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영혼의 경제학 여정(旅程) <18> 중화학공업의 수출산업화 전략 연구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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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 공업 육성의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 공업정책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1973년 1월 12일, 고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기자 회견을 통해 “중화학 공업화 선언”을 발표했다. 이 시점부터 한국의 산업정책, 더 나아가 경제정책은 중화학 공업 중심으로 전면 개편되어 갔다.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전략을 60년대 이후 추진해온 한국 정부는 경공업 제품 위주 수출증대의 한계를 인식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과의 군사적 긴장 관계를 고려할 때, 1972년에 세계에 공식적으로 선포된 미국 닉슨 대통령의 괌독트린으로 한국 정부는 자립 국방 능력의 강화를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3년에 중화학 공업이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8%로서 1960년의 33.2%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중화학 공업화 선언' 이후 정부가 다양한 육성 정책을 편 결과 중화학 공업의 비중이 1977년에 41.6%로 상승했다. 그러나 이것은 성공적 수출주도 경제성장국으로 평가 받는 몇 나라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었다.
<표1> 100억 달러 수출 시 각국의 중화학공업화율 비교
위의 <표1>을 보면 100억 달러 수출 시, 중화학공업화율(제조업에서 중화학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서독과 일본은 65.3%, 대만은 53.2%였다. 한국의 41.6%에 비하여 현저히 높은 수준이었다.
한국 내수시장의 협소성(狹小性)을 고려할 때, 중화공 제품들을 해외에 수출하여 수요 기반을 확충하지 않고서는 중화공의 발전이 어렵고 공산품의 지속적인 수출 증대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정부는 판단했다.
<표2> 수출의 중화학공업화율 추이
위 <표2>를 보면, 1973년의 선언 이후 수출의 중화학 공업화 비율은 74년에 37.5%로 큰 폭의 상승을 보였으나 그 이후 오히려 감소하여 1977년에는 36.2%에 머물렀다. 이런 추세는, 생산 경험과 기술의 축적을 바탕으로 경쟁력이 형성되는 중화학 공업의 특성을 고려할 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정책 당국으로선 뭔가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석산업에 관한 보고서를 마무리하자, 정 원장은 상공부에 가서 김동규 (金東圭) 차관보를 만나 보고 오라고 했다. 당시 상공부가 중화공 육성의 주무부서였다. 그리고 중화공 담당 차관보가 김동규씨 였다.
그는 중화공을 육성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이 시행 중인데, 이제 '수출산업화'라는 관점에서 정책 체계를 보완할 시점이 되었음을 강조하면서 그 방법론을 연구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여러 가지 관련 문헌을 살펴본 후, 나는 유치산업육성론의 관점에서 서독, 일본, 대만 등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였다. 대만은 당시 중화공 부품산업의 경쟁력이 강했다.
이 연구의 과정에서 생산 공정 기술, 제품 기술은 턴키 베이스(Turn Key base)로 생산설비를 해외에서 도입해 확보할 수 있지만, 계약 조건에 따라 원부자재들을 설비 수출기업에 의존하여 수입해야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인지했다. 이런 계약에서는 협상 능력에 따라 기술료 수준이나 원부자재 수입 조건의 호악(好惡)이 결정되는데, 한국과 같은 후발국은 바가지를 쓰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또한 도입된 설비를 효율적으로 운영해서 성능과 품질의 수준이 설비 수출국과 동등하게 되려면 숙련 기능공과 설비의 기술적 특성에 익숙한 기술자들의 역할이 중요한데, 이런 기능공, 기술자들은 상당 기간의 생산 경험이 누적되어야 확보된다는 점도 인식했다. 당시 해외에서 도입한 생산설비가 국내 기술 인력 부재로 유휴(遊休)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설비 도입 협상력 제고나 필요한 수준의 기술·기능 인력 확보가 모두 설비 도입과 제품생산 경험의 축적을 선행 조건으로 했다. 이런 면이 표준화된 제품의 저가 대량 생산이 경쟁력의 원천인 경공업의 경우와 달랐다. 즉 중화공 제품의 경우 설비와 기술 시장이 공급자 우위의 특성을 내포하고 있었고, 성능과 품질이 가격보다 더 중요한 경쟁력 결정 요인이었다.
때문에 중화공 제품의 수출 경쟁력을 위해서는 일정 규모의 내수 소비가 선행되는 것이 바람직했다. 이런 관점에서 전쟁은 중화공 발전의 좋은 조건이 될 수도 있었다. 대량 소비와 대량 생산이 가능하고 신기술 제품을 실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 박사,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오늘은 내가 한잔 사겠으니 이곳으로 오세요.”
명동에 있는 어느 음식점이었다. 이 집에서 김동규 차관보와 나는 마주 앉았다. 연구보고서가 완성된 직후였다.
<사진: 중화학공업의 수출산업화 전략 - 서독·일본·대만의 사례를 중심으로>
나는 다음날 대만에 출장이 예정되어 있어 마음의 여유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는 나의 노고에 고맙다는 뜻으로 폭탄주를 권했다. 나로선 처음 마셔보는 독한 술이었다. 후에 알았지만 그는 상공부에서 알아주는 애주가였다. 그와 대작(對酌)을 하다 보니 대취(大醉)하게 되었다. 나는 다음날 대만행 비행기를 놓치고 집에 누워있었다.
이 연구보고서는 상공부의 관련 부서가 유용하게 활용했다는 후문(後聞)을 들었다. 나는 이 연구를 기점으로 플랜트 산업, 엔지니어링 산업 등 산업연구를 했고, 그 과정에서 창원, 울산, 포항 등의 공단을 자주 찾아가서 현장에서 땀 흘리는 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또한 일본의 통상산업성(通商産業省)을 자주 방문하여 담당 공무원들과 일본의 경험을 공유했다.
<사진: 1978년, 창원공단에서 공장장과의 대화.>
일본의 경험을 배우려는 노력의 과정에서 나는 일본의 중진 경제학자 두 분과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인간적 우정도 쌓았다. 히도스바시(一橋)대학의 이빼이 야마자와( 山澤一平, 국제무역 전공) 교수와 주오(中央)대학의 사이또 마사루(齊滕 優, 기술이전론 전공) 교수였다. 이 두 분과의 교류는 2016년까지 이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국제무역에서 비교우위는 부존자원에 의해서 결정되는 부문보다는 공정(工程)·생산에 관련된 기술 요소에 의해서 결정되는 부문이 더 크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고, 후속 연구로 기술혁신을 주제로 택했다.
이 시기에 국제경제연구원 동경사무소장으로 봉사하면서 뒷바라지 해주셨던 분이 조규하(趙圭河) 전 전경련 부회장이었다. 그의 폭넓은 일본 인맥이 충실한 연구 자료 수집과 관련 전문가 면담을 가능하게 했다. 연구 활동을 함에 있어서는 김상곤(金相坤) 전 교육부총리, 노응원(盧應源) 충남대 명예교수, 손병암(孫炳岩) 강원대 명예교수, 김형욱(金炯旭) 홍익대 명예교수 등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조 전 부회장은 미국에서, 그리고 다른 분들은 한국에서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서 감사드린다.
<사진: 1978년 연구원 체육대회에서 정재석 원장과 함께. 나는 축구에서 결승골을 넣어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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