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국 교수의 생활과 경제 이야기<59>작지만 자세히 보면 슬픈 것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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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식물을 좋아한다. 그래서 남향 아파트라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 앞 베란다에 제법 큰(커봐야 손바닥이지만) 텃밭을 만들었다. 그리고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여러 식물을 키웠다. 석류, 포도나무, 재래 뾰족감, 파리똥나무, 대추나무, 백화등, 치자 그밖에도 베란다 정원이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는 여러 식물들도 심었다. 그래서 거실 소파에 앉아 그것들을 쳐다보며 나름대로는 작은 숲을 보는 기분으로 살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베란다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잘 자라는 나무와 그저그런 나무, 그리고 키우기 위해 애를 많이 썼으나 결국 죽어버리는 나무들이 생기게 되었다. 나무를 키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수분, 햇빛 그리고 바람이다. 바람이 중요한 이유는 중고등학교 수업시간에 배운 것처럼 땅속의 영양분을 빨아들이기 위해서는 숨구멍을 통한 ‘증산작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재동 화훼시장을 가보면 대형 선풍기가 여기저기서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나름대로 과학적 지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나도 창문을 여는 등의 노력을 하였지만 역시 죽은 나무가 생겼다. 야외에 있는 것처럼 ‘비바람을 제대로 받지 않아서 그렇겠지.’ 라고 생각하며 나를 위로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정말 나를 놀라게 하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고 내 마음 속에 작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는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충격이었다고 말씀 드리고 싶다.
하나는 백화등에서 발생하였다. 백화등은 정말 악조건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다. 때가 되면 하얀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고 썩 좋진 않지만 그래도 괜찮은 향기도 내뿜는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흡착가지를 뻗어내어 귀찮을 정도다. 좁은 베란다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가차없이 잘라 버렸다. 그런데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 내가 그러라고 전혀 명령한 바도 없는데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백화등의 흡착가지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흡착가지 대신에 일반 목가지와 비슷한 일자로 뻗어나는 가지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잎도 평상시 잎보다 다섯 배 이상 큰 잎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해 보니 백화등은 나름대로 생존전략을 펴 나간 것이다. 찰스 다윈은 분명히 후천적 변화는 유전자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당대의 생태에는 큰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치자나무였다. 치자와 천리향의 향기는 너무 매혹적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신경을 쓰면서 키웠다. 그리고 치자나무는 나의 기대를 물리치지 않고 어김없이 고혹적인 향기를 때가 되면 내뿜어 주었다. 그래서 그 매력적인 향기 때문에 치자는 꽃이 피었는가를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다. 향기가 곧 그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 전 큰 반전이 있었다. 치자나무에 물을 주는데 이미 치자꽃이 훌륭하게 피어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향기는? 코를 벌름거렸지만 거기에는 향기가 없었다. 나의 직감은 “미안하다.”라는 생각이었다. “그래. 내가 너를 가둬놓고 그저 햇빛과 물만 잘 주면 잘 자란다고 생각했는데. 너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구나. 생식을 위해 벌, 나비를 유혹할 필요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본능으로 꽃은 피우지만 벌, 나비를 유혹할 향기는 내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에 오랫동안 근무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학생들, 젊은이들의 교육과 연결하는 직업병을 가지고 있다. 이 순간에도 그 못된 버릇이 작동하였다.
나는‘관찰력’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식들에게 그리고 수업시간에도 수없이 『관찰력의 중요성』 을 강조하였다. 우리는 교육을 강조하지만 그 훨씬 이전에 관찰력이 존재한다. 우리 옛말에 “보고 배운다.”라는 금언이 있다. 교육도 보고 배우는 것에 비하면 한참 후의 일이다. ‘보고 배우는 것’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해당된다. 여기서 『보고』는 『관찰력』을 의미한다. 관찰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내가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길이다. 그러니 스승이 없어도 되고, 내 옆에 누가 없어도 된다. 모든 존재와 모든 현상은 모두 다 내가 보고 배울 대상이다.
