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국 교수의 생활과 경제 이야기<77>어떻게 자식을 키우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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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상상을 해본다. 어린 아이들이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꾸는 것처럼, 나는 가끔 아주 엉뚱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어떻게 자식을 키우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까?” 하는 질문이다. 눈코입귀는 우리 모두 다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같은 이목구비로 부터 수억개의 서로 다른 얼굴이 생겨나는 것처럼 자식교육도 수 없이 많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이 없을까?를 생각해 보며 이 글을 써보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자식 교육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부모로부터 선천적으로 받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천적으로 환경이나 교육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1. 부모로부터 선천적으로 받은 요인들
선천적인 요인들은 우리 모두가 아는 것들이다. 내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가? 내가 어느 시대에 태어났는가? 카스트와 같은 신분제도가 있는 나라에서 태어났는가? 대도시에서 태어났는가? 아니면 시골에서 태어났는가? 부모님이 누구인가? 부모님의 교육열이 높은 분인가? 부모님의 지식이나 재산은 어느 정도인가? 등등 수없이 많은 요인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경영학에서는 상황(여건)을 분석할 때 변수를 크게 두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나의 노력에 의해 조절(콘트롤, Control)할 수 있는 요인이냐? 아니면 조절이 불가능한 요인이냐의 구분이다. 그리고 내가 콘트롤할 수 없는 요인을 제약조건(Constraints)이라고 부른다.
2023년 현재 경제 상황에 빗대어 예를 든다면 미국과 중국 간의 싸움, 우크라이나 전쟁, 유가 상승, 이자율, 환율 등은 제약조건이 된다. 이런 요인들은 내가 어떻게 조절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요인에 대한 나의 전략은 그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제약조건들은 우리 보통 사람에게 『생각의 기본 틀』을 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책 중에 “시골 쥐와 도시 쥐” 이야기가 바로 이것의 좋은 예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깡촌 출신인 나는 여러 이유에서 전 세계를 상당히 많이 돌아다녔지만, 지금도 대도시보다는 시골이 훨씬 더 마음이 편하다.
물론 이런 제약조건 중에서도 시골 출신이 대도시로 이사 간다거나 또는 부모님이 갑자기 큰돈을 벌었다거나 해서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인의 노력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어릴 때 이미 영향을 받아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맹모삼천(孟母三遷)이 바로 그것이다. 맹자의 어머니가 이사를 간 것이지 맹자가 주장하여 이사 간 것은 아니다.
많은 심리학자 말에 의하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의 70%~80%가 이처럼 선천적으로 결정된다고 한다. 그러면 나의 운명이 7, 80%가 이미 결정되었다면 나의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져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이다. 즉 주어진 조건에 의해 나의 많은 부분이 결정되지만, 나의 노력과 태어난 이후 여러 여건에 따라 너무 많은 변수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정도를 30~40%라고 생각한다.
언뜻 생각하면 작은 듯이 보인다. 그러나 절대 아니다. 간단한 산수를 한번 해보자. 선천적으로 받은 요인을 80%라고 하자. 사람에 따라서는 90%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 80%를 택했다. 그리고 태어난 후의 노력에 의한 요인을 나의 주관에 따라 40%라고 하자.
80 더하기 40은 120이다. 80 빼기 40 하면 40이다. 120과 40은 물경 3배의 차이다. 하늘과 땅 차이다. 이 수치는 큰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차이다. 이 간단한 계산이 뜻하는 바는 선천적인 요소가 그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후천적 요인과 합하여 나타난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2. 후천적 자기 노력과 환경에 의해 발생하는 요인(교육의 중요성)
나는 이런 후천적 요인 중에서도 두가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본인의 노력이다.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주장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교육은 정말 중요하다. 앞서 말한 ‘맹모삼천지교’도 결국은 교육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죽은 사람을 염하는 집에서, 장사하는 집으로 그리고 결국 공부하는 서당 옆으로 이사 갔을 때 맹자는 공부에 뜻을 두고 큰 학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맹모삼천의 교훈은 자식에게 있어서 ① 교육이 매우 중요하고, ② 교육 중에서도 무엇을 보고 자랐느냐가 중요하며, ③ 그런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이 간단한 ‘맹모삼천지교’의 일화에서 교육의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가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1) 교육의 중요성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80%에 40%를 더하고 뺌으로써 120과 40이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난다는 것을 통해 이미 설명하였다. 나는 이 간단한 계산이 교육이 중요성을 적확하고 또 명확하게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2)‘무엇을 보고 자랐느냐’의 중요성
우리 옛날 어른들이 흔히 하시는 말씀에 “어이구, 보고 자란 것이 없어서... 쯧쯧”하시는 경우가 많았다. 이 평범한 말에는 놀라운 교육철학이 숨어있다. 곧 교육은 글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교육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보고 자란 것’을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밥상머리 교육’이다.
