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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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영혼의 경제학 여정(旅程) <8> 수출 최전선에 가까이 가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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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3월05일 17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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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입국(輸出立國)!

박정희 정부는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전략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66년)부터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가 시동을 걸었다.

 

1960년의 한국 수출액은 3,200만 달러 수준이었는데, 수입액은 3억 2,000만 달러였다. 1961년의 수출의 산품별 구성을 보면 농·수·광산품이 72.3%, 공산품이 27.7%를 차지했다. 전형적인 후진국의 수출 구조였다.

 

이런 미약한 수출액과 후진적 수출 구조가 정부의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으로 빠르게 변화했다. 1964년에, 수출 금액 1억 2,100만 달러를 달성하고, 공산품 비중이 62%로 상승했다. 1976년엔 수출 금액이 77억 달러를 상회하고 ,공산품 비중이 87.8%로 상승했다. <표1 참조> 

“한강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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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활동의 최전선에선 수출업자와 수출품 제조업자들이 뛰고, 후방에선 정부가 병참을 담당했다. 한국은 “한국 주식회사(회장: 박정희)” 형태로 유기적 일체가 되어 움직였다. 

 

1965년 2월 청와대에서 첫 회의가 열린 “수출진흥을 위한 정부 민간 확대 회의(수출진흥 확대 회의)”는 말 그대로 “한국 주식회사”의 첫 이사회 였다. 박정희 대통령을 중심으로 주요 수출 기업들의 경영자들과 내각의 수출 유관 부서의 장관들이 마주 앉아 회의하는 구조였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수출업자들의 애로 사항을 물었고, 제기된 애로 사항에 대한 토론을 거쳐 그 자리에서 해결책을 해당 부처의 장관들에게 지시했다.

수출 증대를 최우선으로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는 구조였다.

 

그렇다고 해서 수출업자들의 애로 사항이 즉석에서 각 기업의 독자적 판단에 의해서만 제기된 것은 아니었다. 사전에 업계의 의견을 수렴하는 창구가 있었다. 즉 수출 최전선과 병참사령부를 연결해주는 통신 라인이 구축되어 있었던 셈이다.

 

이 역할을 했던 조직이 한국무역협회였다.

한국무역협회는 1946년 7월에 창립된 단체로 민간 무역업자들의 모임이다.

이 단체가 수출 증대를 위한 업계와 정부의 소통 창구로서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맡게 된 것은 1차 “수출진흥 확대 회의”가 열린 시점 전후라고 본다.

 

한국무역협회의 초대 회장은 김도연 박사(미 아메리칸대학, 경제학. 대한민국 초대 재무장관)이었으나, 실질적 산파 역할을 한 사람은 초대 상무(실무 총괄)를 지내고, 3~4대(1949.4~1953.4)와 8대~14대(1960.5~1973.4)에 걸쳐 18년 동안 무협의 회장으로 봉사한 이 활(李活, 1907~1986) 씨였다. 특히 그와 박정희 대통령과의 신뢰 관계는 “무역 입국”의 신념을 바탕으로 형성되어 매우 탄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나는 70년 9월, 서강대 도서관에서 유학 준비를 시작했다. 대학 캠퍼스의 맑은 분위기를 즐기며 관심 대학들, 장학금 제도, TOEFL 시험, 출국 전 병역 의무 관련 사항 등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었다.

 

“너 준비 잘되고 있어?”

“이제 시작했습니다.”

“너 출국하기 전에 경제 연구기관에서 연구 경험을 쌓으면 어때?”

“좋은 곳이 있습니까?”

 

당시에 KDI가 갓 설립됐고, 은사이신 고 김만제 교수님이 초대 원장으로 부임하여 연구를 지휘하고 계셨다. 나는 선배가 그곳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는 줄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곳에 가면 나처럼 학사 학위를 가진 사람은 해외에서 온 박사들의 연구 조수 일을 해야 했다. 난 그런 일이 싫었다.

 

“한국무역협회에서 조사역(調査役) 채용 공고가 나왔던데, 응시해 보지.”

“석사 학위가 자격 조건에 들어 있던데요?”

