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국 교수의 생활과 경제 이야기 <71> ‘오펜하이머’영화와 일본의 피해자 코스플레이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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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오펜하이머’라는 영화를 봤다. 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킨 원자폭탄을 개발한 미국의 천재 물리학자 오펜하이머를 극화한 영화다. 3시간이라는 긴 상영시간을 30분이라는 짧은 느낌으로 만들어 버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놀라운 능력을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만든 영화였다. 사실 나는 무기와 전쟁 그리고 과거 전쟁의 승패요인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영화의 주 내용은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영화를 처음에는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3시간이라는 긴 상영시간과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이름 때문에 보기로 마음을 바꿔 본 영화였다. 결론은 『잘 봤다.』라는 느낌이다.
나의 이 글은 영화평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엄청난 공헌을 하고도 억울한 누명을 쓴 오펜하이머가 안타까웠고, 2차 세계대전을 끝내게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영웅을 바보로 만드는 한사람의 질투심, 그리고 일본의 엉뚱한 “자기들이 원폭 피해자”라는 코스플레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1. 왜 독일은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일으켰을까?
2차 세계대전은 이름 안에 ‘세계’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처럼, 전 세계가 두 편으로 나뉘어 함께 싸운 인류역사 이래 가장 많은 전비와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전쟁이었다. 전비와 전사자의 수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대충 약 5천5백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보통 전쟁에서 사망자와 다친 사람의 비율은 4배에서 5배라고 한다. 그러면 적게 잡아 4배라고 하면 약 2.7억 명 정도의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는 계산이다. 인류역사 상 최대의 참극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질병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은 20세기 초 스페인 독감으로 약 2천만~5천만 명이 죽었고, 흑사병으로는 약 3천만 명(추청치는 7천5백만 명에서 2억여 명 등 다양함)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제2차 세계대전은 전쟁으로서는 가장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질병까지 포함해도 1위 또는 2위 정도의 사람이 희생된 엄청난 전쟁이었다. 정말 인류 최악의 전쟁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면 잠깐 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해 보자.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라는 전쟁광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고 ‘만’ 말한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쟁원인의 한 단면만을 보는 매우 좁은 시각이다. 히틀러가 아무리 전쟁광일지라도 그런 큰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국민들을 설득하고 막대한 전쟁비용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를 설득하기 위한 그럴싸한 이유, 곧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
아주 간략하게 1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을 설명하겠다. 제1차 세계대전 시작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의 암살이었다. 그러나 모든 전쟁은 그런 단순한 사건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인류 역사에서 모든 큰 전쟁은 반드시 그 뒤에 엄청난 경제적 요인이 있다. 즉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평범한 진리는 전쟁 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18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19세기에 꽃을 피운 『산업혁명』은 영국을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다. 그리고 영국과 함께 재빠르게 산업혁명을 일으킨 불란서 그리고 장사하는 것으로 잔뼈가 굵은 베네룩스 삼국 등은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개척함으로써 매우 큰 부(富)를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그러하지 못했다. 당시 독일연방은 34개의 제후국과 도시들의 합의체였다. 즉 통일된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느슨한 형태의 연방 국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세력도 없었고, 연방 안의 제후국 간의 내전 등으로 강대국으로서의 힘을 갖출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러나 빌헬름 1세와 철혈재상인 비스마르크는 독일 제국을 통일하였고, 비로소 강대국의 대열에 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좋은 땅덩어리들은 이미 영국, 불란서 등의 차지였다. 그러므로 갓 통일한 독일 입장에서는 전쟁을 통해 그들의 식민지를 빼앗아야 했다. 곧 어떤 이유에서든지 전쟁은 터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때 마침 민족주의자 간의 갈등으로 황태자가 암살 된 것이다. 얼마나 전쟁을 일으키기에 좋은 명분인가?