즉 부모님들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말이나 행동 그리고 식탁에서 하는 대화 등에서 아이들 교육의 원천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자기 식구들끼리만 모여 있다고 하여 남을 속인 일, 거친 말, 무식한 표현, 필요 이상으로 남을 흉보는 일 등을 하면 그 자식도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또한 ‘식탁’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대부분 옛날 가정에서 온 가족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밥을 같이 먹는 식탁이다. 그래서 이런 식탁의 자리는 가족 간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자리이고, 또한 화합이 이루어지는 자리다. 유대인 교육의 철칙 중 하나는 ‘절대로 식탁에서 남을 비난하는 말을 하지 않고, 특히 가족들 간에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있어도, 절대 나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대신 재미있는 얘기나 오늘 회사에서 또는 상점에서 있었던 일 중에서 교육적인 시사점을 평화롭게 얘기한다고 한다.
아마 이렇게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즐거운 일이 있어야지요.” 또는 “기분이 안 좋은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라는 말이다. 맞는 말씀이다. 우리 대부분 사람들의 삶은 그저 그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니까 그렇게 행동하는 것과, 설령 그럴지라도 부모의 지혜를 발휘하여 식탁의 자리를 화기롭게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여러분의 삶이 어려울지라도, 과거 유대인들이 게토라는 지역에서 떠나지도 못하고 갇혀 살아야만 하는 삶이나, 나치 치하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사는 삶, 또는 왕권이 바뀔 때마다 여기저기로 쫓겨 다니면서 사는 삶보다는 수백 배, 수천 배 더 나은 삶일 것이다.
자식 교육은 내가 기분이 좋을 때는 하고,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안 하는 것이 자식 교육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 옛 어른들도 ‘가장 어려운 것이 자식 교육’이라고 하신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도 상당수의 분들이 고개를 끄덕거릴 것으로 생각한다.
(3)‘무엇을 보고 자랐느냐’의 또 다른 의미
그런데 ‘무엇을 보고 자랐느냐’라는 말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말로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여 준 행동』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교육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보고 배우는 것이다. 말은 다음이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그에 따른 행동이 없으면 ‘울리지 않는 종’처럼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부모인 나도 정말 교육이 어려운 것은 바로 이점이지 않는가 생각한다. 그러나 너무 부담가질 일은 아니다. 아마 다음에 말하는 이런 행동 기준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① 자식에게 이런 말을 ‘할까, 말까?’하는 경우가 있으면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하라는 것이다. 요즘 “5초만!”이라는 공익 TV 방송이 있다. 좋은 광고라고 생각한다. 잠깐 더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래도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하지 않는 것이 옳다.’
그리고 ‘할까, 말까?’를 결정할 때 더욱 좋은 것은 나의 성격도 고려하는 것이다. 내가 좀 과격한 성격이라면 “내가 조금 급한 성격인데 그것을 고려해도 내가 해야 할까?”를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이런 얘기는 이 글을 읽는 분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 나에게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4) 교육에서 어머니의 중요성
자식 교육에 대한 부모님의 예(例)는 수없이 많다. 앞에서 언급한 맹모삼천의 일화, 에디슨이 좀 바보스럽다는 선생님의 말에 “우리 아이는 생각을 많이 하는 아이”라고 답한 에디슨의 어머니, 에디슨과 함께 노벨상을 받으라는 스웨덴 노벨상위원회의 제의에 “에디슨은 발명가일 뿐이고, 나는 위대한 물리학자인데 내가 어떻게 그런 인물과 공동수상을 하란 말인가?”라며 노벨상을 거절한 테슬러(테슬러 코일, 테슬러 자동차 이름이 그를 따른 것임)의 어머니, 알렉산더 대왕과 어머니, 헬렌 켈러와 설리번 선생님 등등. 수없이 많다. 그러나 잘 관찰해 보라. 아무리 봐도 아버지는 없다. 좀 억울하다. 그러나 현실이 그런 걸 어떡하겠는가?