문득 향기를 잃어버린 치자꽃을 보며 이런 생각이 바로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식을 키울 때 자식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 주면, 남 보다 더 고운 옷, 비싼 물건을 사주면 내가 자식을 더 잘키우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더 이상한 최근 풍조는 아이들의 일에 간섭을 하지 않고, 야단치지 않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부모들도 있다.
나는 항상 주장하지만 판단의 중요한 근거는 ‘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정도’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즉 부모가 자식의 일에 ‘간섭을 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어느 범위까지’ 그리고 ‘어느 수준까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관여하느냐?’가 문제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보고 배우기’ 위해서는 많은 『외부와의 접촉』과 『경험』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대의 교육환경은 그것을 막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오로지』 학교공부 만을 위해 그밖에 다른 기회는 아예 차단해 버리거나, 부모가 대신 해주거나, 아니면 돈으로 그것을 대신할 사람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다고 해서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아니다. 대학입시 수준을 보면 90점이 넘어야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지원서를 낼 정도이고, 시험 감독을 하다보면 정말 ‘어떻게 정규고등학교 과정을 거친 학생의 실력이 저 정도일까?’를 걱정하게 만든다.
내가 관찰한 가장 심한 경우는 넓이뛰기 시험을 보는데 아주 무겁고 큰 멋진 신발을 신고, 신발끈을 ‘묶지도 않은 채’ 넓이뛰기를 시도하는 학생이었다. 옷차림으로 보아 그 부모는 상당한 돈을 자기 자식에게 투자했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아마 그 부모는 “자식에게 자기는 최선을 다했다.”고 당연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자식이 입시에 실패하면 “경쟁률이 심해서.”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 그 자식이 혹시 불효하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며 또 하나의 다른 불씨를 만들지도 모르겠다.
치자꽃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준다고 좋은 흙에 적당한 바람과 햇빛을 주었지만 치자는 향기를 잃어버리는 일을 나는 나도 모르게 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식들에게 장기적으로는 해로운 행위를 자식을 위한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치자꽃 이야기와 더불어 몇 가지 작지만 슬픈 사실을 덧붙여 보겠다.
하나는 정치현상이다. 나는 정치관련 글은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래서 구체적 사실 보다는 현상 하나만을 지적해 보겠다. 지금 전(全) 세계는 그야말로 2차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변혁의 시기를 겪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신냉전시대가 성립되면서 정말로 새로운 질서가 정립되어 가는 중차대한 순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치인들 중에서 ‘이런 대외 환경변화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누가 얼마의 비릿돈을 받았고, 해외출국을 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보다는 세계의 정세 변화가 훨씬 더 큰 일이라고 생각한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 보겠다. 『진영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어느 한 당이 의견을 내놓으면 다른 당은 무조건 거기에 반대한다. 세상 일은 모든 면에서 좋은 일은 없다. 그러나 그 안에는 경중(輕重)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안의 경중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상대방이 주장했기 때문에 그것을 반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뿐이다. 바로 『진영논리』의 핵심이고, 폐해다.
그것과 비슷한 것으로 『지역논리』가 있다. 이런 단어가 있는지 모르겠다. 없다면 내가 만든 말이라고 하자. 이것도 사실의 중요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면에서는 진영논리와 비슷하다. 어느 지역은 다른 지역의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매도한다. ‘빨갱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주장을 할 때는 “그것은 그쪽에서의 과장된 논리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또 그것을 부채질하는 것은 일부 대중매체다. 전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한쪽 편을 드는 보도만을 일 삼는다.
가장 좋은 예가 바로 대북지원 문제다. ‘대북지원을 누가 많이 했느냐?’ 그리고 ‘그 지원금으로 북한이 핵을 개발해서 우리나라를 위험에 빠트렸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어느 대통령이 가장 많은 지원을 했을까? 통계청의 자료를 보자. 또 ‘통계청 자료 이외에 숨어있는 돈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소리가 벌써 들리는 듯하다.