역사상 모든 전쟁의 기본은 『경제적 이익』이다. 다만 그 전쟁 발발의 시기는 당시 통치자의 성격에 따라 조금 일찍 또는 조금 늦게 시작할 뿐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전쟁은 푸틴의 성급한 성격 때문에 충분히 무르익기 전에 일찍 일으킨 전쟁이고, 시진핑의 대만침공 야욕은 경제적으로는 너무나, 너무나 일으키고 싶지만 능력이 부족하여 일으키지 못하는 전쟁일 뿐이다. 그래서 시진핑은 마치 내일이라도 전쟁을 일으킬 것처럼 으르렁 거리지만, 사실은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2. 독일의 10억 배가 넘는 초초 하이퍼인플레이션
세계2차 대전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발생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영불 등 소위 전승국들은 『베르사이유 협약』을 맺었다. 패전 독일에 전후 책임을 묻는 협약이었다. 경제학에서는 물가상승률이 년 3%를 넘으면 인플레를 우려하고, 년 200%가 넘으면 ‘초인플레이션’이라고 한다. 그러나 독일은 1924년 연간(年間)이 아니라, 월간(月間) 물가상승률이 300%를 넘었다. 당시 2년여 기간 동안 독일 물가는 무려 ‘10억배’ 상승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1923년 11월 1일 빵 1파운드의 가격은 30억 마르크였고, 소고기 1파운드 가격은 360억 마르크였다. 물가는 년 1,000배(100,000%) 이상 뛰는 일이 일상사였다.
그 이유는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연합군이 독일에게 요구한 것이 너무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① 독일이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를 시행하라고 하였고, ② 육군과 해군력 특히 함정 등에 제한을 두었으며 ③ 전쟁 배상비용으로 무려 1,320억 마르크의 금(金) 가치로 지불하라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일부 군사전문가 중에는 우리나라도 인구가 줄어드니 모병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 정말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모병제를 할 때 필요한 비용과 신(新) 군사무기의 개발과 구입비용 등에 대한 비용 등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을 하고 그런 주장을 하는지『정말』궁금하다.)
이 배상금액을 계산할 때 그 유명한 경제학자 ‘케인즈’도 참여하였다고 한다. 그는 연합군 측 대표들에게 “이 금액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불 가능액수인 20억 달러(약 100억 마르크)의 13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이런 전쟁 배상비용은 독일이 도저히 갚을 수 없다. 이런 무리한 요구를 계속하면 20년 후쯤 제2의 전쟁을 가져올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확히 20년 그리고 며칠 후에 제2차 세계대전은 일어났다. 케인즈는 ‘사람들의 불확실한 행동은 짐작할 수 없어 주식투자에는 망했지만, 합리적인 생각을 한 전쟁의 예언은 너무나 정확하게 적중’시켰다.
이런 무리한 전쟁배상 비용은 결국 독일 경제를 망가뜨리고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당시 너무 물가가 빨리 올라 상점의 가격표는 시간 단위로 바뀌었다고 한다. 당시 신문 삽화를 보면 집에서 음식 마련을 위해 장작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지폐를 태우는 그림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발행된 최고금액 화폐는 1조 마르크였다고 한다. 게다가 독일은 패전으로 금싸라기 땅 알자스와 로렌지방을 불란서에게 다시 빼앗겼고, 폴란드와 오스트리아도 빼앗겼다(사실 상 독립이지만 독일 입장에서는 강제로 빼앗긴 것임). 독일 국민들의 영국과 불란서에 대한 『증오심』은 극도에 달했었다.
이틈을 타고 세력을 잡은 사람이 바로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게르만의 영광을 되찾자.”고 부르짖었으며, 독일의 경제를 안정시켰고(인플레이션을 년 300%로 안정화), 모든 독일 농민들에게 자동차를 갖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래서 탄생한 자동차가 바로 ‘딱정벌레, 폭스바겐(Volks Wagen)’이다 폴크스바겐(독일 발음)을 직역하면 『국민차』라는 뜻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폭스바겐의 최고속도는 80km로 아주 느린 차인데, 그 차의 디자이너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차를 설계한 ‘포르쉐’다. 천재는 무엇이든지 잘 하는가 보다.
이런 성과를 이룬 히틀러를 독일 국민들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정계에 입문하지 불과 13년 만에 ‘종신 총통’과 “Heil Hitler!, 히틀러 만세!”라는 군중들의 환호성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근현대의 지도자 중에서 이런 ‘민족주의적 자존심’을 과장하여 부추김으로써 최고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 몇 명 더 있다. 바로 스탈린과 시진핑 그리고 푸틴이다. 모두가 독재자라는 공통적 특징이 있다. 미국에서도 트럼프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든다. 아니기를 바랄뿐이다.
원자력 얘기로 다시 돌아오자.
3. 독일 입장에서 원자폭탄 개발이 절실했던 이유
2차 세계대전은 명목상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동맹국과 연합군과의 싸움이었지만, 실상은 독일과 연합군과의 싸움이었다. 독일의 한정된 인적, 물적 자원으로 미국이 참전한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독일이 이긴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같은 의미에서 러시아의 푸틴도 연합군과의 싸움인 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그러면 약세인 독일 입장에서는 무엇을 해야겠는가? ‘전세 전환을 위한 확실한 그 무엇인가.’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원자폭탄이었다.