어떻든 이런 사례들이 지적하는 것은 하나다. 바로 교육의 한가운데는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가 계신다’는 사실이다. 어머니는 자기 몸으로 고통을 참으며 자식을 낳았다. 밤잠도 안 자며 젖을 먹였다. 그리고 가장 많은 시간을 특히 교육적 효과가 큰 유아시절과 어린 시절에 자식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분이다.
우리가 깜짝 놀랐을 때 나도 모르게 “엄마야!”하는 사람과 “아빠야!”하는 사람의 비율은 100:1 정도나 될까? 어떻든 그렇다. 나도 자식 교육에 애를 많이 썼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좀 억울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참자. 한번 더 꾸욱 참자. 지금까지도 참았는데...
어떻든, 교육에서 어머니의 중요성은 극히 중요하고, 그 어머니가 바로 내 아내이고, 바로 내 며느리다. 그러면 어떤 아내, 어떤 며느리를 얻어야 할까? 단순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하였다. “너희들이 어떤 여자를 아내로 택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여자가 예쁜 것은 열 번째쯤이다. 너무 미우면 곤란하겠지만 여자는 예쁘장하면 충분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영리하고, 착한 것이다. 그래야 가능성이 있는 자식이 나오고, 그 아이를 올바르게 키울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좋은 여자는 왠지 모르게 품위 있게 행동하는 여자다. 그런 여자는 타고 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착하고 영리한 여자는 나이가 들면 품위 있고 지혜로운 여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절대로 처가의 부(富)를 보지 말아라. 지나치게 가난하지 않으면 된다. 옛날부터 남자는 하혼을 하고 여자는 상혼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어느 정도 책을 읽는가를 조용히 살펴봐라. 그러면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3. 같은 교육이 왜 사람에 따라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말 다양한 이론이 있다. 나도 한 마디 덧붙이고 싶은 주제이다. 그러나 나는 전문 교육학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론이 아니라, 내 ‘생각’을 말해 보겠다. 그러니 동의하면 좋고, 안하면 그냥 흘려보내면 된다. 그러나 나만의 독특한 경험을 일반화하는 것은 아니고, 오랜 관찰과 반추를 통해 생각하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같은 교육을 받았는데도 왜 큰 차이가 날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고, 또 많은 사람들의 연구 대상이다. 과거에는 교육이라는 것 자체가 너무 비싼 행위였다.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아 판본 인쇄 책은 너무 비쌌고, 책이 필요하면 필사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너무 귀했다. 100권의 책을 갖기도 힘들었으며, 서양의 대사원에서도 책 100권은 매우 많은 숫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책이 넘쳐나고,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이며, 인터넷 등으로 찾고 싶은 자료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공교육의 침체로 사교육비가 엄청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해 내가 노력하면 공부할 수 있는 길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런 사회에서도 사람에 따라 성취도에 왜 큰 차이가 있을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내 생각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그것은 ① 차분한 성격(집중할 수 있는 능력) ② 조용히 관찰할 수 있는 능력 ③ 부모의 야단스럽지 않은 교육 자세 ④ 독서와 자기만의 생각하는 시간 ⑤ 나쁘지 않은 머리 등이다. 그리고 여기서 열거한 것은 내가 생각하는 중요도의 순이다.
