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영혼의 경제학 여정(旅程) <11> HALE MANOA에서 생긴 일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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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경제학과 클라스 메이트의 기숙사 방에 들렀다.
담배 연기가 가득한 분위기에 3~4명이 담소를 하고 있었다.
“John, 너희들 애연가(愛煙家)들이구나!”
“Kwang doo, 우리 담배 피우는 거 아냐. 이거 마리후아나(Marijuana,대마초)야!”
“헐!”
기숙사 방에서 마리후아나를 피우다니.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은 가볍게 즐겼다.
남학생 기숙사는 싱글 룸, 더블 룸, 휴게실, 부엌, 공동 샤워실, 6인 공용 전화 코너, 게스트 라운지, 당구장, 탁구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요리할 수 있는 부엌은 한 개 층에 하나씩 제법 넓게 설치되어 있었는데, 여러 나라 학생들이 공동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가끔 요리 공간 확보전(?)이 있었다. 인도 학생들은 카레라이스 요리의 강한 냄새로 다른 나라 학생들이 부엌에서 자진 탈출하게 해서 부엌을 거의 독점하곤 했다.
한국 학생들도 묘안을 냈다. “카레”를 능가하는 요리가 우리에게 있었다. 농과대학 출신 학생들의 아이디어로 우리는 “청국장”을 끓이는 전략을 구사했다. “청국장 대 카레”의 냄새 경연이었다. 당연히 청국장의 승리였다. 인도 학생들이 조용히 부엌에서 나갔다.
이 부엌에서 약식 김장도 했다. 전남대 농대에서 오신 안장순 교수께서 김치 담기에 익숙했다. 우리들이 캠퍼스에 가까이 있는 “Star Market”에 가서 무·배추, 소금, 고춧가루 등을 구입해 오면, 안 교수님이 김치를 담갔다. 일본, 중국 학생들이 주로 얻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강의실에서 만난 파키스탄 학생이 “김치 맛이 최고다”라는 칭찬을 했다.
“어떻게 맛을 알지?”
“내 여자 친구가 줘서 먹어봤지.”
“한국 여학생?”
그랬다. 우리 요리팀이 어느 여학생의 요청으로 김치를 준 적이 있었다. 그 여학생이 파키스탄 학생과 사귀고 있는지 몰랐었다. 이런!
휴게실은 음향기기와 편안한 소파들로 꾸며져 있었다.
유교적 윤리의식을 가진 한국 학생들은 이곳을 유교 윤리(?) 강의실로 활용하기도 했다.
70년대 초, EWC Grantee들은 정부 규정에 따라 배우자·약혼자를 한국에 남겨놓고 홀로 하와이에 왔다.. 그런데 가끔 유교적 가치관에 위배 되는 남녀 교제가 눈에 띄었다. 기혼자들은 그런 경우가 없었지만, 약혼자들의 경우 각자의 약혼자가 한국에 있음에도 남녀 간 애정의 꽃을 피우는 모습이 고루한(?) 동료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선배, 동료 Grantee 들이 기숙사 휴게실로 이들을 불러 훈계(訓戒)했다. 요즈음에는 있을 수 없는 인권 유린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윤리관으로는 가능했다.
“파혼하고 사귀던가, 아니면 헤어져라!”
HALE MANOA에서 생활하는 Grantee들은 대부분 자기 차를 보유했다. 그러나 얇은 호주머니 사정으로 낡고 오래된 차들을 끌고 다녔다. 주로 150~ 500달러 정도에 구입한 중고차들이었다. 150달러 차는 운전석 유리창이 잘 닫히지 않을 정도로 낡았다. 이 차를 몰고 다니던 친구는 “누가 한번 가볍게 받아 줬으면!” 하는 희망(?)을 토로하곤 했다. 충돌사고 보험금으로 휠씬 좋은 차를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낡은 차를 사용하다 보니 고장이 잦았다. 수리센터에 가면 비용 부담이 너무 컸다. Grantee들 중 기계 다루는 솜씨가 좋은 사람은 차 고치러 여기 저기 불려 다녀야 했다. 정찬길 명예교수( 건대 축산대학)가 이런 봉사활동을 많이 했다. 항상 즐거운 얼굴로 도와주셨다. 나는 잦은 고장이 두려워 무리해서 거금 700달러짜리 차를 구입했다.