그래서 독일의 무기 개발부서에서는 원자폭탄의 개발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싶었다. 그리고 상당한 연구 성과도 이루었다. 그러나 연합군 측에게는 매우 다행스럽게 ‘히틀러’는 원자폭탄 개발에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히틀러가 무기개발 분야에서 실수를 한 다른 예는 바로 ‘레이더’와 ‘제트전투기’의 개발이었다. 만약 영국이 아닌 독일에서 레이더가 먼저 개발되어 연합군 폭격기의 독일공습을 막을 수 있었고, 원자폭탄이 미국이 아닌 독일에서 먼저 개발되었으며, 제트기가 전쟁 말이 아닌 조금 일찍 독일에 의해 개발되었다면, 지금의 세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과는 매우 다른 세계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이런저런 이유로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계획을 연합군 측이 알게 되었다. 그 다음 내용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펜하이머’와 매우 비슷하다. 역시 이 원자폭탄 개발계획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아인슈타인이다. 원자폭탄도 아인슈타인의 그 유명한 공식 E=MC²에서 탄생한 아이디어다. 즉 결손된 질량에 빛의 속도를 제곱하여 곱하면 거기서 나오는 에너지가 계산된다. 결국 결손된 우라늄 량은 적을지라도 빛의 속도를 제곱한 것을 곱한 에너지의 량은 너무나, 너무나 막대하였다. 그래서 원자폭탄의 폭발력은 TNT Kg 단위로 계산하지 않고, 몇 킬로톤 또는 몇 메가톤으로 계산한다. 우리가 큰 바위를 폭파시킬 때 보통 몇 ‘Kg’의 TNT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킬로그램의 천배인 킬로톤 또는 그것의 백만배인 메가톤하면 그 폭발력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오직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뿐이다.
참고삼아 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 보이는 위력이 15Kt이었고, 나가사키에 떨어진 팻맨은 21Kt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인간이 개발한 최대의 수소폭탄과 비교하면 어린아이 수준이다. 1961년 소련이 개발한 최대 수소폭탄(짜르 봄바, 황제의 폭탄)은 무려 50메가톤이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약 3,800배 규모다. 폭발 후의 버섯구름은 높이 67km로 대류권을 넘어 성층권에 이르렀으며, 100km 바깥에서도 가장 심한 3도 화상을 입힐 수 있었고, 900km 떨어진 핀란드의 건물 유리창의 일부가 깨졌다고 한다. 충격파에 의한 지진 규모는 리히터 규모 5.25였다고 한다. 더 기가 막힌 것은 50메가톤의 폭발력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소모된 화약 전체의 10배에 달하는 에너지였다. 그저 입이 ‘따아~~~악’ 벌어질 뿐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크게 강조되지는 않았지만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계획은 사실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일반인들은 알지 못할 정도로 ‘살짝’ 비치면서 지나가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전후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독일은 분명히 원자폭탄 개발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독일이 이 원자폭탄 설계도와 약간의 우라늄을 일본에게도 U보트를 통해서 전달을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다만 독일과 유럽의 거리가 너무 멀어, 일본에게 실제 전달되지는 못하고, 미국 함정에 의해 나포되었었다.
4. 일본의 코스플레이
일본의 후안무치(厚顔無恥)는 이미 더 이상 신기로울 것도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자기들이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것처럼 꾸미는 것과 특히 최근에 UN의 상임이사국 지위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정말 참기 힘든 정도다. UN이라는 기구가 왜 탄생했는가? 그리고 UN 상임이사국이 어느 나라들로 구성되어있는가? 최근 중국과 러시아의 엉뚱한 짓거리로 상임이사국 제도 자체가 의심스런 때 이기는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원흉국이 상임이사국 자리를 희망한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일본에 대한 친일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특히 “일본은 우리에게 이미 수십 번 사과를 하였으니, 더 이상 미래 발전을 위해 과거를 따지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말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좋다. 일본이 사과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들이 정말로 사과했는가? 그들은 단 한 번도 진정한 사과를 한 적이 없다. ① 그들이 최대로 표현한 것이 『유감스럽다.』는 것이었다. 수십만명을 죽이고, 수천만 우리민족을 그렇게 고생시킨 것이 그저 ‘유감스러울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②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를 포함한 14명의 A급 일본 전범들이 신(戰爭의 神)으로 모셔져 있다. 더욱이 ③ 매년 때가 되면 일본의 전(全) 관료들이 그들을 신으로써 참배하며, 수상은 공물(貢物)을 보내고 있다. 또한 최근 ④ 정신대는 한국여성들의 ‘자원(自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일본 정부나 기업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⑤ 아직도 그들은 일장기 대신 욱일승천기를 사용하고 싶어 하며, ⑥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고, 그들 때문에 조선은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언제 우리가 그들에게 근대화를 시켜달라고 요구하였든가? 그리고 그들이 놓은 철도가 우리를 위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보다 빠르게 조선의 식산(殖産)을 탈취하기 위해 만들었는가? 암태도와 같은 수많은 소작쟁의 그리고 먹을 것이 없어 조선의 백성은 굶어 죽어도 그들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공출을 계속하였었다. 어느 동료 교수 선배의 말을 빌리면, 일제를 칭송하는 사람은 “자기 어머니를 겁탈하는데 잠자리가 불편하여 침대를 겁탈자가 사놓았는데, 그 자식들이 우리 집에 침대가 새로 생겼다.”고 좋아하는 꼴이라는 표현을 들은 기억이 난다.