(1) 머리의 좋고 나쁨
가장 많은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말하는 머리의 좋고, 나쁨에 대해 먼저 얘기해 보겠다. 나는 머리가 좋다는 것과 공부를 잘한다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초적인 머리는 물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기초적인 머리는 IQ로 100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IQ는 대부분 110 이상이다. 그러므로 머리의 좋고 나쁨이 공부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머리의 좋고 나쁨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다. 바로 남이 해놓은 것을 따라 공부하는 것과 내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경우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경우에는 당연히 엄청난 머리와 노력 그리고 꾸준한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남이 이미 해놓은 것을 따라가는 정도, 특히 우리나라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정도를 공부하는 데는 대부분 아이들의 IQ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나의 확신이다. 그러면 왜 따라가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가 생기는가?
(2) 차분한 성격(집중할 수 있는 능력)과 부모의 야단스럽지 않은 교육 자세
나는 위에서 지적한 다섯가지 요인 중에서 첫 번째와 세 번째 요인을 함께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두가지는 거의 함께 가기 때문이다.
차분한 성격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지적하는 것 그대로다. “내가 모르는 사실이나 현상이 있을 때 그것을 곧바로 ‘안다, 모른다’라고 말하지 않고, 찬찬히 쳐다보고(관찰해 보고, 생각해 보고) 그다음에 ‘왜?’라는 질문을 하거나, ‘아, 그렇구나!’라고 말하는 자세”를 말한다. 즉 차분한 성격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매우 크다. 이런 차분한 성격의 아이는 꾸준히 자란다.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란다. 그래서 차분한 성격은 매우 귀중한 특성이 되는 것이다.
가. 그럼 그런 차분한 성격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이런 성격은 이미 ‘타고날 때’ 어느 정도 가지고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식에게 강요할 수도 없다. 하지만 부모의 교육에 의해 어느 정도 북돋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요즈음 부모들의 교육은 오히려 이것을 해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자기가 자식 교육에 열심이라는 분들 사이에서 더 자주 발견되는 것’ 같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어느 정도 『그냥 놔둘 필요가 있다.』 교육용어로 표현한다면 『적절한 방임』이 필요하다. 과거에는 이것이 저절로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먹고살기 어려운 부모님들은 밖으로 돌아다니셨거나, 농사일이 바빠 아이들을 옆에서 챙겨줄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절로 자식을 방임할 수밖에 없었고, 혼자 남은 자식들은 저희끼리 치고받고 놀거나, 아니면 조용히 앉아 『찬찬히 쳐다보고, 관찰하고,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①형제간 수가 적고, 아파트라는 ② 좁고 일정한 공간에 살며, 집안에 ③관찰 할 수 있는 사물 자체도 별로 없다. ④TV나 엄마가 사다놓은 애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장식품들, 아니면 개인적으로는 교육적 가치가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 ⑤ 애완동물이 전부다.
나. 왜 아이들이 전자게임에 열광할까?
먼저 아파트라는 공간 안에 갇혀 살아야만 하는 아이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앞서 말한대로 우선 아이들이 흥미를 가지고 관찰해야 할 대상이 거의 없다. 그리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동일한 공간인 아파트라는 한정된 공간에 갇혀 지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나의 노력에 의해 변화될 수 있는 것 또한 거의 없다. 이것은 어린 자식들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유일한 하나의 예외가 있다. 바로 전자게임이다. 소리도 “뿅뿅” 멋있다. 내가 총을 쏘면 총이 발사되고 근사한 소리가 나며, 적이 파괴된다. 승리감이 느껴진다. 자동차의 핸들을 돌리면 자동차가 오른쪽 왼쪽으로 움직이고, 속도도 내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즉 전자게임의 세계는 내가 마음대로 조절이 가능한(Controllable) 유일한 세상이며, 내가 주인공이 되는 세상이고, 내가 더 잘 하면 왕과 같은 성취감도 얻을 수 있는 세상이다. 때로는 멀리 떨어진 친구와 교감도 얻을 수 있다.
얼마나 아이들에게 멋있는 세상인가? 게다가 부모님들이 무조건 못하게 하니 더더욱 재미있다. 어린 학생들이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이처럼 지금의 어린 아이들이 생각하는 세상은 우리가 과거에 접했던 세상과 너무 다르다는 것을 부모님들이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너무 당연하여 특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던 나무도, 새소리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도 없는 세상이 지금 아이들이 접하는 세상이다. 이런 환경적 변화가 자식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나는 강력히 주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요즘 아이들은 자기들이 ‘주도’가 되어 해 볼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전자게임이 예외일 뿐이다.