“그래도 시험을 볼 수는 있지 않을까?”

 

조사역은 영어로 Economist로 번역되던 시절이었다. 독립적 연구를 할 수 있는 직위였다. 당연히 학사 학위자는 자격이 없었다. 그래도 “알아나 보자”하는 마음으로 “합격에 상관없이 응시할 수 있느냐?”고 문의했다. “응시는 할 수 있으나 합격은 어려울 것이다”는 답이 왔다.

 

“무역 분야에서 독자적 연구를 하면서 유학 준비를 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설렘을 안고 응시했으나 자격 조건 미흡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 합격 통지가 왔다.

“이거 뭐가 잘못됐나?.”

믿기 힘든 일이었다. 두 사람을 뽑았는데 그중 하나라는 것이었다.

 

1970년 10월 1일부터 한국무역협회 조사부로 출근했다. 당시 무역협회는 미도파 백화점(현 롯데백화점 영플라자)의 상위 2개 층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사부는 조사과와 출판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조사과에 자리가 주어졌다. 조사과에 4명의 조사역이 있었는데 나는 그들 중 막내였다.

함께 일하시는 분들은 대선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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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활 전 한국무역협회 회장>

 

 “김 조사역! 당신 이 활 회장님께 깊이 감사드려야 해. 석사 학위가 없어 자격 조건 논란이 있었는데, 이 회장이 결단을 내린 거야.”

자격이 없어 불합격으로 처리하려 했는데, 이 활 회장이 시험 성적을 보고 합격자로 받아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마음속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새겼다.​

 

신입 조사역이 할 일은 당시 무역협회가 발행하고 있었던 월간 '무역(貿易)'지(誌)에 논단을 쓰는 것이었다. 그 시점에 발생한 주요 무역 이슈를 선택하여 자료를 정리하고, 그 성격과 배경, 그리고 전망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글이었다.​

 

 

자료 수집부터 글 쓰는 요령까지 많은 것들을 선배 조사역들로부터 배웠다. 장화수, 최단옥, 최동호 조사역, 세 분이 지도해준 덕으로 첫 글을 하나 끝내고 나니 뭐 대단한 일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당시 조사부장은 전영순(?) 씨, 조사과장은 이광수 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든 분들이 풋내기인 나에게 따뜻한 배려와 격려를 보내주셔서 초기 적응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무협 조사부에서 조사역으로 일하게 된 것은 나에겐 행운이었다. 우선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의 일상이 가능했다. 퇴근 후, 서강대 도서관에 가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유학 준비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어서 좋았다.

 

사무실이 연구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무역 관련 자료와 책을 다양하게 읽을 수 있었고, 간섭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자율 학습”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사무실에는 이대 도서관학과 출신 사서(司書; Librarian)가 한 분 있었다. 그분에게 관심 주제와 내가 품고 있는 문제의식을 적어 부탁하면, 관련 자료와 책의 리스트를 만들어 보내줬다.

 

주제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다른 조사역들과 토론을 하기 때문에 그 시점에 한국의 무역을 둘러싸고 어떤 일 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안목을 기르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또한 관련 업계, 유관 부서 담당자들에게 문의하여 정보를 얻고 의견을 교환하는 절차를 밟기 때문에 현장의 동향을 인지할 수도 있었다. 당시 정부 관리들과 업계 관계자들은 시간 외 수당도 없이 밤새워 일했다. 그 사명감에서 비롯된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물질적 풍요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무실의 위치가 명동에 마주 닿아 있어서 퇴근 후 명동거리를 즐길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쎄씨봉은 구경하지 못했지만, 오비 뚜르, 오비 캐빈에 가서 기타 치며 팝송을 부르는 가수들을 따라 함께 흥얼거렸던 추억은 아름답게 남아있다. 월급 받는 날(당시엔 봉투에 현금과 수표를 넣어 본인에게 직접 수교)에는 명동 입구의 유네스코 스카이라운지(당시 최고급 양식당)에 가서 동료들과 함께 칼과 포크를 들고 스테이크를 썰며 수다를 떨었던 일들도 “유치한 호사”로 내 마음의 앨범에 간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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