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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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영혼의 경제학 여정(旅程) <15> 악몽(惡夢), 그리고 국제수지 조정정책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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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4월09일 17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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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죽여 버릴거야!”

“으악~~”

 

박사 종합시험( Comprehensive Examination)을 앞에 둔 어느 밤의 꿈속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고급 거시, 미시이론은 필수 시험과목이었다. 이 두 과목을 포함한 종합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박사 논문을 쓸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밀러 교수는 고약한 문제로 학생들을 골탕 먹이기로 악명이 높았다. 나도 그 공포감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 공포감이 꿈에 나타난 것이었다.

 

종합시험은 그동안 배운 경제이론을 어느 정도 정확히 이해하고 습득했는지를 평가하는 시험이다. 전체적으로 어느 정도 잘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특정 이론의 한 측면에 대해서는 부정확한 지식을 가지거나 잘 모를 수도 있다. 밀러 교수는 이런 구석을 찌르는 출제를 한다는 것이었다.

 

1975년 가을학기가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EWC의 Ph.D Grant는 4년이 지나면 종료되는 조건이었다. 나의 계획은 1975년 말까지 경제이론 공부 과정을 마치고, 76년 1년 동안에는 박사 논문을 쓰는 것이었다. 76년 말이 4년이 되는 시한이었다.

 

그런데 밀러 교수가 넘사벽(?)으로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경구(警句)를 되뇌면서 마음을 가다듬으려 노력했지만, 그에 대한 공포심은 시험 준비기간 내내 지속되었다.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낙방하면 어떻게 하지?”

밀러 교수의 잔인한(?) 미소가 나를 괴롭혔다.

종합시험에 합격하고 이제 논문 주제를 결정할 시간이 되었다. 순수 이론보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한국경제의 현실을 분석하는 주제를 선택하고 싶었다. Power 교수, Heller 교수님과 의견을 교환했다. 그분들과의 토론을 거쳐 유치산업론(幼稚産業論), 불균형 성장론(不均衡成長論), 국제수지 조정론(國際收支調整論) 등을 바탕으로 한국의 국제수지(國際收支) 조정(調整) 메카니즘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고 주제를 탐색(探索)하기로 했다.

 

EWC는 논문을 쓰려는 학생들에게 자료 수집 활동을 지원해주었다. 나는 한국에 가서 관련된 분들을 만나고 자료도 얻으려는 계획을 세워 EWC의 승인을 받았다. 여행비용과 자료 수집 활동비를 지원받았다.

 

 “강남에 땅을 사라!”

서울에 와서 친구들과 무교동 낙지 맛집부터 찾아갔다. 그 매운맛과 막걸리를 즐기면서 3년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증권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의 화제가 단연 흥미진진했다. 그들은 곧 강남에 고속 터미널이 들어서고 강남 개발이 본격화될 것이라 했다. (당시에 고속 터미날은 동대문에 있었다.) 이 친구들은 돈의 여유가 있으면 강남에 땅을 사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나에겐 그 당시로선 별로 재미없는 화제였으나 후에 보니 그들의 말이 옳았다.

 

그러나 이들 중 아무도 강남에 땅을 산 사람은 없었다. 이론에는 밝았지만 실행할 자금력이 없었고 빚을 내서 살만한 배짱도 없었다. 요즈음 가끔 만나면 그때 놓친 일확천금(一攫千金)의 기회를 술안주로 삼는다.

 

당시 고 남덕우 교수님께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재직하고 계셨다.

 

남 부총리님을 뵙고 문제의식을 말씀드렸다. 당시 한국은 1973년의 오일 쇼크로 국제수지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74, 75년 연속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며 단기 자본도입으로 국제수지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외환 지출을 억제하기 위해서 수입 담보금제도 도입, 해외여행 경비 지급 억제, 정부 외화 사용 규제 강화 등 미시적 행정 조치를 하면서, 거시적으로는 1974년 12월에 대미 환율을 큰 폭으로 인상했다.

 

74년의 대미 환율 인상은 오일 쇼크 후유증으로 나타난 국제수지 악화에 대응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6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시행해온 수출보조금과 선택적 수입 관세 차별화 정책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74년의 대미 환율 대폭 조정은, 그동안 저수준의 환율 유지로 원화가 구매력 대비 과대 평가되어온 왜곡을 시정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지만, 수출 진흥을 통한 국제수지 방어와 국내 경기 부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주요 원부자재, 중간재, 시설재의 해외의존도가 높았던 당시 상황에서 대미 환율의 대폭 인상( 원화의 평가 절하)은 국내 물가의 불안이라는 부작용을 수반했다. 

 

수출보조금과 수입 관세의 차별적 적용을 주축으로 수출 확대 전략을 추진했던 시기와는 다른 양상이 나타난 것이었다. 수출 산업에 대해선 균형환율 수준에 적합한 보조금을 얹어주고, 수출용 원부자재와 시설재 수입에 대해서는 관세를 감면해주어 수출 활동으로 자원이 집중되도록 유도해온 것이 60년대 이후 지속되어온 한국의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전략이었다. 그 결과 수출은 빠른 속도로 증대되었고 고용 사정이 호전되었다. 그러나 내수산업이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소재 부품 시설재의 수입의존도는 높아 경제의 불균형과 양극화가 심화되어왔다.

 

전략산업을 선택해서 이를 수출 주종 품목으로 육성하여 수출을 증대하여 경제성장을 추진하는 소형 개방국가에서 국제수지 조정정책으로 어떤 수단이 바람직할까? 환율, 재정 금융의 거시정책, 선택적 수출 보조와 관세부과 등을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남덕우 교수님은 '좋은 문제의식'이라고 코멘트 하시면서 “이론의 틀을 세우고 정책 대안들을 계량 모형을 시뮬레이션해서 비교 분석하면 의미 있는 논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취지의 조언을 하셨다. 

 

나는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 정책 경험자들을 면담한 후 하와이대 연구실로 돌아왔다. 그 이후 관련 문헌들을 읽고, 자료를 정리하고, 컴퓨터 센터를 들락거리고, Power, Heller, Snow 교수님 등의 교수실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논문을 준비하고 썼다.( 당시에는 인터넷을 통한 자료 수집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YOU SHUT UP!”

나의 논문 지도교수였던 Power 교수가 큰소리로 Snow 교수의 끈질긴 계량 모형 관련 질문을 끝내도록 했다. 휴!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는 논문 발표 후 밖으로 나와 대기했다. 잠시 후 Power 교수가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들어갔다.

 

“CONGRATULATION, Kwangdoo!”

Power 교수가 뜨겁게 나를 껴안아 주었다.

몇 가지 보완을 조건으로 한 “PASS”였다.

 

[The Balance of Payment Adjustment in Korea] 가 나의 박사 논문 주 제목(main title)이었다. 1976년 11월 중순이었다. 12월 중순에 보완 내용에 대한 승인을 받아 최종 논문을 제출했다. 이때 난 아직 29세였다. 나는 1977년 1월에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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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박사학위 수여식장에서. 왼쪽부터 필자, 지도 교수인 John Power 교수, 같은 날 학위를 받은 김달현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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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박사학위 수여를 축하하러 Texas에서 온 김인숙 경희대학교 명예교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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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눈을 감고 박사학위 수여식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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