부모가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자식들에게 ①자연을 접하게 하고, ②계절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게 하며, 그런 것들과 ③상호 교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반드시 만들어 주어야 한다.
다. 자식이 해야 할 일을 부모가 대신해주는 것이 과연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일까?
요즈음 국가적으로도 자녀 출산율이 0.78명으로 너무 줄어 큰 걱정이다. 그러나 교육적 측면에서도 형제들의 숫자가 적은 것은 정말 큰 문제다. 나는 대학교수였기 때문에 가끔 주례를 서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럴 때 나는 결혼할 예비 부부를 반드시 오라고 하여 다짐을 받는다. “아이를 3명 이상 낳을 것을 약속해라. 그러면 주례를 서고 그렇지 않으면 주례를 서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자식은 세 명이 있어야 상호 간에 교감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바퀴 하나인 외발 자전거는 달리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며 그저 뒤뚱 뒤뚱 거릴 뿐이다. 두발 자전거는 달릴 수는 있으나 설 수는 없다. 세 발이 되어야만 설 수도 있고, 달릴 수도 있으며 자유롭게 방향도 바꿀 수 있다. 자연에서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최소의 숫자는 3이다. 우리는 ‘삼세판’이라고 한다. 노래 중에는 ‘최진사댁 셋째 딸’이라는 노래도 있다. 첫째도 아니고 들째도 아니고 왜 셋째 딸일까? 거기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
첫째는 모든 것을 부모님이 해준다. 그리고 자식이 하나이면 다 내 것이다. 쟁취를 위해 특별한 어떤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 가만히 있어도 된다. 둘째는 그 반대다. 형에게 눌려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만이 많다. 그리고 자식이 둘이라면 너 아니면 나다. 세상은 이분법으로 보인다. 싸워야 한다. 그러나 셋째는 두 형제를 보며 자랐다. 형의 잘못도 보고, 둘째의 불만도 보았다. 그리고 내가 누구 편을 드느냐에 따라 판세가 2:1 또는 1:2가 된다. 나에 의해 승자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셋째는 대부분의 경우 성격이 모나지 않고 부드러우며, 판세를 능(能)하게 판단한다고 한다.
자식이 셋이 있는 집은 화애로운 경우가 많다. 자식이 하나인 집은 대체적으로 가족 간에 대화가 매우 적다. 조용하다. 간단한 대화밖에 없다. 또한 가족들 간에 대화할 소재 자체도 없다. “학교 갔다 왔니? 배고파?” 등으로 아주 짧다. 대답도 “네. 아니오.” 등으로 더욱 짧다.
둘인 집안은 그것 보다는 낫지만 상호 간에 대화는 그리 많지 않다. 너 아니면 나이기 때문에 대화의 소재가 그리 많지 않다. 결론이 쉽게 난다. 의견교환의 필요성도 크지 않다.
그러나 자식이 세 명이 되면 집안이 좀 시끄러워진다. 할 얘기도 많고, 불만도 많으며 형제 간에 조정해야 일도 많아 진다. 대화가 갑자기 많아질 수밖에 없다.
1의 삼승은 1이다. 2의 삼승은 8이다. 그러나 3의 삼승은 27이다. 27의 관계는 1과 8의 관계와는 비교가 안 되는 복잡성을 가지게 된다. 일도 많고, 대화도 많아지며, 조정할 일도 많아진다. 이런 가운데 자식들의 사회성은 저절로 키워진다.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배우게 되고, 눈치 보는 법도 저절로 알게 된다.
라. 자식 키우기가 힘들고 돈도 많이 든다구요?