<사진: 거금 700달러를 투자해 구입한 내 차>
기숙사에 들어오지 않고 대신 Housing Allowance를 받는 Single Grantee들도 있었다. 중국 학생 중 이런 경우를 보았다. 이 학생은 자동차를 구입해 숙소로 활용했다. 샤워, 식사 등은 기숙사 시설을 활용했다. 그리고 열심히 저축했다. 놀라웠다.
남학생 기숙사인 Hale Manoa와 여학생 기숙사인 Hale Kuhine 간의 거리는 50미터 정도였다. 달이 밤하늘을 가득 채운 밤에 H.M.의 한 남학생이 H.K.의 정원에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아름다운 정경(情景)도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두 건물 사이에 울려 퍼져 모두 창밖을 내다보게 했다. 그는 한국 남학생이었고, 그의 간절함이 향했던 창문엔 한국 여학생이 있었다. 이 남학생은 대학 시절에 클럽활동으로 성악을 했었다. 그는 은퇴 후, 2015년경 성악 앨범을 내기도 했다. 이 둘의 사랑은 열매를 맺어 부부가 되었다.
Hale Manoa 1층에 있는 탁구장과 당구장에선 가끔 ”내기 시합“이 있었다. 당구를 좋아하는 그룹과 탁구를 좋아하는 그룹으로 나뉘었다. 나는 고교 시절 학교의 탁구팀 선수였다. 우리는 생맥주와 피자를 걸고 땀을 흘렸다. 게임이 끝나면, 차로 1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와이키키에 가서 수영으로 땀을 씻고 ”Pizza Hut“으로 갔다. 이기고 ”공짜“로 먹는 그 맛은 짜릿했다.
EWC 캠퍼스에 있는 KENNEDY THEATER는 Hale Manoa에 사는 우리들의 문화 공간이었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그곳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 여러 나라들의 문화를 담은 다양한 공연과 전시들이 펼쳐졌다. 박영서 선배( 연극 영화 전공, 현재 뉴욕 거주)와 정자완 여사(문화인류학 전공)의 자상한 해설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문화의 다양성과 그 표현 기법들에 다가서는 기회를 즐길 수 있었다.
이 극장 입구 가까이 동전을 사용하는 국제전화가 가능한 공중전화기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H.M.거주 Grantee들은 주로 이 전화기로 한국에 국제전화를 했다. 25센트짜리 동전을 손에 가득 쥐고 전화기에 코인을 계속 집어넣으며 가족 친지들과 소식을 주고받았다. 동전이 떨어져 전화가 끊기면 다음 날에 또 하곤 했다. 기숙사 전화로도 국제전화가 가능했으나 요금이 더 비쌌기 때문에 우리는 이 동전 전화기를 더 선호했다. 국제전화용 동전 교환 수요가 많아서 기숙사 프론트에는 항상 25센트 동전이 가득 준비되어 있었다.
가끔 미국인 가정에서 초대하는 식사 모임이 있었다. Host Family 제도에 의한 것이었다. EWC Grantee들의 미국 가정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기 위해서, 한 학생과 한 가정을 연결해서 서로 교류하도록 디자인되어 있었다. 나의 Host Family는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백인이었다. 주로 Beef Steak를 먹으며 서로 관심 사항을 나누었다. 나는 미국 가정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한국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이분들을 통해서 알았다. 고교 졸업 후에는 부모는 자식의 독립성을 존중해주고, 자식은 부모에게 일체의 금전적 의존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HALE MANOA에서의 생활이 안정되면서 초기 유학 생활도 자리 잡아갔다. 이 과정에서 많은 따뜻한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분들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이 내 가슴에 남아있다.
<사진: Hale Manoa에서 함께 지낸 Grantee들. 좌측부터 故 유경환 시인(당시 조선일보 문화부, 후에 조선일보 논설위원), 필자, 안문석 교수(당시 KIST, 후에 고려대학교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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