통일부 자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최근 정부 중에서 가장 많은 대북지원을 한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이였다. 그리고 노태우 정부는 1990년 러시아에 14.7억 달러를 차관으로 제공하였다. 아직도 상당부분을 상환 받지 못하고 있고, 이자돈도 받지 못하고 있다. 일부는 무기로 받아 불곰사업이 진행되었지만 당시에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니 그것으로 변명하지는 말자.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누가 더 많은 대북송금을 했느냐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역논리』에 빠져 중요한 판단을 흐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일 뿐이다.
만약 노태우 정부에서 벌어진 일이 다른 정부쪽에서 벌어졌다면 ‘이렇게 조용하게 언급도 잘 되지 않으면서 지나갈까?’ 아마 분명히 아닐 것이다. 작년 우리나라 GDP는 1990년의 10.8배이므로 14.7억달러에 10.8을 곱하면 159억달러에 해당된다.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져보아도 엄청나게 큰 돈이다. 더욱이 1990년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148억 달러였다. 14.7억달러라면 노태우는 정확히 우리나라 외환보유고의 십분의 일을 이자돈도 받지 못하는 나라에 그것도 몇 년 후에는 국가 부도를 낸 나라에 빌려준 꼴이다.
매스컴은 어느 정도 공정한 위치에 서서 국민을 계도하여야 하여야 한다. 국민들은 자세한 여러 사실을 알 수가 없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매스컴에 나온 사실을 그대로 받아드릴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매스컴이 어느 정도의 자기 색을 갖는 것은 용인될 수 있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수준과 정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런 긴 설명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는 아니지만 결코 큰 나라도 아니다. 즉 화합을 하지 않으면 국가의 미래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다 함께 힘을 합해도 부족한 상황이다. 중국은 동북공정 등으로 끊임없이 우리 땅을 탐내고 있고, 일본은 자신의 국방비를 순식간에 두 배로 늘렸으며, 미국은 우리나라 최고의 돈 되는 산업인 지동차와 반도체 산업을 미국 내로 이전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한때 트럼프는 미군 주둔비를 10배(1,000%)로 올리라고 요구하였었다.
우리 모두가 최소한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은 진영논리나 지역논리 보다는 사실에 입각한 판단을 하였으면 좋겠다. 감정적인 판단이나 자신의 선호에 맞는 주장보다는 좀 더 사실에 입각한 판단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따뜻한 햇볕 만큼이나!
하나만 더 지적하고 이 글을 마칠까한다. 며칠 전 『우리나라 제주도 근해』에서 미국, 영국, 불란서, 캐나다, 일본 5개국이 합동해상훈련을 하였다. 중국의 해양진출에 대한 시진핑의 야욕과 불과 한 달 전에 러시아와 중국이 우리 『동해』에서 해상합동훈련을 한 것에 대한 대응차원의 훈련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우리 동해에서 러시아와 중국이 해상훈련을 했을 때도 우리나라는 이렇다 할 대응이 없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일은 자유세계 5개국이 합동훈련을 우리 제주도 앞바다에서 하는데도 우리나라 해군은 이 훈련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앞바다에서 중국의 해상침공을 대비하는 훈련이었는데도 막상 당사자인 우리나라 해군은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이런 일이 전 정권에서 있었다면 그 많은 지역논리자와 일부 대중매체들이 이처럼 조용히 있었을까?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은 국가의 의견이 부당하게 갈리는 일이다. 임진왜란 때 풍신수길을 판단하기 위해 파견된 두 사람이 자기 소속붕당의 의견만을 반영하여 전혀 반대의 의견을 정부에 제출했었다. “눈빛이 흉흉하여 곧 침범할 것 같습니다.” “얼굴이 쥐상이어서 그런 큰일을 저지를 사람이 못됩니다.” 두 사람은 분명히 같은 느낌을 풍신수길로부터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속붕당의 의견을 저버릴 용기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난 후 벌어진 임진왜란으로 우리국토와 우리백성은 얼마나 큰 피해를 봤었는가? 지금의 『진영논리』와 『지역논리』를 보면서 그 때의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오직 멀지 않은 장래에 그렇지 않게 되기를 두 손 모아 바랄뿐이다. 꼭 그렇게 되기를 바랄뿐이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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