이런 말들을 흔히 많이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솔직히 『매우 한심한』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자식을 셋 키웠다. 돈이 많이 든다. 그러나 자식 하나 키울 때의 세배는 절대 아니다. 많아야 두 배 정도, 아니면 자식 하나 키울 때 보다 조금 더 드는 정도다. 자식이 많아지면 형의 것을 동생이 쓰면 된다. 터울이 있을 때는 첫째가 막내를 키우는데도 많은 힘이 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과거 우리 부모들은 여유가 있어서 우리들을 키웠는가? 요즈음은 공교육에 문제가 많아 과외비 등 교육비가 많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식이 어렸을 때 드는 돈의 대부분은 자식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엄마가 괜히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피아노 학원, 웅변학원 안 보내도 된다. ‘남이 하는데 내가 안 하면 불안해서 등등’이 대부분의 이유다. 그리고 냉철히 생각해 보자. 지금의 엄마가 그때 받은 피아노나 웅변학원이 지금의 나를 만든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가? 아마 아닐 가능성이 높다.
자식들에게 필요 없는 과외를 시킬 돈이 있으면, 차라리 아이들의 손을 잡고 들로 산으로 나들이를 가고, 식물원 동물원을 가고, 문화재가 있는 고궁이나 경치 좋은 곳으로 놀러 가는 것이 훨씬 더 자식을 정서적으로 올바르게 키우는 것인지 모른다. 아이들은 이런 것을 보면서 마음이 넓어지고, 잠재적인 지적 능력과 호기심이 커지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에 훨씬 더 큰 사람으로 자랄 수 있고, 공부도 더 잘 할 수 있다.
아직 능력이 자라지도 않은 아이에게 조기 영어교육을 시켜 그저 단순하기 짝이 없는 영어 단어 몇 마디를 남보다 조금 빨리 하게 하는 것이 절대로 올바른 교육도 아니고, 자랑도 아니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 그래야 더 멀리 더 높이 뛸 수 있다.
더욱이 내가 한심한 것은 부모로부터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생활비를 보조 받으면서 외제차를 타고, 강아지 새끼를 키우며, 자식은 돈이 많이 들어 낳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이상하지 않은 행동으로 보이는 이상한 사회로 변해가는 것이 나에게는 정말로 이상하다. 다 큰 자식을, 게다가 결혼까지 한 자식을 그렇게 도와주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자란 자식이 부모가 나이들면 효도를 할까? 아니면 부모님의 재산을 언제쯤 마음대로 쓸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해 본다.
마. 자식의 실수를 대신해주는 부모의 행동
“아이는 실수를 하면서 자란다.”는 유명한 서양속담이 있다. 즉 실수를 통해 자기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질 수 있는 공부를 체험을 통해 배운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식이 실수하면 어쩔까? 하고 ‘노심초사’하는 것은 부모의 당연한 마음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부모의 이런 마음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과거에는 자식이 많고 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자식들을 일일이 돌봐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과거에는 의도하지 않은 자유방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자식이 많아야 한두명이고, 경제적 사정은 풍요로워졌으며, 기계가 사람을 대신함으로써 여유시간이 너무 많이 생겼다. 즉 부모가 자식을 간섭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그리고 갑자기 많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 자식 행동에 대한 과잉간섭과 자식이 당연히 해야 할 행동까지 부모가 대신해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마마보이”가 탄생하는 배경이다. 덩치는 커졌다. 나이 들어 결혼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부모님 특히 어머니가 결정해 주었기 때문에 나이 들어서도 어머니에게 물어 본다. 내가 어느 젊은 부인으로부터 들은 가장 한심한 하소연은 “자식을 가질까요? 말까요?”를 시어머니에게 물어보는 남편이라는 얘기였다.
생각해 보자. 어머니가 오래 살까? 아니면 자식이 오래 살까? 그러면 부모가 떠나면서 편안하게 떠날까? 아니면 걱정되는 마음으로 떠날까? 그러나 그때 후회하면 너무 늦은 후회가 되지 않을까?
