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 신화의 진실 <2> 로버트 케네디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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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암살됐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로버트 케네디는 정신을 차리고 존 맥콘 CIA 국장을 집으로 오라고 했다. 로버트는 맥콘 국장에게 “이게 당신 조직에서 저지른 일이 아니냐?”고 물었다. 맥콘 국장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앨런 덜레스 국장을 피그스 만 침공 실패의 책임을 물어서 경질하고 케네디 대통령이 후임으로 임명한 존 맥콘(John A. McCone 1902~1991)은 기업인 출신으로 케네디 가문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CIA를 장악하지 못했다. CIA는 OSS 시절부터 일해 온 CIA 창업공신인 리차드 헬름스 부국장과 제임스 앵글턴 방첩단장이 실질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들이 형을 죽였다”면서 “그들이 죽일 사람은 형이 아니고 나였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케네디 암살 후 두 달 동안 로버트 케네디는 법무장관으로서의 일을 니콜라스 카첸바흐(Nicholas Katzenbach 1922~2012) 차관에게 위임했다. 1964년 1월에 법무장관 업무에 복귀했으나 그는 더 이상 조직범죄에 대해선 언급을 하지 않았다. 법무장관으로서 더 이상 역할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그해 여름 장관직을 사임하고 뉴욕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현직인 공화당 의원 케네스 키팅을 상대로 승리해서 상원의원이 됐다.
로버트 케네디는 케네디 암살이 오스월드의 단독범행이라는 워렌 보고서의 결과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상원의원으로서 로버트 케네디는 흑인들의 민권과 빈곤에 큰 관심을 가졌고 뉴욕시의 흑인거주 지역은 물론이고 미시시피 등 남부의 흑인거주 지역을 방문해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로버트는 캘리포니아의 가난한 멕시코계 농민 운동을 일으킨 세사르 차베즈를 만나는 등 소수인종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법무장관으로서 조직범죄와의 전쟁을 벌였던 그였지만 상원의원으로서는 마피아에 대해 언급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법무부는 지미 호파, 칼로스 마르셀로 등을 상대로 한 조용한 전쟁을 계속했다. 로버트 케네디가 법무부로 데려온 젊은 변호사들이 로버트가 시작한 전쟁을 이어 나갔던 것이다.
케네디를 좋아하고 린든 존슨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존슨 대통령이 배후가 아닌가 하는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케네디 암살 후에 존슨이 보였던 반응은 한마디로 '공포(fear)'였다. 오스월드가 범인으로 밝혀지고 오스월드는 해병대를 제대하고 소련으로 망명했었으며 뉴올리언스에서 카스트로를 지지하는 친(親)쿠바 활동을 했음이 곧 알려졌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오스월드는 소련이 보낸 첩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불과 1년 전이었던 시점에서 미국 대통령 암살의 배후가 쿠바나 소련으로 드러나면 그것은 전쟁, 즉 3차 세계대전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존슨 대통령은 암살을 공정하게 조사한다면서 얼 워렌 대법원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워렌 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존슨은 워렌 대법원장에게 “당신이 이것을 공정하게 조사해주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나서 미국인 수천만 명이 죽을 수 있다”고 했다. 존슨은 똑 같은 말을 리차드 러셀 상원의원과 제럴드 포드 하원의원에게도 하고 위원으로 참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은 위원회가 암살이 오스월드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을 내려 달라는 의미였다.
존슨의 이러한 뜻을 알아차린 에드가 후버 FBI 국장은 FBI 수사관들이 조사한 방대한 자료 중 배후 문제가 나올 수 있는 자료는 워렌 위원회에 제출하지 않았다. 마르셀로와의 연관성을 암시할 수 있는 자료는 후버 국장의 서류함에서 잠자게 된 것이다. CIA 사정도 비슷했다. 암살이 외국 정부의 소행이라면 CIA는 중대한 실패를 한 셈이다. 하지만 암살이 정신 상태가 이상한 개인의 돌출행동이라면 CIA가 책임을 질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워렌 보고서는 암살에 배후는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형의 죽음의 배후가 마피아, 그리고 마피아와 결탁한 CIA 내 일부조직일 것으로 생각했음에도 로버트는 더 이상 형의 죽음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 당시에는 CIA가 추진한 카스트로 암살 작전(몽구스 작전)이 외부로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만일에 형과 자기가 카스트로를 암살하기 위해 마피아와 협동작전을 폈음이 알려지면 그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서 자신의 앞으로의 커리어는 물론이고 죽은 형의 명성도 크게 손상될 것으로 우려했다. (CIA가 마피아와 함께 카스트로를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은 1967년에 비로서 칼럼니스트 드루 피어슨에 의해 비로소 보도가 됐고, 1975~76년 상원 CIA 활동 조사위원회의 청문을 통해서 확인됐다.)
또 다른 이유는 여자관계였다. 로버트 케네디는 지미 호파와 칼로스 마르셀로가 자기 형, 더 나아가 자기의 비밀스러운 여자 문제를 알고 있음을 알았다. 케네디 대통령이 마릴린 몬로와의 사이에 대한 풍문은 당시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로버트 케네디와 전쟁을 벌이던 지미 호파는 LA에 있는 마릴린 몬로의 저택 내부와 전화기에 도청장치를 설치했다. 이들은 몬로가 케네디와 한 대화 및 몬로가 케네디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녹음을 해 두었다. 마릴린 몬로가 대통령과 관계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하는 것을 말리기 위해 로버트가 비밀리에 몬로를 집으로 찾아 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조용한 집에서 미모의 여배우와 미남인 미국 법무장관이 만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은 정해진 이치였다. 문제는 이들의 대화와 신음 소리가 도청돼서 지미 호파와 마피아의 손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당시는 법원의 영장 없이 CIA와 FBI는 마음대로 도청을 할 수 있었다. FBI는 뉴욕과 시카고 등의 마피아 조직원들의 전화를 도청했는데, 이들이 마릴린 몬로와 로버트 케네디 사이에 대해서 재미있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것을 도청했고 이는 에드가 후버 국장에게 보고가 됐다. 마릴린 몬로는 1962년 8월 5일 일요일 자정 넘어서 자택에서 사망했다. 한참 세월이 흘러서 사망 직전에 로버트 케네디가 몬로의 집을 다녀갔음이 확인됐다. 로버트 케네디는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일정을 치르고 그 날 밤에 부인과 아이들은 샌프란시스코의 다른 곳에서 자도록 하고 자기는 혼자 호텔에 머물다가 LA에 몰래 다녀간 것이다. 일요일 아침 몬로가 사망했다고 온 나라가 난리가 났을 때 로버트 케네디는 부인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의 성당에서 미사를 보았다.
따라서 자신의 장래와 형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선 형이 오스월드의 단독범에 의해 죽은 것으로 묻혀버려야 한다고 로버트 케네디는 생각한 것이다. 로버트 뿐 아니라 케네디 유가족이 의문점이 많은 케네디 암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라고 보아야 한다. 닉슨은 자기가 지시하지도 않은 워터게이트 빌딩 침입사건과 관해서 거짓말을 했다고 대통령직을 물러났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동생인 법무장관과 함께 카스트로를 암살하라고 지시하고 CIA는 마피아와 합동으로 그 작전을 수행했음이 드러난다면 아무리 그 시절이라고 해도 그것만으로도 보통 문제가 아닐 것임은 너무나 분명했다.(계속)
사진 (1)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에 열광하는 흑인들.
사진 (2) 캘리포니아에서 세사르 챠베즈를 만난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
사진 (3) 마닐린 몬로 사망 기사. LA 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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