반복하여 말하지만 나는 일본을 턱없이 미워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억지로 악화시켜야 한다는 사람은 절대 아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그들이 우리나라 ‘경제개발 5개년계획’ 동안 많은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①역사를 잊어서는 안 되고, ②원인과 결과를 분명히 인식하고 따라서 그들과의 ③정당한 관계 정립을 위한 ④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⑤지일(知日)하자는 것이지, 척일(斥日)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음 이야기를 읽으면 일본이 사람의 생명을 얼마나 경시하며, 타국 국민들의 생명뿐만 아니라 자국 국민들의 생명도 얼마나 경시 여기는지 그저 마음이 『처연』할 뿐이다. 소름이 끼친다.
5. 일본 코스플레이의 절정
(1) 일본이 원자폭탄 때문에 항복하였을까?
천만에 말씀이다. 명백한 그들의 국무기록에서 나온 것을 NGC에서 방송한 것이니 확실한 정보다.
일본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 즉 80,000명이 순식간에 사라진 다음 날, 고위 군 관계자들의 전쟁 전략회의를 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회의에서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는 논제에 『포함되지도 않았었다.』 3일 후 8월 9일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는 의제로 올라왔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바와 같이 항복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사항전”을 결정하였다. 일본이 결정적으로 항복을 고려한 것은 ‘소련의 일본에 대한 선전 포고’였다. 즉 미국과의 전쟁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북쪽(소련)과 남쪽(미국)에서 두 개의 전선을 갖는다는 것은 결사항전의 의지로도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8일 오후 11시,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일본 대사 사토 나오타케에게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며, 8월 9일부터 소련 정부는 일본과 전쟁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발표된 자료다.
결국 일본은 두 개의 전선을 꾸릴 수 없었기 때문에 항복을 한 것이다. 그것도 처음에는 여러 조건이 붙은 항복이었지만, 미국과 소련이 완강하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기 때문에, 며칠 후 무조건 항복을 결정하고 미주리호 선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였다.
(2) 2차 세계대전 이후 생긴‘자살바위’와‘만세 바위’
사이판 섬과 티니언 섬 등은 2차 세계대전 중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일본군과 미군 간의 많은 싸움이 있었던 곳이다. 특히 사이판은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 비행장 기지로서 중요한 위치였다. 그래서 미국은 6만7천여명의 상륙부대를 보내 사이판 점령을 시도하였다.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군 사령관은 1944년 7월 7일 지금의 ‘자살절벽’(뛰어내리면서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면서 떨어졌기 때문에 ‘만세절벽’이라고도 함)에서 군인, 아녀자, 어린아이까지 자살하도록 명령하였다. 당시 작성된 미국 ‘군사보고서’ 기록에는 “일본군들은 그들 앞에 있는 아이들을 절벽으로 던지거나, 아이들을 껴안은 부모들도 들쑥날쑥한 바위가 있는 절벽 아래로 뛰어 내렸다. 그리고 그 주변을 지나던 미군 순찰함 사령관은 물 위에 떠 있는 수많은 시신 때문에 아주 천천히 항해를 해야 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3) 중국에서의‘100인 참수경쟁’
중국에서 일본군의 만행은 정말 극에 달했었다. 1937년 남경대학살 당시 일본 육군 장교 두명은 포로와 민간인을 누가 더 많이 칼로 목을 쳐 살해하는지를 시합한 사건이다. 그리고 더욱 기가 막한 것은 그런 사람 목베기 경쟁을 일본 신문에서 ‘그들이 오늘 몇 명, 오늘 몇 명 식으로 참수한 사람의 숫자를 연재’하였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100명을 살해하고도 살인을 멈추지 않고, 이후에도 ‘150인 베기’, ‘300인 베기’ 등을 지속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우리에게 사과를 했다고 말하는 현 수상 ‘고노 다로’는 방위성 장관(우리나라 국방장관에 해당) 시절, 그의 사무실 왼편에 우리나라 지도를 걸어 놓았었다. 항상 혐한 발언을 일삼는 그가 자기 나라에 문화를 전달해준 고마운 국가라고 생각해서 한반도 지도를 걸어 놓았을까? 아니면 다시 ‘회복해야 할 땅’이라고 생각하고 한반도 지도를 걸어 놓았을까?