우리나라 부모의 자식 사랑은 참으로 유별나다. 어느 일본학자가 하는 강의를 들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일본의 자식 교육열도 우리나라만큼은 아니지만 일본도 강한 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자식이 20세가 될 때까지다. 20세가 되면 집을 나가 독립해야 하고, 20세가 넘어서도 집에 있으면 집세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이 들어 결혼하고 직장이 있는 자식이 외제차를 타고, 사람 하나의 경제적 몫을 한다는 강아지를 키우면서 생활비가 부족하다는 자식, 그리고 귀찮다고 집에서 밥해 먹지 않고 대부분을 외식하는 자식에게 생활비를 대주는 것이 과연 내가 올바르게 자식을 키우는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어치피 자식에게 갈 것, 조금 일찍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단순히 돈만을 생각하면 그럴지 모르겠다. 그러나 경쟁이 점점 더 심해지는 미래 사회에서 자식이 꿋꿋하게 스스로 생존해 나가도록 키우는 것은 부모의 가장 막중한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생존 가능성』은 매우 간단한 개념이다. “내가 조언을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아도, 내 자식이 혼자서 올바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겠느냐?를 묻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내 자식이 나보다 더 세상을 잘 헤쳐나갈 수 있도록 키웠느냐?”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에게 조용히 물어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서양 부모의 자식 교육 목적은 분명하다. “내가 자식을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살수 있도록 키우는 것”이다. 미국 컬리지의 강당에는 “스스로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시민의 양성”이라는 글귀가 대부분 강당의 중앙에 새겨져 있다.
마마보이로 자식을 키우고, 젊은 자식이 자기 능력 이상의 현시적(顯示的) 생활을 위해 생활비를 보조해 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4. 그러면 어떻게 키우는 것이 올바르게 자식을 키우는 것일까?
아마 이것은 정답이 없는 문제일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 어느 나라인가? 같은 나라일지라도 어느 지역에서 태어났는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가? 재산이 얼마나 있는가? 교육열이 얼마나 있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는가? 그리고 어떤 성격을 가지고 태어났는가? 등등. 너무 많은 요인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좋은 답변을 드릴만큼 이 분야에 밝은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관찰하고, 또 이 글에서 설명한 내용에 조금 더 부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간단한 설명을 더하여 설명하겠다.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성격이 매우 중요하다. 아마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그리고 옛 조상님들의 말씀에 의하면 『태교(胎敎)』 가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태교에 관해서는 많은 기존 책자가 있다. 꼭 그것을 읽어 보고 따를 것을 권한다.
교육은 어릴 때 교육이 중요하다. 특히 『밥상머리 교육』이 중요하다. 그리고 어릴 때의 교육은 아버지 보다는 어머니가 훨씬 더 중요하다. 아내나 며느리를 얻을 때 이것을 명심하라. 영리하고 착한 여자 그리고 품격이 느껴지는 여자를 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이런 여자를 얻는다면 자식교육은 이미 7,80% 성공한 것이다.
자식은 『보고 배운다.』고 한다. 말 보다는 내가 보여주는 행동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내가 바르면 자식들은 저절로 바르게 자란다. 내가 요령을 피우면 자식도 요령 피우는 것을 ‘먼저’ 배운다. 모든 것은 원칙에서 시작하여야 하고, 요령은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이다.
자식을 차분한 마음을 갖게 키워라. 자식이 생각하고 있는 도중에 절대 ‘먼저’ 자식을 대신하여 결정해 주지 말아라. 특히 내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을 잘 키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런 실수를 저지른다. 자식의 의사결정을 대신해주지 말아라. 그리고 설령 자식이 잘못된 의사결정을 했을 때도 “왜 그렇게 결정했는가?” 이유를 물어 보라. 그 이유를 듣고 부모의 의견을 제시해라.
만약 분명히 잘못된 결정일지라도, 그 결과가 그리 크게 문제되지 않는 경우라면 아무런 조언도 반대도 하지 말아라. 잘못된 결정과 결과를 통해 스스로 배우도록 하라.
차분한 마음과 관찰력을 키워주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태교에 의해 결정되고, 자식을 키우는 방법에 의해 북돋워진다. 어렸을 때 그림을 똑 같이 모사하는 임화(臨畫)를 그리게 하라. 그리고 화분이나 마당에 꽃을 키우게 하고 『관찰일기』를 쓰게 하라. 이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집 안에 소리 내는 동물을 키우지 말아라. 자식의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행위다. 반려견을 껴안고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런 시간이 많겠는가? 아니면 공부하는데 밖에서 낑낑거리면 그때 자식 마음이 흐트러지는 시간이 더 많겠는가?
