로 공유하거나 청와대 청원 서명을 하는 식으로 관여하는 게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이런 역할은 왜곡된 진실에 농락당했다는 점에서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실체를 모른 채 사건을 키운 가해자이기도 하다. 고작 하나의 글이 인터넷에서 어떻게 영향력을 획득하는지, 그 매커니즘을 파악한 이들은 직접 ‘인터넷 공개수배’를 하기도 한다. 아직 용의자인지 확실하지 않은데 개인이 습득한 CCTV·블랙박스 영상과 신상정보를 공개하며 자신의 처지를 호소한다. 이런 과정은 지목한 인물이 범인이 아닐 경우 제2의 240번 버스 사건이 된다는 점에서 큰 문제고, 그렇게 해서 범인이 잡힌다고 해도 명예훼손·모욕죄는 물론 정당한 형사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원인 하나, 인터넷 환경: 익명성과 극단성
인터넷 여론재판을 가능케 하고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는 덴 이유가 있다. 우선 인터넷 환경이 원인을 제공한다. 인터넷은 ‘익명의 공간’이다. 대면이 아니라 상대의 표정, 반응, 감정을 알 수 없다. 타인을 비난하는 데 크게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악의적인 글을 올리는 사람도 이에 동조하는 우리도 날선 언어를 쉽게 쏟아낸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화면을 마주하고 있으니 사람을 대한다는 걸 잊는다. 또 인터넷의 익명성은 모두의 목소리를 평등하게 했다. 성별, 나이, 직업에 상관없이 모든 의견이 동등하게 취급 받을 수 있는 조건이다. 이는 인터넷의 극단성과 연결된다.
사회적 정보를 배제하니, 인터넷에서 영향력을 획득하는 방식은 ‘내용’에 달려 있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일수록 순식간에 확산된다. 이수역 폭행 사건·240번 버스 사건의 온라인 게시글도 사건 개요가 간단하고, 충격적이며, 비난 받아야할 인물이 뚜렷했기 때문에 쉽게 주목받을 수 있었다. 익명성이 되레 내용의 극단적 포장을 부추겨 ‘주목 경쟁’이 벌어지는 배경이 되는 셈이다. 인터넷의 극단성은 양극성을 뜻하기도 한다. 인터넷 게시판에선 언제나 적 아니면 아군으로 이분법적 편 가르기가 벌어진다. 사건 당사자는 사라지고 어느 쪽에 동조하는지에 따라 네티즌들끼리 양쪽으로 분열돼 싸우며 판을 키운다.
원인 둘, 사회적 원인: 사회적 존재감 확인, 만연한 감정 노동, 거대 부패에 대한 무력감
인터넷 환경이라 해도, 사람들이 쉽게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데는 사회적 원인이 있다. 무한 경쟁 속에서 사람들은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사회에서 개인의 존재감은 점점 작아진다. 자기 효능감을 느낄 기회는 거의 없다. 이럴 때 이수역 폭행 사건·240번 버스 사건 같이 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사건이 발생한다. 잘못한 사람이 누군지는 분명해 보인다. 사실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실체를 모르는 사건인데도 가해자를 비난하고 시비를 가리는 인터넷 논쟁에 끼어든다. 정의 편에 서는 것으로 자신의 사회적 존재감을 확인한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내가 가해자를 비난하는 건 정당하다는 정의감이다. 자칭 ‘정의로운 시민’들은 자신은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때때로 더 위험하다.
한국 사회엔 감정 노동이 만연하다. 감정 노동은 이제 서비스업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곳에서 요구되고 있다. 사람들은 불만이 있으면 바로 인터넷에 비난의 글을 올리고 온라인 게시물은 순식간에 확산된다. 누구나 이런 비난 글을 두려워한다. 따라서 병원에서도, 학교에서도, 시청에서도 고객을 과도하게 대우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지나친 감정 노동에 시달리게 되었다. 과도하게 고객을 대우하면서 누구나 폭발 직전의 상태에 내몰린다. 이런 사회적 불만은 인터넷에서 공격성으로 표출된다. 이럴 때 사회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인물이 등장하면 좋은 명분이 된다. 우리 사회 만연한 감정 노동은 인터넷 여론재판이 제2의 피해를 낳고 인격살인까지 나아가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비도덕한 정치인이나 재벌들의 부패 행위도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미친다. 재벌들의 수십 억 횡령·탈세 행위에도 어김없이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진다. 사익을 추구하는 정치인들의 범법 행위가 끊이지 않고 뉴스를 장식한다. 그걸 보는 사회 구성원들은 집단적인 울분과 좌절 상태에 빠진다. 그렇다고 국민 개개인이 바꾸기엔 거대 시스템이며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는 적폐다. 정치·사회 지도층의 불의를 목도할 때마다 쌓인 분노는 일상에서 만난 불의한 사건에 ‘정의’라는 이름으로 폭발하듯 분출된다. 정치인이나 재벌을 팰 수 없으니, 마침 맞닥뜨린 사건의 가해자들을 패는 것이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작은 일에만 분노”하면서도 인터넷에서만 아우성칠 수밖에 없는 게 현재 한국 사회 분위기다.
얼굴 없는 정의의 심판자들을 당당한 시민사회 구성원으로
이수역 폭행 사건은 2018년을 돌아볼 때 빼놓지 말아야 할 사건 중 하나다. 240번 버스 사건은 2017년이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12년에는 교보문고 광화문점 푸트코트 화상사고 논란이 있었고, 채선당 임신부 사건도 있었다. 지난 6년간 유사한 사건들이 반복된다는 건 이를 촉발시키는 우리 사회 병폐들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특히 이번 이수역 폭행 사건은 단일한 사회적 쟁점이 아니라 우리에게 여러 가지 사회적 과제를 던져줬다. 폭력의 정당성 문제, 시한폭탄 같은 여혐·남혐 갈등, 인터넷 이용의 윤리의식, 언론 보도 행태 등이다. 네티즌들도 이제는 인터넷 여론재판의 ‘학습 효과(여러 번 반복함으로써 숙달되는 현상)’를 알아야겠지만, 사회적 근본 원인에 대한 고찰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인터넷에서는 ‘얼굴 없는 정의의 심판자들’이지만 결국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다. 이들의 ‘화력(火力)’이 당당한 시민사회 구성원으로서 건강하게 분출되길 바란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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