(4) 우리나라의 빨리 잊고자하는 사람들
여시서 하나의 가정을 해보자.
만약 현 독일 정부가 히틀러를 독일에서 가장 큰 성당에 ‘전쟁의 신’으로 모시고, 매년 전(全) 독일 각료들이 히틀러 사진 앞에서 경배를 드리고, 독일의 총리는 히틀러와 괴링 그리고 게슈타포의 히믈러에게 애도 화환을 바치면서, “우리 독일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을 침략한 적이 없다. 다만 유럽을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가 들어갔을 뿐이다.”라고 말한다면 유럽의 국가들은 뭐라고 할까?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불란서와 영국의 국민들이 “우리는 빨리 독일의 횡포를 잊고, 발전적인 미래 관계를 가져야 한다.”라고 말을 할까? 한번 우리 국민 모두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강조하고 또 강조하지만 나는 지일(知日)하자는 것이지, 척일(斥日)하자는 것이 아니다. ①이런 과거 사실들을 정확히 인식하고, ② 일본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히 알고, ③그들과의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뿐이다.
(5) 일본의 원폭 피해 코스플레이
더욱 일본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일본의 주변 국가에 대한 행동이다. 독일과 일본의 전쟁 피해국에 대한 태도는 너무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무명용사의 비(碑)에, 비가 오는 우중에도 우산을 쓰지 않고 참배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그들은 아시아를 침략한 적은 없고, 다만 아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하였을 뿐’이라고 말한 사실은 이미 지적하였다. 두 나라 사이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이 글은 ‘오펜하이머’ 영화에 대한 글임으로 원자폭탄 피해에 대해 얘기해 보겠다. 히로시마에는 원폭에 의해 무너진 철골공회당이 있는 지역에 ‘평화의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원폭피해자들의 희생을 기념하는 공원이고, 많은 설명서도 있다.
유럽인들 중 일부는 독일인들에게 “히틀러가 그런 만행을 다른 국가 유럽인들과 유태인들에게 저질렀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였습니까?”라고 나무라는 말투로 묻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질문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히믈러의 게쉬타포가 그렇게 설쳐대는 와중에 일반 독일인들에게 저항을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요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 국민들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은 더더욱이나 불가하다. 왜냐하면 일본은 ‘강자가 지배하는 사회이고, 그런 강자에게 저항하는 것은 곧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용서는 일반 국민들에 한해서다. 일본정부의 피해자 코스플레이는 정말 그 정도를 넘쳐도, 넘쳐도 지나친 행위의 연속이다. 즉 그들은 ① 그들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절대 말하지 않고(오히려 해방) ② 원자폭탄이 두 번이나 떨어졌음에도 소련 참전 전까지 오히려 ‘결사항쟁’을 부르짖었다는 것도 말하지 않으며, ③ (이 글에서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하늘의 신으로 모시는 일왕의 ‘종전 선언 녹음본’을 방송 전(前)에 파괴하려는 군부 내 쿠데타가 있었다는 사실도 숨기고 있고, 오직 ④ 자기들이 세계 유일의 원폭피해자로써 동정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⑤ 미국이 원자폭탄을 터뜨린 것은 지나친 행위였다고만 말하는 것이다.
오펜하이머 영화에서도 이 부분은 은근히 강조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의 원폭투하 반성은 미국인들의 휴머니즘에 의한 것이지 일본인들의 코스플레이는 아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끊임없이 이런 코스플레이를 계속하고 있으며, 많은 미국 연구기관들에게 연구비용을 제공하면서 피해자 주장을 확산시키고 있다.
한마디 말을 추가하며 이 글을 마치겠다. 히로시마 위령비에는 희생자 추모 내용에 과거에는 일본인 몇 명, 한국인 몇 명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현재 위령비에는 일본인 희생자들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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