자식을 가지기 전(임신 전) 최소 3주일 또는 가능하면 100일 동안 술, 담배, 마약을 하지 말아라. 우리나라에서 마약은 거의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요즘 술, 담배를 하는 젊은 인구가 늘어 난다고 한다.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NGC 영화자료에 의하면 남자가 술, 담배를 하면 니코틴과 알코홀이 피를 타고, 정자에 흘러가 술, 담배를 하는 정자가 나온다고 한다. 특히 엄마는 임신 전 또는 임신 중 또는 수유기간 중에 술, 담배를 하면 니코틴과 알코홀이 그대로 난자에게 또는 임신 중의 자식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수유 중에는 젖을 통해 아기에게 전달된다.
마이크로 촬영기를 통해 엄마가 포도주 반잔 정도를 마신 후 아이가 뱃속에서 요동치며, 고통받는 모습은 정말 보기 힘들었다. 특히 임신 3주 전부터, 임신 중, 수유기 때 술, 담배를 하는 것은 엄마로서 정말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유(牛乳)는 소젖이다. 송아지를 키우도록 특화된 젖이다.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출산 후 얼마 동안 나오는 모유는 아기의 면역력을 키우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성분이 들어있다. 엄마의 자궁이라는 최적의 장소에서, 세균이 득실거리는 세상으로 나오는 것이 출산이다. 그리고 그럴 때 엄마로부터 나오는 초유(初乳)는 이런 환경에서 사람인 자식(송아지가 아닌)이 생존할 수 있는데 필요한 성분을 가지도록 특화된 젖이다. 반드시 기억할 일이다. 초유를 먹지 못한 아이들이 병약하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이다. 기업과 일부 의사들의 마켓팅에 속지 말기 바란다.
자식을 낳는 것도 남이 그런다고 하여 따라갈 일도 아니고, 자식을 키우는 방법도 남이 한다고 하여 따라 갈 일은 더욱 아니다. 유행하고는 전혀 다른 얘기다. 자식을 낳고, 키우는 것은 유행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가능한 오랜 세월에 의해 검증받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중시해라. 다시 한번 강조한다. 기업과 일부 의사들의 마켓팅에 속지 말기 바란다.
어머니 아버지 부모님과 선생님을 훌륭한 분으로 자식이 생각하게 하라. 절대로 자식 앞에서 부모 한편을 나쁘게 말하지 말라. 그러나 이것은 정말 많은 인내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우리 대부분은 필부필부다. 뛰어난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자식이 나의 아빠를 나의 엄마를 나의 선생님을 훌륭하다고 생각할 때 그 지식은 『본 바 있게』 자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면 반드시 방에서 나와서 정중한 인사를 드리게 하라. 그리고 아버지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격려를 해주어라. 자식은 그럴 때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공부에 방해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공부를 해 본 사람은 누구나 안다. 오히려 숨 막히도록 방안에만 쳐 박아 놓는 것은 집중력도 떨어지고, 능률도 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의 없는 자식을 만들 뿐이다.
같은 이유에서 공부하는 것을 별것으로 만들지 말아라. 부모가 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당연히 해야 할 그런 일을 하는데 왜 그것을 별 것으로 만드는가? 별것은 어쩌다 하는 것이다. 학생이 공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자연스런』 집안 분위기를 만들 때, 그 아이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공부에 열중할 수 있다.
5. 결 론
이런 글에 결론은 있을 수 없다. 다만 중요한 말로 결어를 말할까 한다.
교육학에서 유명한 말이 있다.『문제 있는 부모는 있어도, 문제 있는 자식은 없다.』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이 항상 맞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혹시 자식이 잘못되면 그 근본 원인은 자식에게 있지 않고, 부모에게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보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게 작용한다는 뜻일 것이다.
『보고 배운다.』는 말을 가슴에 잊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 선조들의 이런 지혜로운 말씀을 따른다면, 저절로 올바른 자식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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